유비무환이라고 했다.
미리 준비되어 있으면 근심할 것이 없다.
현재가 아무리 평화롭고 행복하다고
해도
위험은 존재하므로 이에 대한 준비는 반드시
되어 있어야 한다.
자칫 조그마한 소홀함이 회복할 수 없는 낭패를
초래하는 경우를 우리는
보아왔다.
발생 가능성이 거의 희박한 이 만약의 사태에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존립 자체가 흔들릴 수도 있다.
한반도에서
유사 이래로 가장 참혹했던 사건으로
나는 1592년 발생한 임진왜란을 꼽는다.
임진왜란은 우리에게 엄청난 시련을 안겨주지만
어느 정도 피해를 입혔는지는 구체적인 자료가 없다.
오히려
이순신 장군의 승전이 부각되고 승리한 전쟁으로 비춰지면서
우리의 잘못에 대한 아무런 반성이 없이 400여년을 흘러와 안타까운 심정이다.
이것은
전쟁이라기보다는 양민 학살이었다.
비록 이순이 다 되어가는 나이지만 400여 년 전에
이 땅에서 발생한 이 일을 생각하면 아직도 흥분되어
얼굴이
상기되고 피가 거꾸로 솟는다.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잔혹함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그동안 꾸준히 대륙의 문물을 가져와 전해준
우리에게, 같은
종족의 피가 섞여있는 우리에게
그들은 정말 인간으로서 도저히 할 수 없는 엄청난 만행을
저질렀다.
400년간 내전으로 통일왕국을 이루는 일본은
그 동안 전쟁을 치루면서 쌓은 경험과 우연하게
얻게 되는 서양의 신무기로
무장하여 거의 300여 년 간
전쟁을 모르고 살아온 우리에게 정명가도라는 엉뚱한 명분을 내세워
이 땅을 무력 침공하였다.
총을 든 군인들과
농기구를 든 농민들의 싸움이었다.
이 침공은 결국 이 땅을 피바다로 만들어
민족 말살에 버금가는 대학살의 결과를 초래했다.
한국통계발전사(통계청
1992년)에 의하면
중종 14년(1519) 우리나라 인구는 3,745,481명인데
인조 17년(1639년)에는 1,521,165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전쟁 직후에 인구조사가 얼마나 신빙성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1645년에도 1,738,888명으로 기록하고 있어
불실한 조사로는
보기 어렵다.
이 인구통계 자료를 보면 1592년 발생한
임진왜란의 참화가 어떠하였는지
대략적으로 짐작이 간다.
1519년 인구조사 후 1592년 사이 인구조사는 소실되어 알 수 없지만
‘조선の인구현상(善生永助, 朝鮮總督府照査資料,
1927)’ 자료에 의하면
중종 38년(1543년) 우리나라 인구가 4,162,021명이라는 기록이 있다.
이 기간 연간 평균 인구증가율을
산정해 보면 0.45%임을 알 수 있다.
이 증가율을 적용시켜 임진왜란 직전인 1591년
인구를 계산해 보면 5,154,916명이 된다.
인구
증가율은 시대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고 통계자료가
얼마나 사실을 반영하고 있는지도 잘 알 수 없어 추정치가
다소 주관적이긴 하지만 임진왜란, 정유재란, 정묘호란, 병자호란 후
우리나라 인구는 약 70%가 감소하였음을 알 수
있다.
문헌비고에
의하면 세종 10년(1428) 한성부의 호구는 18,522호였고,
인구는 109,372명이었다.
선조 26년(1593년) 서울 수복 후 서울의
인구가 38,931명으로
남자 14,062명에 대하여 여자가 배에 가까운 24,869명에 달해서
대부분 부녀자·노약자만이 서울 또는 근방에 남아
있었다고 한다.
당시 연간 인구증가율을 0.45%를 여기에 적용해 보면
임진왜란 직전 서울의
인구는 227,377명이 된다.
이렇게 계산해 볼 때 서울 인구는 임진왜란 전 인구에 비해
17%밖에 되지 않는다.
왜란이
끝난 지 30년이 지난 인조 4년(1626) 경연(經筵)에서
영의정 이원익(李元翼)이 왕의 문의에 답하여 “난 후의 인구가 아직 평상시의 6분의
1이 못 된다.”
고 답변한 데서도 이러한 사실이 확인된다.
실로 “1현의 인구가 수십에 차지 못하고 1리의 주민이 수명에 불과하였다.”
는 기록도
왜군의 진군로나 격전지 근처에서는 겨우
“수리(數里)에 1가, 10리에 1가” 정도만을 찾아볼 수 있었다고 하였다.
일본
교토의 오까야(岡山)에는 마쇼고엔(尙古園)이라는
조그마한 공원이 나오는데 그 오른 쪽에 코무덤이 있다.
임진왜란 당시 도사의 번주(藩主) 나카소아배모토치카(長曾我部元親)는
코를 벤 것이 6,006개인데 이를
천 개씩 소금에 절여
6개의 나무통에 넣어 참모에게 맡겼다고 기록했는가 하면
사쓰마(薩摩)의 번주 시마쯔요시히사(島津義久)는 1597년의
사천성
전투에서 38,000명분의 코를 절취해 10개의 나무통에 넣어
일본으로 가져왔다는 상세한 기록이 있다.
교토시
히가시야마 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신으로 두고 있는 도요쿠니 신사(豊国神社) 옆에
이총공원(耳塚公園)이 있는데 당시 기록에는
1597년 9월
12일 규슈의 나고야성에
조선 각지로부터 수집된 조선인 126,000여 명의 귀나 코를
전리품으로 베어서 15개의 나무통에 절여져 실어온 뒤
이곳에 묻어놓은 역사의 현장이다.
이
두 곳에 모셔진 영령들은 1597년에 학살당한 양민 17만명이다.
이외에도 관리가 되지 않아 사라진 코무덤이나 귀무덤도 있을 것이다.
전쟁에서
철수하는 다급한 입장에서도 도륙한 양민의 수가 이 정도라면
임진왜란 8년 동안 학살이 어느
정도였는지 대략 짐작이 간다.
침략 초기에는 엄청 많은 사람이 속수무책으로 도륙 당했을 것으로 짐작해 볼 수 있다.
임진왜란 당시 우리나라 백성 3명 중 2명이 도륙 당했다.
그들은 전쟁에 대비한 아무런 준비도 되어있지 않은 이 땅을 침공하여
눈에 보이는 모든 사람을 학살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뿐만 아니라
문화유산 훼손하거나 훔쳐간 량도 엄청나다.
당시에 이들은 무자비한 살상, 파괴, 도둑질로 인간으로서
도저히 할 수 없는 천인공노할 짓을
저질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신사 옆에는 그가 무자비하게 살상한
선량한 양민들의 귀와 코를 가져와 만든 이총이 있다.
무덤 위에는 기를 없앤다는 명목으로 커다란
석조물로 짓눌러 놓고 있다.
그리고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 군인의 코와 귀의 무덤이라고
홍보하고 있다.
선량한 양민을 무자비하게 도륙해 놓고도 후손들에게는 아무런 부끄러움 없이
조선군인이라고 사실을 왜곡하여 가르치고 있다. 오늘날의
그들이 이와 같다.
당시
우리가 글을 모르고 미개하다고 무시했던 왜인으로부터
이와 같이 능멸을 당했다.
유사 이래 찾아 볼 수 없는 이런 처참한 일을 당했는데도
책임져야할 식자들은 반성도 관심도 없었다.
마치 이러한 일이 없었던 것처럼 그들끼리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
패를 나누어 100년 동안 해왔던
싸움은 임진왜란 후에도
150년간 계속되었다. 정말 통탄할 일이다.
흥함이
있으면 반드시 망함도 있다.
중국의 왕조는 평균 200년도 안 된다.
우리 왕조는 평균 700년을 유지하여 왔다.
신라왕조 천년은 세계적으로도
유래를 찾아보기 어렵다.
영원히 불변하는 것은 없다. 선량한 백성의 70%가
일본 사람들의 총칼에 비참하게 죽어간 임진왜란 때
우리에게 준 고통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
오늘날 그 들이 행하고 있는 일련의 일들이
부끄러운 그들의
역사를 제대로 인식하고 있는지 묻고 싶다.
역사를 인식하지 않으면 그들의 미래는 없다.
이상 출처 -평상신씨산사공파-
조선인 70프로 희생설은 싱빙성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