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시 토성동 일대의 토성(소위 낙랑토성으로 추정)
아래 평면도를 주의 깊게 보시길.
고조선 말기 서토내지의 전국시대의 혼란과 멸망 속에서
요서일대의 유민들의 이주가 본격화 되었고 이런 가운데 위만이 고조선 준
왕을 몰아 내고 소위 위만 조선(BC198년~BC 108년)으로 정권교체가 될때
이미 고조선 내지의 북방지역은 철기시대의 본격적 도래와 맞물려 열국시대
로 분화되고 있든 양상임. 즉 삼국시대에 가장 큰 정치적,
문화적 영향력을 끼친 중축 세력이였던 북만주의 강자 부여부터(최소 기원
전 2세기부터 700여년을 이어온 왕조임) 동예, 옥저 및 남으로 내려간
고조선 준왕의 삼한등.
강점기때 잽은 거의 날림으로(오늘날 풍납토성도 하나 발굴해서 연구하고
정립하는데 10년 이상이 걸렸음) 저기 한번 훓어 볼까 뭐 이런식의 거의
도굴수준의 탐사가 많았는데(실제 이런식으로 해서 사진 몇장씩 찍고 대충
추정 포장하고는 우리 유물들을 대대적으로 열도로 유출)
서북한 일대에도 고작 70여기에 비해(이때 발굴한 토기등도 우리나 잽쪽에
지하창고에 쳐박혀 있다 해방 이후 50여년이 훌쩍 지나서 21세기 최근에 와
서야 신진 학자들에 의해 토기의 편년부터 특징에 대한 연구가 본격화 되기
시작. 한마디로 그 이전까지는 평양설 어쩌고 주장하는 인간들도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그냥 잽의 날림 소리를 금과옥조마냥 쳐했다는 사실
이죠) 북한은 3000천여기의 고분 발굴등 상당한 데이타를 축적해놓았습니
다.
무엇보다 한나라식 인위적 형태의 토성들은 그 외형상 쉽게 드러나기에
육안으로도 확인되는게 특징인데(한마디로 눈을 씻고 봐도 수백년 지배
운운 쳐하면서 한나라식 성곽하나 제대로 나온게 없는 해괴한 ㅋ)
진짜 코메디는 서북한 일대 즉 위만조선의 수도라는 평양일대의 왕검성 추
정 토성동 일대의 소위 낙랑토성을 설명하면서 마치
이게 이후 낙랑군의 행정치소마냥 강조하기 위해 한나라식 토성의 특징인
평지성에 장(정)방형 어쩌고 뻘소리를 국내에서도 어떤 인간들이
여전히 늘어 놓았다는 사실임.(이건 이미 이런 서북한 일대의 소위 낙랑 토
성내에 나오는 토기들의 연구를 통해 한사군 이전의 출토 토기양식부터(활
석혼입계 토기등) 토성 자체 역시도 한사군 이전 고조선 재지세력의 막쌓기
공법으로 확인되는 상황임)
저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초딩 사회시간에 등고선 기초 개념만 알아도 저기가 무
슨 평지에 그기에 성곽의 모양이 정방형(정사각형이나 직사각형 형태) 어쩌
고 잘 모른다고 일반인들에 구라 캐소리를 하는지 참.(우리식 자연 지세를
이용한 굴곡있는 토성임을 쉽게 확인 할 수 있겠죠.)
서북한 일대는 이런 토성 외에도 평남 온천군 성현리 토성, 황해도 은율군
운성리 토성(너비 8미터 깊이 1.4미터 해자), 신천군 청산리 토성(황해도 신
천군동서490미터 남북200미터 ), 봉산군 지탑리 토성- 낙랑군 토성과 비슷
한 크기로 대방군 치소로 추정 동서 700미터 남북600미터 -, 함남 금야군 소
라리 토성(함남 영흥군 동서290미터 남북 170미터) 등이 존재하는데
지탑리 토성(이 토성도 보면 알겠지만 한나라식 토성과는 전혀~~ 거리가 멈)
낙랑군의 치소로 생각되는 평양의 토성동 토성은 동서 700미터 남북 600미
터의 평산성에 장방형의 한나라식 토성도 전혀 아니고 구릉지대가 있기 때
문에 지도상으론 0.31km가 맞지만 원추형의 입체로 실제 가용면적은 0.1㎢
미만으로 최대치가 1500명 정도의 수용 공간에 이 토성도 이일대에선 최고
의 규모라는사실임.
누선장군은 제나라의 군사 7천여 명을 이끌고 먼저 왕검에 도착했다. 우거가 성을 지키고 있다가 누선의 군사가 적음을 염탐해 알아내고 즉시 성을 나와 누선을 공격하니 누선의 군사들이 패해 흩어져 달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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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태자를 파견해 한나라에 들어가 사죄하게 하고 말 5천필을 헌납하고 군량을 보내기로 했다. 만여 명의 사람들이 무기를 가지고 바야흐로 패수를 건너니 사자 및 좌장군은 그들이 변란을 일으킬까 의심해, 태자가 이미 항복했으니 마땅히 사람들에게 무기를 지니지 않도록 명하라고 말했다. 태자 역시 사자와 좌장군이 속여 자신을 죽일까 의심해 마침내 패수를 건너지 않고 다시 무리를 이끌고 되돌아갔다. 위산이 돌아가 황제에게 보고하니 황제가 위산을 죽였다.
윗기록을 보면 알겠지만 왕검성에 있던 위만조선은 누선의 7천명 규모가
군사가 적음을 알고 수성이 아닌 직접 공격해 버립니다. 그외 거짓 항복으로
말 5천필 어쩌고에 1만 어쩌고 하는 걸 보면 이 왕검성의 규모는 최소 1만명
내외에 이르는 군사력을 보유하고 그외 주변 백성까지 아우르면서 1여년을
한나라 수륙양공의(5만 7천명)의 거의 6만 대군과 맞쓸 수 있는 정도는 되어
야 한다는 말이죠.(그기에 수세적이지 않고 공세적이고 상당한 성과를
낼 정도로 철기로 무장한 군사력 보유) 그럼에도 이 서북한 일대는 이정도
규모의 중대형 성곽은 나오지 않고 있다는 말임.
다시 정리하자면서 서북한 일대를 무슨 한나라의 수백년 지배지 운운 쳐하
던 잽강점기의 캐소리와는 달리 한나라식 토성하나 나오지 않는 어처구니
없는 고고학적 상황하며 이걸 일시 점령 정도라고 생각해 볼 수 도 있지만
정작 사기의 위만조선 기록에 보이는 이정도의 중대형 성곽은 서북한일대에
발견되지도 않고 있다는 사실이죠.(이정도는 이후 삼국시대 고구려가 본격
적으로 서북한 일대에 성곽을 개발,축조하면서 나오는 상황임)
그기에 이 서북한 일대는 세형동검등 청동기 문화가 기원후 1세기까지도 여
전히 나오는 공간입니다.즉 발달한 철제무기로 한나라와 맞서든 그런 위만
조선의 특징과도 맞지 않는 지역임. 도리어 요서일대의 고조선 유민이나 전
국계 혼란을 틈타 이주한 영향력이 가미된 고조선 재지세력의 힘이 여전했
던 요하일대에서 북한 북부지역과 관련된 연화보 세죽리 철기문화권(연해주
두만강일대의 전국계 철기보다 더 우수한 철기문화의 영향이든)을 가진 발
해만 일대가 도리어 위만 조선이 차지하고 있든 공간일 가능성에 좀더 무게
를 두고 검토해봐야 할 부분이 아닌가 싶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