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수말갈은 고구려 백성>
광개토태왕 이후, 고구려는 250여년간 흑수말갈을 포함하여 동부 만주의 말갈족 전체를 지배하게 되었다.
그 결과, 말갈 병사들이 고구려가 멸망 하는 순간까지 고구려를 위해 싸웠던 기록들이 여러 정사(正史)에 나타난다.
삼국사기에는 말갈 병사들이 고구려를 위해 전쟁에 동원된 기록이 여섯 번 나타난다.
장수왕(長壽王, 413-491)이 만명의 말갈 병사들을 몸소 거느리고 468년에 신라의 주(州) 하나를 공격 해 빼앗았고; 문자명왕(文咨明王)이 507년에 고노(高老)장군과 말갈 병사들을 보내 백제를 공격했고; 영양왕(嬰陽王)이 598년에 직접 만명의 말갈 병사를 이끌고 요서를 공격했고; 보장왕(寶藏王)은 645년에 안시성의 포위를 풀기 위하여 고구려군과 함께 말갈 병사 15만명을 파견했다.
고구려군은 말갈군, 백제군과 함께 655년에 신라를 공격하였으며, 보장왕은 661년에 어느 장군에게 말갈 병사를 인솔하고 신라의 성을 공격하도록 했다고 기록이 되어있다.
금사(金史)에는 15만명의 흑수말갈 병사들이 645년의 안시성 전투에서 고구려를 위해 당태종의 군대와 싸웠다고 적혀있고, 구당서(舊唐書) 역시 15만의 말갈군이 안시성을 구하러 왔다고 분명하게 말하면서, 당태종이 사로잡은 말갈 병사 3,300명을 생매장했다는 기록을 하고 있다.
요동지역은 마침내 668년에 당나라의 지배아래 들어가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가 관할하게 되었다.
당 조정은 요동의 옛 고구려인들을 달래기 위해, 마지막 왕인 보장왕을 (677년에) 조선왕에 봉하였다.
그러나 보장왕이 말갈족과 함께 반란을 도모했기 때문에 귀양을 보냈다.
699년에는 보장왕의 아들 동무가 요동태수로 임명되었다.
그 후, 동무의 직계 후손들이 태수직위를 세습하면서 역사가들이 요동을 소고구려(小高句麗)라 부르게 되었다.
대조영이 말갈등 고구려 군사 수만명을 데리고
탈출하는 과정에서 천문령에서 당나라 대군을 격파하고
고구려 유민들은 말갈족과 함께 만주 땅에 발해(689-926)를 세웠다.
발해의 시조는 옛 고구려 장수인 대조영(大祚榮, 689-719)이다.
그는 고구려가 망하자 포로로 잡혀 영주(營州, 오늘날 朝陽)에 정착하게 되었으나, 거란족의 폭동이 발생하자 따르는 무리들을 이끌고 동쪽으로 가 진(震)을 건국하고, 713년에는 국호를 발해로 바꾸었다.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는 발해가 요동반도 남쪽 끝에 있는 비사성(卑沙城)을 점령해 남해부를 설치했다고 기록을 하고 있다.
요사(遼史)는 발해가 요동 지역의 신성(新城), 개모성(蓋牟城), 백암성(白巖城), 요동성, 안시성(安市城) 등뿐만이 아니라, 요서 지역에도 여러 곳에 주(州)를 설치한 것을 기록하고 있다.
발해왕은 796년에 야마토 왕국에 보낸 국서에서, 자기들이 이제 옛 고구려 영토를 모두 회복하였으며, 발해왕의 권위가 요하의 서쪽에까지 떨치고 있다고 말했다.
발해는 송화강, 우수리강 유역으로부터 동해안에 이르는 만주 전역을 점령하게 되었다.
신당서(新唐書) 열전(列傳)은, 발해의 중경(中京)은 현덕부(顯德府)이며, 현주(顯州), 철주(鐵州), 탕주(湯州)를 포함한 6개의 주(州)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거의 500여년간 지속된 고구려-말갈족의 연합국가는 직접적 상호작용과 언어적 동화 과정을 통해, 양측 언어에 어휘적-구문적 영향을 주지 않을 수 없었다.
부여-고구려-신라어에서 유래하는 한국어와 숙신-말갈-여진어에서 유래하는 만주어는 모두 모음회전과 조직적인 모음전이 현상이 나타나, 모음 역할의 성격이 재구성되었고, 모음조화에 새로운 형태가 나타나게 되었다.
발해(689-926)의 출현은 예맥 퉁구스와 말갈-여진 퉁구스가 다시 한번 연합을 해 만주전역을 지배한 왕국을 200년 이상 유지했음을 의미한다.
발해는, 고구려와는 달리 말갈-여진족이 주도적 역할을 했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결국 발해왕국의 말갈-여진족이라는 존재도 대부분 한때에는 고구려의 구성원이었었다. - 실제 고구려 이후 만주는 여전히 고구려 백성의 상당수가 살고 있었음
이러한 의미에서 Henthorn (1971: 54)이 “발해는 고구려가 용접을 해 놓은 기초 위에 세워진 나라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흑수 말갈의 세력도 말갈족 중에서 강성해서 고조선 한민족이라는 만주 한반도의 울타리에서 이후 그 지역의 독자적 힘을 키우고 있다 다시 고구려의 팽창으로 다시 복속 하나되고 이후 발해라는 국호에 의해 일시 자신의 지역으로 팽창되는 발해에 대한 저항이 있었지만 결국 발해의 영역에 한 주민으로 연계되었다고 볼수 있으며 문화적 전반에서도 큰틀에서 차이점을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이후 금나라 태동 이전의 920년 발해 멸망후 거란에 발해군을 지
휘했던 노상은 요군과 싸우다가 도망간 뒤 투항하여 동란국의 우대상이 되고,사도 대소현은 동란국의 좌차상이 된 것을 비롯하여 주요 발해 귀족에 의해 발해의 행정을 그대로 따르면서 이름만 동란국으로 바뀌게 된다.
이후 발해에 산재한 각 발해 세력들의 저항과 부흥의 여러 국가들이 일어나면서 거의 200여년 가까이 진행 되는데 서경압록부(西京鴨濫府)에서 일어난 대씨(大氏)의 후발해국(後渤海國, 926∼?)에서10여 년 만에 열씨(列氏)의 정권으로 바뀌면서 정안국(定安國)으로 1029년 발해 왕족 후손인(대조영의 7세손) 대연림(大延琳)이 흥요국(興遼國)에서 다시 1116년 고구려 왕족 후손 고영창(高永昌)이 대원국(大元國)에서 이후 마침내 금나라라는 만주의 발해의 여러 세력을 규합하면 인적 물적, 행정적 자원을 흡수하고 요나라로 쳐들어가 멸망시키게 된다.
발해는 거란 이후 동북지방의 주도세력이 된 여진과도 특수
관계를 맺고 있었다. 흑수말갈이 합류한 여진의 금나라는
당시 동북지구에서 최고 문명을 자랑하던 발해를 대거 포섭
해 끌어들였다. 금나라의 역대 황제 가운데 발해족을 생모
로 둔 황제는 해릉왕, 세종, 위소왕 등 3명에 이른다.
금사에서 신라나 고려의 친여성을 이야기하고 있는 부분이
단순히 사서 몇글자에서 나온 그냥의 말이 아니라는 뜻이며
문화적 측면에서도 금나라는 대고조선 연장성의 고구려, 고
구려의 연장성의 발해, 발해의 연장성에 있는 문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한러 고고학 발굴 내용들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