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아시아 최초의 정규노선 상용 전차임과 동시에,
아시아 최초로 일국의 수도에 전기를 이용한 전차가 달리게 된 사건입니다.
일본의 경우 교토에만, 그것도 정규 운행 전차가 아닌 시험전차만 가설한 상태로
그것조차도 도쿄에 건설하는 것은 망설이고 있던 시점이죠.
전차 승객이 많아지자 노선이 대폭 증가했습니다.
전차 이용률이 높아지면서 발전소도 증설됐죠.
전차의 운행시간은 저녁 6시 까지였고,
그 후에는 전기를 쓸 곳이 없었으므로 남는 전력을 이용하여
수도 한성 거리에까지 전등을 설치하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대한제국을 방문했던 유럽인들에게도
전기를 이용한 노면전차는 신기한 최첨단 문물이었습니다.
그때 당시 유럽의 주류는 아직도 석탄을 이용한 증기기관차 였으니까요.
세계 최초의 근대적 황립 첩보기관인 '제국익문사'는 두말하면 입만 아픈 이야기 이구요.
한성순보나 황성신문 등 언론매체의 경우에도, 굳이 설명안해도 잘 아실겁니다.
황실이 종잣돈을 대고 상인들이 공동출자하여 세운 근대적 은행인 대한천일은행도 있지요.
그리고 고종 광무황제가 김구선생을 살리기 위해 전화했다는 게 거짓말이라는 소리는,
그 소리가 오히려 거짓말 인 것이, 백범일지를 읽어보신 분이면 아실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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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시하였던 승지 중 한 사람이 각 죄수의 공건을 뒤적이며 보던 중
'국모보수' 넉자가 눈에 띄므로 이상하게 여기고,
이미 재가 수속을 끝낸 안건을 다시 임금께 보여드렸다.
그 내용을 보신 대군주께서는 즉시 어전회의를 여셨고,
의결한 결과 국제관계와 관련된 일이니
아직 생명이나 살리고 보자 하여 전화로 친칙하셨다 한다.
여하튼 대군주께서 친히 전화하신 것은 사실이었다.
백범일지 p. 12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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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년 8월(음력) 26일 인천 감옥소에 걸려 온 전화 한 통.
한성-제물포 간 행정전화 개통된 지 3일째 되던 날이었습니다.
바로 그 최초의 시외통화가 '김창수(김구)의 사형집행을 정지하라' 라고
고종 융희황제가 직접 전화를 거신 것이죠.
그날이 사형집행일이었으니, 그 전화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그날 민족지도자 김구 선생님을 잃었겠죠.
결국 사형집행이 정지 된 상태로 계속 감옥에 있던 김구선생은, 그 후 탈옥을 하게 되죠.
일본이 없었어도...
우리나라는 충분히 근대화를 하고 있었고,
근대화를 할 수 있는 힘과 역량이 있었습니다.
오히려, 기존의 한-미 혹은 한-유럽 합작사업들을 일본이 무단으로 가로채어
엉망으로 망쳐놓은 것들이 더 많습니다.
물론... 망국의 마지막 황제들이니 존경받을 위인들은 아닙니다.
하지만, 몇몇 키보드 워리어들의 심심풀이로 비난받을만큼
그들이 그렇게 무능했거나, 근대화나 독립의 의지가 약했던 것도 아닙니다.
그들 두 황제는,
백년 후에도 친일파의 힘 아래 있을 조국을 위해
죽는 날까지 근대화와 독립의 의지를 꺾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