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쟁거리가 뭐가 있을까요? 전혀 그런거 없을거 같은데...전체적인 윤곽은 이미 나왔죠.
일단, 왜라는 부족 국가가 있었고, 해양 무역이 발달한 백제가 4세기에 그 왜국과 교역을 하면서 많은 문물로 그들을 문명화 시켰고...형식적인 주종관계로 왜국을 아우르며 전략적으로 이용했죠.
나당 연합군에 공격 받아 나라가 위태롭자 왜국에 원병을 요청했지만, 이미 멸망후에 도착해서 전부 도륙 당해 별 도움이 안됐고...백제의 지배층 상당수는 당나라에 압송 당하지 않기 위해 왜국으로 피신했고...왜국은 그들을 극진히 대접하고 그들의 지식과 경륜으로 새 왕조의 기틀을 다졌죠.
일본에게 유리한 해석이란게 뭘까요? 설마 주종 관계가 역으로 설정하고 그런건가요? 그건 일말의 가치도 없는 논쟁이죠.
이두로 이 글을 다시 풀어보니 놀랍게도 이것은 고구려가 남침한 369년 당시 백제 땅이던 하동에서 후왕으로 있던 장수 집안이 동경까지 망명온 뒤 이곳에서 다시 백제 후왕으로 책봉된 내용을 담은 집안 이야기 였던 것이다.
이두로 풀이한 칼 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서기 471년에 “고” 확고는 조상이름을 적어 둔다. “오호 비꼬”어르신, 그 아들 “다가리 쪽니”어르신, 그 아들 “고리 확고”, 그 아들 “다사기 확고”. 그 아들 “바라 고비”, 그 아들 “가사 비리”, 그리고 그 아들은 “고 확고”이다. 오늘날까지 우리는 장수로서 대대로 섬긴바 그 임금님은 사기궁에 마실을 차리고 천하를 다스리시는 크신 확가 개로 대왕이시니라. 온 번 불리고 달구어 만든 이 칼에 우리 집안 내력과 뿌리를 적어두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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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이 이나리야마 쇠칼의 글은 5세기 가운데 즈음에 옛 일본의 관동, 관서, 규슈 등 세 곳에 백제가 다무로를 다스리고 있었으며, 왜 왕실은 백제 왕실에서 갈라져 나왔음을 밝혀주는 귀중한 역사자료인 것이다
흔히 백제하고 일본과의 관계만 생각하시는데 가야사가 정말 중요합니다. 정말 열도자체가 가야사람들이 개척한 땅이라는 소리가 틀린말이 아닙니다. 아니요 그냥 가야사람들이 개척했습니다.
한반도 도래인들이 열도에 상륙해서 기존 열도에 살던 조몬문화의 원주민들을 일본 변방으로 내쫒아버린건 펙트입니다.
그리고 백제 목협만치가 열도내에서 100여년간 정권을 휘어잡은 소가노 만치랑 동일인물이란건 이미 우리 학계에서 확실한 사실로 받아들이고있죠. 목협만치 = 소가노 만치 동일인물 맞습니다.
삼국사기에 문주왕조에 목협만치라는 이름이 등장하는데 그 후에 목협만치의 이름은 우리나라 사서 그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죠. 그런데 비슷한 시기에 열도에는 소가노 만치라는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죠.
목협만치가 어째서 열도로 건너갔는지는 확실한 이유가 없지만 한반도 내에 파워게임에서 밀려 이주했다고 보는게 맞는것 같습니다.
그리고 유명한 칠지도 같은 경우에는 한일 사학자에 따라 풀이하는게 좀 다르다고 하지만 기본적으로 한일 사학자들끼리 뜻이 맞는 부분은 " 제후국의 왕 " " 후세에 전하여 보이거라 " " 후왕=왜왕 " 이 부분입니다.
인물화상경 같은 경우에도
癸未年八月日十大王年男弟王在意柴沙加宮時斯麻念長寿遣開中費直穢人今州利二人等取白上同二百旱作此竟
" 계미년(503년) 8월 10일 대왕의 연간에 남동생인 왕을 위하여 오시사카궁(忍坂宮)에 있을 때 사마(무령왕)께서 아우님의 장수를 염원하여 보내주는 것이다. 개중비직과 예인 금주리 등 두 사람을 보내어 최고급 구리쇠 200한으로 이 거울을 만들었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