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2년 음력 7월8일
한산도 대첩
그간 조선수군과의 해전에서 연패를 거듭하며
초조해져 있던 왜군은
육군과 연계하여 작전 중이던 와키자카 야스하루를 다시
수군으로 배속시키고,
이어서 왜 수군의 명장으로 불리던 구키 요시타카의 부대 역시 부산포로 급파한다
이에 위협을 느낀 조선수군 역시
음력 7월6일 전라좌우수군, 경상우수군의 연합함대 55척이
노량에 집결하였다
![http://image.fmkorea.com/files/attach/new/20171110/486263/789752372/832279712/187cdb8b536cdfc4dc33659b2c2638da.JPG](http://image.fmkorea.com/files/attach/new/20171110/486263/789752372/832279712/187cdb8b536cdfc4dc33659b2c2638da.JPG)
음력 7월7일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약 한 달 전 용인에서의 전투에서
자신감이 가득 찬 상태였다
와키자카는 구키 요시타카와 상의도 없이 단독으로 자신의 함대를
출동시켰다
비록 단독 함대였지만 그 수가 73척에 달하는
대함대였다
그날 저녁
견내량에 왜선 70여척이 있다는 보고를 받은 이순신은
함대를 진격시킨다
그동안의 해전처럼 포구에 정박해 있는 적을 공격하기엔
견내량은 협소한데다 암초가 많고 조류도 빨라
덩치가 큰 판옥선이 싸우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곳이었다
따라서 조선군은 유인책을 실시했다
5~6척으로 구성된 미끼함대는 슬슬 왜군을 자극했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유인을 의심해볼만 했지만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용인전투를 통해
조선군은 군대가 아니라는 생각이 가득해 있었으며
즉시 전함대를 동원해 유인함대를 추격했다
![http://image.fmkorea.com/files/attach/new/20171110/486263/789752372/832279712/858fcfcbaa556e078e23bd5c87dec519.JPG](http://image.fmkorea.com/files/attach/new/20171110/486263/789752372/832279712/858fcfcbaa556e078e23bd5c87dec519.JPG)
음력 7월8일
유인 함대는 본대가 매복해있는 한산도 해협에
도착하자 함대를 반전시켰다
동시에 한산도 양 옆 섬에 배치시켰던 조선 본대가 나타나
3개의 부대로 그 유명한 학인진을 펼쳤다
마침 조류가 바뀌어 조선수군이 왜군을 압박하며
포격전을 펼치자
와키자카의 함대와 병력은
마치 업진살과 같이 살살 녹았다
와키자카는 급히 속도가 빠른 관선으로 갈아타
김해로 도주했으며
이 전투로 왜군은 73척 중 47척의 전선을 잃고
7000의 병력 중 겨우 1~200의 패잔병만이
겨우 목숨을 부지해 인근 섬으로 도망갔다
이들은 한동안 섬에서 해초로 연명하다 겨우 뗏목으로 탈출하였다
이에 비해 조선군은 3명의 전사자를 내는데 불과했다
이 전투와 며칠 후,
와키자카의 단독 출격을 알아차리고 급히 출동한
구키 요시타카의 함대 역시 큰 타격을 입으며 왜 수군의 활동은 급격히 얼어붙는다
이 전투는 결국 왜군이 끝끝내 전쟁에서 패전하는 것에
결정을 내리는 전투나 다름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