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7대 왜(일본)왕 무(倭王武=유우라크 덴노·雄略天皇)가 송나라 순제(順帝)에게 보내는 표문:
고구려가 국경지대에 침입해 혼란을 일으켜서 송나라에 조공(朝貢)하는 것을 막음으로 뜻대로 조공을 못합니다. 신의 선친이 고구려가 송에 조공하는 것을
막는 것을 통분(痛忿)해 100만 대병을 일으켜서 고구려에 저항하고 져
하다가 사망했습니다. 송제(宋帝)께옵서 강대한 고구려를 격퇴해 방난(方難)을 평정해 주심을 바랍니다
***고구려가 일본을 침략해 왕도 죽이고 대승을 거둔걸 알수있습니다. 이때가 고구려가 일본한테 명령하는 "교한다"는 칙서를 보내자 일본이 이거에 분개해 찟어버리고 그거에 또 빡친 고구려가 공격한걸로 압니다. 애초에 백제 똘마니 짓도 짜증났을것이고
2. 신라의 일본 침공:
일본 덕천막부 초기에 쓰여진 "이창일본傳"
"진 원강 원년 신라병이 일본을 공격하매[여], 깊이 명석포에 들어왔다." - 元康원년은 서력 291년, 신라 유례왕 8년, 일본 응신 22년
일본사 연대기
응신천황이 신라의 유례왕 때를
당하여, 신라 군사가 명석포에 와서 흰 말을 죽여 맹서를 받아 갔다
신라가 토벌하여 온 일이 두어 번이 있었다
해사록 (김세렴)
일본은 극동에 멀리 떨어져 있고 사면이 큰 바다로 둘려 있어, 외국의 군하가 들어갈 수가 없다. 단지 그 연대기를 보면, 왜황 응신 22년에 신라 군사가 명석포에 들어왔다고 되어있는데, 명석포는 대판에서 겨우 1백리 떨어져 있다. 적간관의 동쪽에 한 구롱이 있는데, 왜인이 이를 가리켜 ‘이것이 백마분인데, 신라 군사가 일본에 깊이 쳐들어오니, 일본이 화친하고 군사를 풀어 주기를 청하여
백마를 죽여서 맹세한 뒤에 말을 이곳에다 묻었다’
***이 외에도 여러개 기록이 있는데 통일 이전 신라가 일본에 쳐들어가 오사카까지 진군해 항복시켰단 기록이 있습니다. 한국의 대승
3. 고려의 침략
백련초"초우 토쿠 3년 1월 1일의 나가사키의 역사
이 때 고려인들은 큐슈에 와서 민가를 태우고 재산을 수탈하고 남녀 300명을 납치해갔다
(백련초의 토쿠3년(997년) 10월 1일조)
그 이전부터 침입한 고려국인이 큐슈에 침입해 살인을 일삼고 있다
(백련초 토쿠3년(1001년)기록)
규슈 지역에서 고려국인의 그 지역에서 일본인을 살해하였다,
피해규모가 치쿠젠, 치쿠고, 사츠마, 이키, 쓰시마에 이르며 수백명의 사람들이 납치 당하고 죽었다
***요나라 격파이후 최대 전성기를 구사하던 고려가 무역을 개방해주지 않는 일본을 쳐들어간 기록입니다. 다만 한국측 기록은 500척 병선으로 겁을줘 강제 개방만 시켰다 하고 일본측 기록은 아예 고려가 실제로 침공을 했다 논란이 있는것으로 아뢰오...하여간 한국승
4. 고려가 선두에 선 여몽연합군 침략
高麗国王請、自造船百五十艘、助征日本 -元史-
고려왕이 자국군선
150척으로 일본을 원정하길 돕겠다고 청하다
충렬왕의 편지
惟彼日本 未蒙聖化。 故發詔使 繼糴軍容 戰艦兵糧 方在所須。儻以此事委臣 庶幾勉盡心力 小助王師 -『高麗史』-
일본은 아직 성화를 입지 않았다.일본을
정벌하는걸 臣에게 맡겨주시면 전력을 다하겠다’
- 고려사
***실제로 고려군이 2차 침입땐 몽골군보다 군사수에서도 3배나 많았고 일본한테 신나게 줘터지던 (...) 몽골군을 구조 까지 해주는등 여몽연합군의 주역은 엄연한 고려군이였습니다. 몽고가 국토나 당시 국력에서 더 강해서 사람들이 몽고의 침입으로만 아는데 엄연한 여몽연합군입니다. 일본 남부에 가면 아직도 우는 아이들한테 "울음 안그치면 고려군, 몽골군이 잡으러 간다!" 하면서 "무쿠리 고쿠리"라고 하죠. 몽골군만 활약했음 고쿠리가 더해질리가 없습니다. 또한 몽골의 사령관 홀돈은 고려군이 일본군을 작살내는걸 보고 "몽골인이 싸움에
익숙하다 하지만 고려군에 비할바가 아니로다" 라고 까지 하죠
5. 고려의 대마도 정벌
창왕시절 박위 장군이 짜증나는 왜구들을 섬멸하러 명을 받고 대마도를 침공하였습니다. 100척을 이끌고 가서 일본배 300척을 신나게 불살라준후 귀가
6. 조선 태조의 대마도 정벌
1396년(조선 태조 5년) 음력 12월 문하우정승(門下右政丞) 김사형(金士衡)이 오도 병마처치사(五道兵馬處置使)가 되어 쓰시마 섬을 정벌하였다.
7. 조선 세종의 대마도 정벌
이종무 장군이 이끄는 1만 이상의 병령이 대마도를 정벌했죠. 하도 유명해서 설명은 패스.
자 그럼 이제 일본의 침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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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백강 전투
이건 사실 애매한게 일본이 사실 자신들을 위해서라기 보단 백제를 위해 목숨 다바쳐 출명한거라...게다가 이땐 독립 국가라기 보단 미국이 영국 식민지였을때 같은 시절이라...걍 백제 가야 이민촌...그래서 넣지 않았습니다. 물론, 넣어도 일본이 전적에서 2배 밀립니다
2. 일본의 신라 침공
사건의 전황은...
-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제대로 된 교류가 끊긴 통일신라와 일본.
『삼국사기』를 보면, 일본은 통일 신라의 실정을 파악하기 위해 서기 698년, 사신을 파견한다.
효소왕(孝昭王) 7년,
3월에 일본국 사신이 이르렀으므로, 왕이 숭례전(崇禮殿)에 불러 접견하였다. (三月, 日本國使至, 王引見於崇禮殿.)
- 방문 이후, 통일신라의 선진문화와 발전상에 경악한 일본은 이를 배우기 위하여 서기 703년 대규모 사절단 파견을 결심-실행에 옮기는데...
성덕왕(聖德王) 2년,
일본국 사신이 이르렀는데, 모두 204명이었다. (日本國使至, 摠二百四人)
- 그러나… 통일신라의 수준을 견신라사(遣新羅使) 파견만으로 따라잡기에는 너무나 선진적임을 깨달은 일본. 결국 서기 731년 신라 침공을 통해 강제로 뺏으려고 하는데...
성덕왕(聖德王) 30년,
일본국 병선 300척이 바다를 건너 우리의 동쪽 변경을 습격하였는데, 왕이 장수를 시켜 군사를 내어 이를 크게 깨뜨렸다. (日本國兵船三百?, 越海襲我東邊, 王命將出兵, 大破之.)
- 제대로 상륙도 하지 못하고 박살난 일본, 결국 용서를 빌기 위해 서기 742년에 사신을 파견하지만‥
경덕왕(景德王) 원년,
겨울 10월에 일본국(日本國) 사신이 이르렀으나 받아 들이지 않았다. (元年冬十月, 日本國使至, 不納. )
- 완전히 무시당한 일본, 그러나 자존심은 있어서 허세를 부리면서 다시 사과하려고 하지만..
경덕왕(景德王) 12년,
가을 8월에 일본국 사신이 이르렀는데, 오만하고 예의가 없었으므로 왕이 그들을 접견하지 않자 마침내 돌아갔다. (十二年秋八月, 日本國使至, 慢而無禮, 王不見之, 乃廻.)
- 재차 무시당한 불쌍한 일본. 결국 서기 804년, 통일신라의 속국이 되기로 결심, 조공을 바친다.
애장왕(哀莊王)
5년 여름 5월에 일본국이 사신을 보내와 황금 300량을 바쳤다. (五年夏五月, 日本國遣使, 進黃金三百兩.)
- 이를 기특하게 여긴 통일신라는 드디어 일본을 용서하고 속국으로서 인정한다. 서기 806년 속국에게 하교하는 신라.
애장왕(哀莊王) 7년,
봄 3월에 일본국 사신이 왔으므로 조원전(朝元殿)에 불러 접견하였다. 교서를 내려 말하였다. 『절을 새로 짓는 것을 금하되, 다만 수리하는 것은 허락한다. 또 수놓은 비단을 불교 행사에 사용하는 것과 금과 은으로 만든 그릇의 사용을 금한다. 마땅히 담당 관청으로 하여금 이를 널리 알려 시행하도록 하라.』(七年春三月, 日本國使至, 引見朝元殿. 下敎禁新創佛寺, 唯許修葺. 又禁以錦繡爲佛事, 金銀爲器用, 宜令所司, 普告施行.)
- 사찰을 수리하는 것조차 '종주국' 신라의 허락이 없으면 감히 하지 못했던 일본. 이후 '속국' 일본에 대한 종주국 신라의 사랑은 계속되고… 신라의 어버이와 같은 사랑에 감동한 일본은 서기 882년, 보답한다.
헌강왕(憲康王) 8년,
여름 4월에 일본국 왕이 사신을 보내 황금 300량과 야광주[明珠] 10개를 바쳤다. (八年夏四月, 日本國王遣使, 進黃金三百兩·明珠一十箇.)
***즉 일본이 침공은 했는데 신라한테 깨지고 오히려 조공국으로 전락해버린 웃픈 상황. 걍 한국의 닥치고 승리.
3. 임진왜란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한국이 어려웠지만 어쨋든 승리 (돌아가신 조상님들 한텐 죄송하지만 한국 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하고 낭만적이였던 전쟁. 휴, 하얗게 불태웠어...)
4. 일제
이건 애석하게도 우리가 일본한테 거의 유일하게 진 전쟁이네요. 다만 전투는 없었지만 (...친일파 쉐리들...). 고종황제와 흥선대원군,열심히 주어진 능력과 한계속에서 열심히 하셨지만...뜻대로 되지는 않았습니다. 뭐 근데 당시 아시아 상황을 보면 동남아 out 중국은 영토가 반이 서양한테 out 인도 out 몽골 out 오스만 help me!! 이란 help me!! 태국은 프랑스 영국한테 땅 때주고 겨우 독립 유지하던 막장 상황이였던지라...청나라는 서토 국가 전반적 배터리 수명인 200-250년 한계에 다 다랐었고 조선 또한 한국 국가 평균 배터리 수명인 400-700년 수명에 다 다랐을때라 어차피 무너졌었을겁니다. 그래도 망국 직전 대한제국이 OECD 기록에 따르면 아시아 3위, 세계 27위의 국민소득을 유지한걸 보면 대단한듯합니다. 정조때 조선의 국민소득은 오히려 대영제국보다도 높았다네요. 이건 옥스퍼드 자료이고 mymiky님이 예전에 자료 링크도 어느 글에 올리셔서 잀었습니다
하여간 역대 일본과 한국의 전쟁 전적입니다. 반론? Welcome! 왜냐면 제 글에 오류가 있을수도 있으니 알려주시면 감사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