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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3-05-20 10:04
[일본] [일본 심한왜곡] 칭기즈칸(Chinggis Khan)이 일본인(日本人)이라는 주장은 과연 사실일까요[펌]
 글쓴이 : doysglmetp
조회 : 4,118  

 
 
▶ 일본이 세계 문화의 중심 국가라는 허장성세(虛張聲勢), 일본인들이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민족이라는 과대망상(誇大妄想), 그리고 이 허장성세와 과대망상을 정당화시키기 위한 일본 국수주의자들의 역사왜곡(歷史歪曲)과 역사날조(歷史捏造)의 정신 병력을 캔다!
 
⑴ 칭기즈칸이 일본의 무장 미나모토 요시츠네[源義經]라고?
 
1995년 12월 미국의 세계적인 신문 ‘워싱턴포스트’지는 ‘세계 인류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업적을 남긴 지도자’로 몽골[蒙古] 제국의 국조(國祖) 칭기즈칸[成吉思汗]을 선정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역사상 유명한 인물들인 나폴레옹이나 알렉산더 대왕을 제치고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칭기즈칸이 점령한 정복지는 동쪽으로는 아시아의 끝인 한반도에서부터 서쪽으로는 유럽의 폴란드, 헝가리까지 아시아와 유럽에 걸친, 면적으로 따지면 777만 평방 킬로미터에 달했다. ‘세계 최고의 정복왕(征服王)’이라는 타이틀은 당연히 칭기즈칸의 몫이다.
 
물론 단순히 칭기즈칸이 ‘땅 따먹기’를 잘 했다고 해서 워싱턴포스트지가 그런 선정을 한 것은 아닐 것이다. 칭기즈칸이 동양과 서양을 지리적으로 연결시킴으로써 나침반, 화약, 인쇄술 등의 유럽 전래로 동서문화의 교류를 촉진시켜, 오늘날의 세계화의 선구자가 되었다는 점에서 평가받아 마땅하다고 본다.
 
칭기즈칸의 군대는 당시 유럽을 침략하면서 무자비한 살육으로 유럽 사람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고, 또 그들이 가져온 흑사병으로 유럽 인구의 3분의 1이 병사하여, 황인종에 대한 공포심이 유럽 사람들의 잠재의식이나 유전자에까지 깊이 각인되었다. 이후 이것이 서양인의 동양인에 대한 거부감의 발로인 ‘황화론(黃禍論)’의 원천적 요인이 되었고, 문자를 가지지 못한 몽고족(蒙古族)의 원초적 한계로 자신의 역사를 제대로 기록, 후세에 자기행위의 정당성을 주장하지 못함으로써 오늘날가지 부정적인 이미지로 인식되고 있음은 아쉬운 일이다.
 
어쨌거나 일본에는 이러한 세계 역사상 최고의 제왕인 칭기즈칸이 원래는 일본인이었다는 충격적인 주장이 있다. 일본의 가마쿠라시대[鎌倉時代] 초기의 무장(武將) 미나모토 요시츠네[源義經]가 중원 대륙으로 건너가 몽골의 모든 부족을 복속시키고 칭기즈칸이 되었다는 것이다.
 
미나모토 요시츠네는 오늘날도 일본인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일본 역사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실제로 1999년 일본의 ‘아사히 신문’에서 밀레니엄 기획 특집으로 서기 1000년에서 1999년까지 일본 역사에 등장한 인물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정치 지도자’를 묻는 설문 조사결과 미나모토 요시츠네가 상위에 랭크되었었다.
 
그러므로 미나모토 요시츠네는 영화나 TV드라마, 소설의 단골 메뉴다. 일본 NHK에서도 대하 역사드라마 ‘요시츠네’를 제작, 방영했는데 인기가수 다키자와 히데아키[瀧澤秀明]를 주인공인 요시츠네 역에 캐스팅하는 등 호화 배역진으로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다.
 
⑵ 역사 속에서의 칭기즈칸
 
칭기즈칸(Chinggis Khan)은 몽골 제국의 초대 칸[汗]으로 몽골의 여러 부족을 통합한 후 아시아와 동유럽의 대부분을 정복하였다.
 
몽골인들의 조상신화와 건국과정을 몽골어로 기록한 가장 오래된 사료인 원조비사(元朝秘史)에 의하면, 푸른 늑대와 하얀 암사슴 부부가 바타치칸이란 아들을 낳으며 시작된다. 바타치칸의 11대손인 도분 메르겐의 처 알란 고아가 과부가 된 후, 빛을 받아 임신하여 낳은 아들 삼형제 중 막내가 보톤차르 몽칵이다. 이 보톤차르 몽칵의 12대 후손이 테무진(Temüjin)이다.
 
테무진의 출생년도에 대해서는 1155년, 1162년과 1167년 등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몽골에서는 보통 1162년설을 취한다. 테무진의 부친인 에스게이 바아투르는 보르지긴 씨족(氏族)의 일원으로 캬토 종족의 족장이었으나 테무진이 어렸을 때 타타르 종족에게 독살당했으며, 어머니인 호에룬 이케 혼자서 테무진 5남매를 키웠다.
 
테무진의 부인인 부르테가 메르키트 종족에게 납치당하자 테무진은 양아버지인 토오릴 옹칸과 의형제인 자무카의 도움으로 메르키트 종족을 물리치고 부르테를 되찾았다. 메르키트 종족에 대한 승리로 용명을 떨친 테무진은 여러 부족의 추대로 ‘칸’이 되었으며, 이후 ‘칭기즈칸’으로 부르게 되었다. 그러나 칭기즈칸의 세력이 커지게 되자 의형제를 맺은 자무카와 사이가 점점 벌어져 서로 전투도 하게 되고, 칭기즈칸이 지는 일도 있었다.
 
그 무렵 동쪽의 금(金) 제국은 타타르 종족의 거듭되는 침략으로 골치가 아파, 몽골의 여러 부족에게 타타르를 협격하기를 요청하였다. 칭기즈칸으로서는 타타르는 부친을 죽인 원수이므로 당연히 이에 참가하였고, 토오릴 옹칸은 이때 금나라의 조정으로부터 왕(王)의 칭호를 하사받아 이후 구르칸으로 불리게 된다. 그 후 타타르를 전멸시켜 많은 인력과 재물을 획득한 칭기즈칸 세력은 구르칸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급격히 커졌다.
 
칭기즈칸의 성장으로 위기감을 느낀 구르칸이 공격을 해왔으니 칭기즈칸은 기습작전으로 격파하고, 1203년 케레이트마저 흡수하였다. 이어서 서쪽의 나이만도 격파하여 전 몽골을 통일한다. 몽골 고원을 통일한 칭기즈칸은 1206년 오난 강변에서 쿠릴타이를 열어 몽골 제국의 건국을 선포하였다.
 
칭기즈칸은 10진법에 기초한 새로운 군대 시스템을 개발했다. 부대를 열명, 백명, 천명, 만명 단위로 묶고, 각 부대는 가족과 말을 동반해서 이동하며, 한 사람의 기마병에 대해 서너 필의 말이 있어 항상 튼튼한 말을 이동수단으로 이용할 수 있는 태세를 갖추었다.
 
1210년 서하(西夏) 정복을 시작으로 서위구르 복속, 만리장성을 남하하여 황하 사이에서 금나라 군사들을 격퇴하여 화북 지역을 휘저으며 많은 도시를 공략했다. 이어서 서요(西遼)를 정복한 후 1218년까지 몽골 제국은 서쪽으로는 발하시호까지 영토를 넓히고, 남쪽으로는 이슬람 계열의 호라즘(Khorazm) 왕국과 국경을 접하게 되었다.
 
1218년 칭기즈칸이 호라즘 왕국에 통상사절을 파견했으나 동부국경선인 오트랄(Otral)의 통치자가 그들을 학살했다. 칭기즈칸은 보복을 위해 20만 대군을 이끌고 원정을 시작, 오트랄과 부하라(Bokhara), 사마르칸드(Samarkand)를 차례로 점령하고 1225년에 몽골로 귀환했다.
 
서정(西征)에서 돌아온 칭기즈칸은 광대한 영토를 분할하여 장남 쥬치에게는 남서 시베리아로부터 남러시아 지역을, 차남인 챠가타이에게는 중앙아시아의 옛 서하 지역을, 삼남 오고타이에게는 서몽골을 주고, 막내인 톨루이에게는 현재는 아무 것도 주어지지 않지만 말자상속(末子相續) 관습에 따라 칭기즈칸 사후에 본거지인 몽골 고원을 물려주게 된다.
 
1226년 칭기즈칸은 호라즘 왕국 원정시 증원군 파견을 거부하고 금나라와 반(反)몽골동맹을 맺은 서하를 정벌하기 위하여 다시 원정길에 나섰다가 1227년에 병사하고 말았다.
 
칭기즈칸의 장례시 병사들이 유해를 운반하는 모습을 본 모든 사람들을 죽였기 때문에 칭기즈칸의 유해가 어디에 묻혔는지는 지금까지 아무도 모른다. 현재 칭기즈칸의 능으로 알려져 있어 관광 코스로 되어 있는 곳은 단순히 칭기즈칸의 기념묘(記念廟)일뿐 실제 칭기즈칸의 유해가 누워있는 곳은 아니다.
 
⑶ 역사 속의 미나모토 요시츠네
 
미나모토 요시츠네[源義經]는 1159년 미나모토 요시토모[源義朝]의 아홉번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릴 때의 이름은 우시와카마루[牛若丸]라고 한다. 당시는 겐지[源氏]와 헤이지[平氏]가 천하의 패권을 다투는 시기였다. 요시츠네의 아버지 요시모토는 ‘헤이지[平治]의 변란(變亂)’ 때 다이라 기요모리[平淸盛]에게 패배하고 피살되었으며 다이라 가문이 권력을 잡게 된다. 이로써 겐지 세력은 몰락하였고, 요시츠네와 형 미나모토 요리토모[源賴朝]에게 살해당할 처지였으나 다이라노 기요모리[平淸盛]의 양모(養母) 이케노 젠니[池禪尼]의 설득으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요시츠네는 7세 때부터 승려가 되기 위해 구라마데라[鞍馬寺]에서 수행을 시작했고 법명(法名)도 차나왕(遮那王)으로 지었다. 11세 때 자신의 과거를 알게 된 요시츠네는 승려의 길을 포기하고 다이라 가문에 복수하기 위하여 몰래 수련을 쌓는다. 민간전승으로는 이때 요시츠네가 구라마산[鞍馬山]의 텐구[天狗]로부터 여러 가지 비술을 전수받았다고 한다.
 
16세가 된 요시츠네는 구라마데라를 탈출하여 오래 전부터 겐지 세력과 친밀한 일본 북부의 막강한 독립적 영주인 후지와라 히데히라[藤原秀衡]에게 몸을 의탁한다.
 
마침내 1180년 다이라 가문을 쓰러뜨리기 위하여 거병한 이복 형 요리토모를 찾아가 눈물의 상봉을 한다. 이후 요시츠네는 겐페이전란[源平戰亂]에서 무서운 용맹과 탁월한 전략을 구사하며 1184년 이치노타니전투[一之谷戰鬪], 1185년 야시마전투[屋島戰鬪], 그리고 마침내 단노우라전투[壇之浦戰鬪]를 승리로 이끌어 다이라 일족을 멸망시켰다.
 
그러나 연전연승(連戰連勝)하는 요시츠네와 이를 시기하고 질투하는 가지와라 가게토키[梶原景時] 등 요리토모 측근들의 간언으로 형제간의 사이가 벌어진다. 요시츠네는 형에게 다른 마음을 품고 있지 않다는 뜻을 적은 기청문(起請文)을 요리토모에게 보냈으나 소용이 없었다. 결국 요리토모는 요시츠네를 죽이기 위하여 암살단을 파견하기도 하고, 전국에 체포령을 내리기도 한다.
 
요시츠네가 나라현[奈良縣]의 요시노[吉野], 도츠가와[十津川] 부근에서 도망을 다니던 중 일본 역사상 최고의 미녀로 꼽히는 애첩 시즈카고젠[靜御前]이 사로잡혀 요리토모가 있는 가마쿠라로 호송된다. 이때 그녀는 요시츠네의 아이를 임신중이었는데, 나중에 아들을 낳자 그 아들은 바로 살해되었다.
 
요시츠네는 우여곡절 끝에 1187년 2월 다시 후지와라 히데히라가 있는 히라이즈미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믿었던 히데히라는 그 해 2월 요시츠네를 끝까지 잘 보좌하라는 유언을 아들들에게 남기고 병사하였다. 차남 후지와라 야스히라[藤原泰衡]가 오슈[奧州] 영주의 자리를 물려받았다.
 
한편 요시츠네가 오슈에 있는 것을 알게 된 요리토모는 야스히라에게 요시츠네를 죽이라는 명령과 협박을 수차례 내리게 되고, 야스히라는 어쩔 수 없이 1189년 윤(閏) 4월 30일 고로모가와[依川]의 요시츠네 거소를 수백명의 병사로 공격하였다. 도저히 희망이 없다고 생각한 요시츠네는 먼저 처와 네살 난 딸을 죽인 후 건물에 불을 지르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린다. 이때 요시츠네의 나이 겨우 31세였다.
 
야스히라는 요시츠네의 목을 베어 술통에 담아 가마쿠라의 요리토모에게 보냈고, 요리토모의 측근인 와다 요시모리[和田義盛]와 가지와라 가게토키가 검시하였다. 그러나 요리토모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스스로 오슈 정벌군을 이끌고 출병해 야스히라를 치니, 오슈의 후지와라 가문은 4대만에 멸망하고 말았다.
 
이상이 가마쿠라 막부[鎌倉幕府]의 공식 기록인『아즈마노가가미(吾妻鏡)』또는 작자 미상의『기케이키(義經記)』에 기록된 미나모토 요시츠네의 생애다.
 
⑷ ‘칭기즈칸[成吉思汗]=미나모토 요시츠네[源義經]’설(說)의 첫번째 근거 →「요시츠네의 생존설(生存說)」
 
이처럼 역사적으로 히라이즈미의 고로모가와에서 죽은 것으로 되어 있는 미나모토 요시츠네가 사실은 죽지 않고 살아서 북쪽으로 도피했다는 주장이 오래 전부터 있어 왔다. 그러한 주장의 근거는 다음과 같다.
 
요시츠네의 사망 소식이 가마쿠라의 요리토모에게 전달된 기간이 너무 길었다는 점이다. 요시츠네가 죽은 날이 윤 4월 30일인데 가마쿠라의 요리토모에게 그 소식이 전달된 것은 5월 22일로 22일이나 걸린 셈이다.
 
당시 왜국 조정의 섭정(攝政)인 구죠 가네자네[九条兼実]가 쓴 일기 ‘교쿠요[玉葉]’를 보면, 교토에서는 5월 29일에 요시츠네의 사망 소식을 알았으므로 가마쿠라와 교토간은 1주일 이내로 충분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가마쿠라와 교토간의 거리는 450킬로미터 정도로 가마쿠라와 히라이즈미간의 500킬로미터와 비슷하다.
 
그러므로 요리토모로부터 요시츠네의 처리를 채근받고 있는 야스히라로서는 한시라도 빨리 요시츠네의 사망 소식을 가마쿠라에 보고해 요리토모의 신임을 회복해야 할 터인데, 히라이즈미로부터 가마쿠라까지 500킬로미터의 거리를 히캬쿠[飛脚]가 20일 이상 걸렸다는 것은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요시츠네의 수급(首級)이 가마쿠라에 도착한 것은 6월 13일로 43일이나 걸려 하루 평균 12킬로미터도 이동하지 못한 셈이다.
 
이러한 계절에 설령 술통에 담갔다고는 하나 사람의 잘린 수급(首級), 더구나 불탄 자리에서 나온 수급이 부패하지 않고 온전히 본래의 모습을 유지했을 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요시츠네의 수급의 도착이 늦어진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라 사전에 계획된 것으로,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요리토모의 오슈 정벌군은 가마쿠라를 7월 19일 출발해서 히라이즈미에 8월 22일 도착하였다. 가는 도중에 전투도 벌여가면서 대군을 이끌고 진군하는 데도 33일밖에 안걸렸는데, ‘요시츠네의 수급(首級)’ 하나 운반하는데 43일씩이나 걸린 것은 분명히 숨겨진 의도가 있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가마쿠라에 보내진 ‘요시츠네의 수급’이 가짜라는 주장이 나오게 된다 당시 요시츠네의 수급을 직접 검시한 요시츠네의 정적 가지와라 가게토키도 요시츠네의 수급이 아니라고 의심했으나 함께 검시한 와다 요시모리가 적당히 넘겨 가나가와현[]의 후지사와[藤澤]에 매장됐다고『요시츠네훈공기[義經勳功記]』는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잘려진 목의 진짜 주인은 누구란 말인가? 보통 오슈의 스기츠마[杉妻] 성주인 스기메타로 유키노부[杉目太郞行信]가 요시츠네의 가게무샤[影武者]라는 주장이 있다. 이와테현[岩手縣] 출신 학자 다카하시 시세키[高橋子績]가 1765년에 펴낸『오슈 남부 봉역지[奧州南部封域志]』나『북문고사(北門古史)』에는 요시츠네와 용모나 안색이 똑같은 유키노부가 주군인 요시츠네의 명령에 따라 충의를 발휘하여 죽기로 했다고 적혀 있다.
 
이밖에도 요시츠네와 동명이인(同名二人)이 두 세 명 더 있어 요시츠네의 ‘가게무샤’ 후보자는 충분하다고 한다.
 
그리고 에도시대[江戶時代] 초기의 미토[水戶] 번주(藩主)인 도쿠가와 미츠쿠니[德川光圓]가 편찬한『대일본사(大日本史)』에서도 ‘요시츠네의 수급’의 진위에 의문을 표하며 생존가능성을 언급하였으며, 에도 시대 중기의 유학자이자 정치인인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도 이 설(說)을 지지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의심스러운 정황 때문에 요시츠네가 고로모가와에서 죽은 것이 아니고, 살아서 북쪽으로 올라가 츠가루[津輕]해협을 건너 훗카이도 방면으로 도망쳤다는 ‘요시츠네의 북행전설(北行傳說)’이 태어났다.
 
⑸ ‘칭기즈칸[成吉思汗]=미나모토 요시츠네[源義經]’설(說)의 두번째 근거 →「요시츠네의 북행설(北行說)」  
 
이처럼 고로모가와에서의 요시츠네의 죽음에 대해서는 오래 전부터 이를 부정하는 ‘요시츠네 생존설’이 있으며, 특히 동북지방의 이와테[岩手], 아오모리[靑森]에는 요시츠네 관련 전설 및 유적, 유물이 많이 있다.
 
그 중 하나가 가메이 문서[龜井文書]라는 것이다. 분지[文治] 4년 4월 18일에 작성되었다고 하는 양미차용서(糧米借用書)다. 요시츠네의 가신 가메이 시게키요[龜井重淸]가 히라이즈미 근처에 사는 농민 소헤이에게 준 ‘아이누의 땅’으로 건너가기 위해 필요한 양곡의 차용증서다. 이 차용증서에는 미나모토 요시츠네와 그와 가장 가까운 가신인 무사시보 벤케이[武藏坊弁慶]의 이름도 써 있다.
 
이를 뒷받침하는 고문서도 있다고 한다. 이와테현 시모헤이군[下閉伊郡] 세키구치[關口]라는 마을의 사토가[佐藤家]의 선조인 사토 노부마사[佐藤信政]가 요시츠네 일행의 안내역을 맡았다는 내용의 고문서가 있는데, 날짜가 1188년 9월로 되어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요시츠네는 ‘고로모가와사변[依川事變]’보다 1년전에 북행을 시작했다는 말이 된다. 아니 ‘고로모가와사변’ 자체가 없었거나 요시츠네 없이 야스히라 혼자서 남의 시체를 갖다 놓고 불지르며 연극을 했다는 말이다.
 
히라이즈미를 출발한 요시츠네 일행은 에사시[江刺], 도오노[遠野], 가마이시[釜石]를 거쳐 미야코[宮古]로 나왔다고 한다. 미야코에서는 배를 타고 하치노헤[八戶]로 직접 갔다는 수행설(水行說)과 구지[久慈]를 거쳐갔다는 육행설(陸行說)로 나뉜다. 이윽고 요시츠네 일행은 에조[蝦夷]를 눈 앞에 둔 츠가루[津輕]반도의 민마야[三廐]에 도착했다. 그러나 피도가 너무 심해 바다를 건널 수 없었다. 요시츠네가 관세음보살상(觀世音菩薩像)을 해변의 바위 위에 올려놓고 3일 밤낮을 기도하자, 백발의 노인이 나타나 해안동굴에 세 필의 용마(龍馬)가 있음을 알려주었다고 한다.
 
이리하여 요시츠네 일행은 용마를 타고 무사히 에조로 건너갈 수 있었다고 한다. 그후 요시츠네가 세 필의 용마를 탄 곳을 민마야[三馬屋]라고 이름지었으며, 당시의 관세음보살상을 모신 곳에 기케이지[義經寺]라는 절이 서 있다. 그러므로 홋카이도에도 요시츠네 관련 유적지로 비라토리[平取]의 요시츠네 신사[義經神社]를 비롯해 60여 개소가 산재되어 있다. 츠가루 반도의 민마야를 출발한 요시츠네 일행이 최초로 도착한 홋카이도 지역은 하코다테[函館]라고도 하고, 마쓰마에[松前]라고도 한다.
 
아이누족의 전승(傳承)에 의하면 요시츠네가 대륙으로 건너가기 전에 훗카이도[北海道]내 각지를 돌며 다수의 아이누 용사(勇士)와 지자(智者)를 모아 데리고 갔다고 한다.
 
요시츠네 일행은 훗카이도에서의 요시츠네 전설의 최후의 현장인 서해안 마시케의 ‘요시츠네 동굴’에서 최종준비를 마치고 배를 탔다. 그리고는 가라후토를 거쳐 마미야 해협을 건너 지금의 러시아 땅인 니콜라예프스크(Nikolajevsk)에 도착, 대륙진출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⑹ ‘칭기즈칸[成吉思汗]=미나모토 요시츠네[源義經]’설(說)의 세번째 근거 →「요시츠네의 대륙진출설(大陸進出說)」
 
아이누의 전설에 이러한 이야기가 있다고 한다.
 
“옛날에 ‘혼칸’님이 가라후토에 쳐들어가 아이누에 적대하는 추장을 죽이고, 우리 선조가 왕래한 해로를 따라 대하(大河)가 있는 ‘쿠루무세국’으로 갔다.”
 
여기서 ‘혼칸’은 미나모토 요시츠네의 다른 이름인 구로한간 요시츠네[九郞叛官義經]에서 ‘한간’의 음이 변한 것이며, 대하는 아무르강, ‘쿠루무세국’은 현재의 중국 동북부로부터 시베리아에 걸친 지역이라고 한다.
 
아무튼 요시츠네 군단은 사할린으로부터 아무르강 하구 니콜라예프스키로 건너가 강을 따라 상류로 거슬러 하바로프스크(Chabarovsk)에 이르고, 다시 우수리강을 따라 남하하며 블라디보스토크(Vladivostok), 나훗카(Nachodka), 우수리스크(Ussurijsk)를 경유, 흥안령(興安嶺)에 본거지를 두고 서서히 서진했다고 한다.
 
블라디보스토크의 동북방 약 120km에 스챵이라는 도시가 있는데, 현재는 러시아 영토이지만 일찍이 중국이 지배했을대 한자로 ‘소성(蘇城)’이라고 표기했으며, 이 지명의 유래는 다음과 같다.
 
“옛날에 ‘이폰’의 무장(武將)이 본국의 전란을 피하여 이곳에 와서 성을 쌓았는데, 그 무장이 이곳에서 소생(蘇生)하였다는 의미로 ‘소성’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여기서 ‘이폰’은 ‘닛폰[日本]’의 발음이 변한 것이라고 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같은 연해주(沿海州) 도시인 나홋카에는 겐지 가문의 문장인 '사사린도[笹龍膽]’ 문양이 장식된 건물이 있다. 이는 요시츠네가 그 일족의 후손이 서아시아 지방으로부터 선조의 연고지인 연해주로 이주한 때문이라고 한다.
 
또한 우수리스크에는 일본 제국주의 한반도 식민통치 시기에 이곳에 거주한 일본인들이 ‘요시츠네 공원’이라고 부르는 작은 공원이 있었다고 한다. 공원내에는 오래된 석비가 있었는데, 비면은 풍화작용으로 마모되어 거의 읽을 수 없었으나 사사린도 문양과 ‘義’라는 글자 하나만 겨우 읽을 수 있었다고 한다. 현지 일본인들은 이 석비를 ‘요시츠네공의 비문’으로 불렀다고 한다.
 
이와 같은 요시츠네 관련 유적이나 전승을 보면 적어도 미나모토 요시츠네가 연해주에 발자취를 남긴 것은 틀림없다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스챵에는 또 “소성을 세운 ‘이폰’의 무장은 딸에게 성을 맡기고 중국 본토로 진격하여 강대한 나라를 세우고 대왕이 되었다”는 전승도 남아 있다고 한다.
 
이제 여기에서 ‘칭기즈칸[成吉思汗]=미나모토 요시츠네[源義經]’설(說)이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⑺ ‘칭기즈칸[成吉思汗]=미나모토 요시츠네[源義經]’설(說)의 네번째 근거 → 칭기즈칸과 요시츠네의 공통점
 
미나모토 요시츠네는 1159년에 출생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이에 반해 칭기즈칸은 1155년, 1162년, 1167년 등 여러가지 설이 있다. 그러므로 칭기즈칸이 태어나서 몽골 제국의 칸으로 즉위하기까지의 경력이 애매모호하다는 것이다. 다만 칭기즈칸이 요시츠네와 거의 동시대 인물임은 틀림없다.
 
몽골의 역사를 최초로 기록한 책이「원조비사(元朝秘史)」다. 이 책은 저자를 알 수 없다. 다만 13세기경에 쓰여졌으며, 조상설화·각 부족의 발생설화 및 칭기즈칸을 중심으로 한 부족투쟁사와 구비 전승문학(口碑傳承文學)까지 기록된 귀중한 역사서이다.
 
그런데 ‘칭기즈칸[成吉思汗]=미나모토 요시츠네[源義經]’설(說)을 주장하는 일본인들은 이 원조비사라는 책의 제목이 수상하다는 것이다. ‘원조사(元朝史)’든지, 아니면 간단하게 ‘원사(元史)’라고 하면 될 것을 왜 ‘숨길 비(秘)’자를 사용했냐는 것이다. 분명히 남에게 알릴 수 없는 비밀이 숨겨져 있다는 것이다.
 
원조비사를 비롯한 몽골 사료에 의하면 칭기즈칸의 아버지 이름은 에스게이 바아토르, 어머니는 호에룬 이케이며 에스게이는 니론족의 계보에 연결되는 귀족인 캬토족 출신이다.
 
여기에서 에스게이는 요시츠네가 건넌 바다, 즉 에조가이[蝦夷海]를 말하며, 이케는 다이라노 기요모리의 양모인 이케노 젠니를 의미한다고 한다. 이케노 젠니는 헤이지[平治]의 변란(變亂) 이후 기요모리를 설득하여 요시츠네 형제의 목숨을 구해준 여성이다. 더구나 칭기즈칸은 자기 어머니에게 센이 태후[宣懿太后]라는 칭호를 붙였다. 즉 '호에룬 이케 센이'는 '이케노 젠니'에서 따온 이름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니론은 니혼[日本], 캬토는 교토[京都]에서 온 말이라고 한다.
 
칭기즈칸이 사실은 몽골족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원조비사에 보면, 당시 테무진과 적대하고 있던 무장 쟈무카가 테무진과 동맹관계에 있던 케레이트족의 옹칸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백령작(白翎雀)이지만 테무진은 홍안(鴻雁)이다. 백령작은 여름 겨울에 관계없이 이곳 북국(北國)에 남아있으나 철새인 홍안은 추워지면 따뜻한 남쪽 나라로 날아간다.”
 
이처럼 테무진을 철새인 기러기에 비유한 것은 테무진이 몽골족이 아닌 이민족 출신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칭기즈칸이 이민족이라는 증거는 또 있다.
 
일반적으로 칭기즈칸은 문맹이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몽골 문자를 읽거나 쓰고는 할 수 없었지만, 한자는 해독할 수 있었다고 한다. 칭기즈칸이 1222년 서정(西征)시 힌두쿠시 산맥에서 장춘진인(長春眞人)이란 승려를 만났을 때 장춘진인의 이야기를 기록하게 하였는데, 몽골 문자가 아닌 한자로 적었다고 한다.
 
또한 칭기즈칸은 임종시 다음과 같은 수수께끼의 유연을 했다고 한다.
 
“내가 이 천명(天命)을 받았다면 지금 죽더라도 후회는 없다. 다만 고산(故山)에 돌아갈 수만 있다면.....”
 
여기에서 고산이란 태어나서 자란 고향의 산, 즉 일본에의 망향에 젖은 발언으로 칭기즈칸이 몽골족이 아닌 일본인이었다는 유력한 증거라고 한다.
 
1206년 칭기즈칸 즉위시의 모습을 원조비사(元朝秘史)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호랑이의 해(서기 1206년)에 오논 강변에 모여 구류(九旒)의 백기(白旗)를 세우고 테무진에게 칸[汗]의 칭호를 주었다.’
 
구류의 ‘구(九)’는 구로한간 요시츠네[九郞叛官義經]와 통하며, ‘백기(白旗)’는 헤이케의 적기(赤旗)에 대한 겐지를 상징하는 흰색 깃발이다.
 
칭기즈칸은 항상 ‘9’와 ‘흰색’을 좋아했다고 한다. 부르칸이라는 무장이 칭기즈칸에게 항목했을 때, 금은 접시를 각 9개, 남자아이와 여자아이를 각 9명, 준마와 낙타를 각 9마리씩 바쳤다. 또한 궁정복(宮廷服)과 제복(祭服)을 흰색으로 통일하였다.
 
칭기즈칸은 병사들의 불요불굴(不撓不屈)의 무인정신 함양을 목적으로 자주 몰이사냥을 열었다. 몰이사냥은 일본에서도 요시츠네 시대부터 가마쿠라 시대 전반에 걸쳐 후지산 기슭 등에서 빈번히 행해졌다.
 
칭기즈칸은 또한 오늘날 일본의 국기라고 할 수 있는 스모[相撲]의 원조인 씨름을 좋아하고 녹차를 즐겨 마셨다고 한다. 일본의 스모는 원래 몽골을 비롯한 유목민족의 씨름이 고려시대의 한국을 거쳐 전래된 것이다. 또한 몽골인은 대체로 녹차를 좋아하는데, 이러한 기호는 칭기즈칸 시대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며, 일본에서 녹차가 널리 마시게 된 것도 요시츠네 시대 이후라고 한다.
 
두 사람의 술에 대한 기호도 동일하다. 칭기즈칸은 술을 안마셨고, 술을 좋아하는 신하를 보면 술은 이성을 잃게 한다며 항상 훈계했다고 한다. 요시츠네 역시 술을 전혀 마시지 않았다.
 
칭기즈칸과 요시츠네의 전법도 비슷하다고 한다. 칭기즈칸은 기습전법을 장기로 했으며, 요시츠네도 이치노타니 전투와 야시마 전투에서 기습전법을 써서 대승을 거두었다.
 
미나모토 요시츠네와 칭기즈칸의 이름이 같다는 주장도 있다. 요시츠네의 한자 이름인 원의경(源義經)을 소리나는대로 읽으면 겐-기-케이(gen-gi-kei)인데, 이것이 칭기스(Ginghis)로 변한 것이라고 한다. 몽골어에서는 ‘게’·‘기’·‘지’의 발음은 거의 구별할 수 없다고 한다. 어떤 몽골인에게 ‘겐-기-케이-칸’을 자연스럽게 여러 가지로 발음해 보도록 했더니 ‘칭-기-세에-한’으로 칭기즈칸의 발음과 흡사하게 되었다고 한다.
 
칭기즈칸이 겐지의 문장인 ‘사사린도’를 사용했다는 결정적인 증거도 있다. 영국의 대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칭기즈칸의 조각상 의복에는 ‘사사린도[笹龍膽]’ 문양이 새겨져 있고, 몽골군 투구에도 상하가 거꾸로 된 모양이긴 하지만 역시 ‘사사린도’ 문양이 그려져 있다고 한다.
 
지금가지 살펴본 내용만 갖고도 칭기즈칸은 일본의 무장 미나모토 요시츠네가 변신하여 1인2역을 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러나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칭기즈칸[成吉思汗]=미나모토 요시츠네[源義經]’설(說)을 주장하는 일본인들은 더욱 강력한 증거들을 일본인이 아닌 제3자의 자료나 문헌을 통해 입증하려고 한다.
 
먼저 칭기즈칸과 요시츠네가 동일인물이라면 그 용모나 체형이 똑같아야 할 것이다. 칭기즈칸은 신장이 거대하고 용모는 괴위(魁偉)했다는 것이 통설이다. 그러나 요시츠네는「겐페이성쇠기(源平盛衰記)」에 의하면, "피부가 희고 키가 작다. 용모는 우미(優美)하고..." 라고 묘사되어 있으며, 오늘날 전해지는 초상화를 보더라도 여자처럼 예쁜 얼굴이다.
 
그렇다면 엄청난 모순이 아닌가! ‘칭기즈칸[成吉思汗]=미나모토 요시츠네[源義經]’설(說)은 그대로 붕괴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들은 또 찾아냈다.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몽골의 역사학자 도루지가 저술한「성길사한전(成吉思汗傳)」에 매우 주목할 만한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고 한다.
 
‘주군(主君) 붕어시(崩御時) 옥체(玉體) 점차 축소되고...’
 
기괴하게도 칭기즈칸이 죽었을 때 그 유체가 점차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물론 의학적으로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칭기즈칸은 여름철에는 반드시 발쥬나 호반(湖畔)으로 피서를 가서 측근 이외에는 결코 자기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기묘한 행동은 칭기즈칸의 용모나 체형에 측근 이외의 사람들에게는 알리고 싶지 않은 비밀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칭기즈칸[成吉思汗]=미나모토 요시츠네[源義經]’설(說)의 열렬 주창자 오야베 젠이치로[小谷部全一郞]는「칭기즈칸은 미나모토 요시츠네」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추리한다.
 
‘칭기즈칸은 백성들에게 위엄을 보이기 위해 항상 몸에 두터운 의복을 걸쳐 비대하게 치장하고, 장화의 밑바닥을 높게 하여 신장을 크게 하고, 의복의 복부에 솜을 넣어 배가 튀어나온 장정을 가장하고...’
 
‘칭기즈칸=요시츠네’설을 주장하는 것은 일본인만이 아니다. 에도 시대 말기 큐슈 나가사키 오란다(네덜란드) 상관(商館)의 의사로서 일본에 온 씨볼트가 외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이 설을 제기했었다.
 
그에 의하면, 칭기즈칸의 칸[汗]은 테무진 이전에는 없었던 칭호이며, 이는 일본어의 ‘카미’가 변한 것이라고 한다. 또한 몽골 궁정의 풍속, 습관 중에서 일본 황실과 비슷한 것이 많다고 한다. 예를 들면 궁정복이나 제복 모두 흰색을 중요시하고, 천막(天幕)을 뜻하는 ‘시라올다’의 ‘시라’는 일본어의 희다는 뜻의 시라[白]와 같다고 한다.
 
⑻ ‘칭기즈칸[成吉思汗]=미나모토 요시츠네[源義經]’설(說)의 배경
 
‘칭기즈칸=요시츠네’설이 확립하려면 우선 미나모토 요시츠네[源義經]가 고로모가와 사변[依川事變]에서 죽지 않고 살아있어야만 한다. 즉 후지와라 야스히라[藤原泰衡]와 요시츠네가 서로 각본을 짜서 연기를 했어야 한다. 그러나 두 사람이 사전에 손을 잡고 연극을 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고로모가와 사변(1189년 윤 4월 30일)보다 3개월 전인 1189년 2월 야스히라는 요시츠네를 지지하는 막내동생 요리히라[賴衡]를, 동년 6월에는 또 다른 동생 다다히라[忠衡]까지 죽인다. 요시츠네와 짜고 연극을 하려 했다면 두 동생까지 죽일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요시츠네의 생존설(生存說)’은 그의 사후 얼마되지 않아서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하여「헤이케 이야기」및「겐페이 성쇠기」등의 군기물(軍記物) 속에서 그려지고, 무로마치 시대[室町時代] 중기에 ‘기케이기’로서 집대성되어 비극의 영웅 요시츠네상(像)이 완성되었다. 절세의 미녀들과의 애절한 사랑, 젊고 미남인 군사적 천재에 대한 공감, 또한 형제간의 불화로 인한 몰락이라고 하는 비극의 주인공에 대한 연민과 동정으로 생겨난 이야기인 것이다.
 
17세기 후반 겐로쿠시대[元祿時代] 이후 도호쿠[東北] 지방에 발생한 센다이 죠루리[仙臺淨瑠璃]의 음유시인(吟遊詩人)들이 민중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영웅불사 또는 부활의 희망에 편승하여 허구의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이에 따라 가공의 유물이나 유적까지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이동하는 코스대로 요시츠네의 북행 경로가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또한 당시의 위정자들은 이를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하였다. 원래 훗카이도의 원주민인 아이누족은 정복민족인 왜인(倭人)에 대한 저항감이 컸다. 샤쿠샤인[沙牟奢允]의 영웅적인 투쟁은 아이누족의 자랑이었다. 이러한 아이누들에게 ‘요시츠네 전설’이 민족동화정책의 일환으로 교묘하게 활용된 것이다.
 
메이지시대가 되자 ‘요시츠네 생존설’ 및 ‘북행설’이 발전하여 마침내 요시츠네가 대륙으로 건너가 몽골 제국의 시조인 칭기즈칸이 되었다는 설이 등장하게 된다. 메이지 정권에서 내무대신을 지낸 스에마츠 겐죠[末松謙澄]가 그 중 하나다. 겐죠는 대한제국을 멸망시키고 한반도를 일본의 식민지로 만드는 데 가장 크게 기여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사위이기도 하다.
 
그는 영국의 케임브리지 대학 유학 시절 구미제국에 일본 문화의 우수성을 과시하기 위하여 일본이 자랑하는 1천여년 전에 쓰여진 장편소설 ‘겐지 모노가타리[源氏物語]’를 번역, 소개한 적이 있다. 그는 요시츠네가 대륙으로 진출하여 칭기즈칸이 되었다는 내용의 논문을 그리피스라는 이름의 영국인을 가장하여 익명으로 발표하였다. 여기에 칭기즈칸으로부터 누루하치[奴爾哈齊]까지의 계도를 첨부하여 번역, 1885년에 일본에 소개된 책이「요시츠네 재흥기(義經再興記)」이다.
 
그후 직접 몽골을 탐험하여 스에마츠 겐죠의 주장을 더욱 발전시킨 것이 오야베 젠이치로라는 자다. ‘일본인(日本人)과 유태인(猶太人)이 같은 선조(先祖)에게서 갈라져 생겨난 민족’이라는 내용의 일·유동조론(日猶同祖論)으로 유명한 젠이치로가「칭기즈칸은 미나모토 요시츠네」라는 책을 1924년에 편찬하고,「만주를 개척한 미나모토 요시츠네」를 1933년에 발표하여 ‘칭기즈칸[成吉思汗]=미나모토 요시츠네[源義經]’설(說)을 주장한 것이다.
 
이러한 오야베 젠이치로의 주장을 5·15사변(五一五事變)에 참여한 A급 전범 오가와 슈메이[大川周明]와 1923년 관동대지진(關東大地震) 때 무정부주의자인 오스기 사카에와 이토 노에를 살해한 야마기시 히로시[山岸宏]가 지지했다.
 
이들만이 아니다. 젠이치로가 육군 통역관으로서 칭기즈칸 관련 유적을 조사할 때 관동군 사령부는 그를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 ‘칭기즈칸[成吉思汗]=미나모토 요시츠네[源義經]’설(說)을 중원 대륙 침략의 명분과 역사적 근거로 만들기 위해 앞에서 언급한 유적들을 날조한 것이다. 이처럼 이들이 ‘칭기즈칸=요시츠네’설을 통해 만주를 비롯한 대륙 침략의 정당화 및 국위선양을 목적으로 한 불순한 정치적 의도가 숨어 있었던 것이다.
 
일본 제국주의 세력의 수뇌부는 1931년에 만주사변(滿洲事變)을 일으키고, 이듬해인 1932년에는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푸이[簿儀]를 내세워 만주국 건국 선언을 하였다. 그러나 만주국은 괴뢰정권으로서 실질적으로는 일본의 군부 및 관료가 지배하였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미나모토가[源家]의 선조는 신라계(新羅系)이며, 라이벌 가문인 다이라씨[平氏]는 백제계(百濟溪)인 환무제(桓武帝)의 후손이므로 결국 일본에서의 ‘겐페이전란[源平戰亂]’은 신라 왕족과 백제 왕족 후손의 대결이었던 것이다.
 
☞ 출처; 최천기(崔川基) 著『황당무계(荒唐無稽)한 나라 일본(日本)』학민사版(2005년編)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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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ysglmetp 13-05-20 10:06
   
능력자분이 누가  몽고정부에  이런내용을

보냈으면 좋겠습니다.

날조 일본을  전세계에  널리 알려야 합니다.
불체자몰살 13-05-20 10:21
   
날조대국 倭의 모든 역사는 판타지 망상 삼류소설
길로틴 13-05-20 13:19
   
그 유명한 '예수 일본인설' 도 있죠 ㅋㅋㅋㅋ
눈틩 13-05-20 15:06
   
공자 일본인설도 빨리 주장해라.
더러운 짜장들이 자꾸 공자 한국인설로 귀찮게 하는데~
이 어그로도 일본이 끌어줬으면 좋겠다~
조니 13-05-20 19:35
   
전에 명예 백인 .....
 이소리 듣고 뿜어 씁다.....
 백인이면 백인이지 명예백인은 머야.......
쓸개빠진놈을 명예백인 이라하나봐요 일명 쪽바리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폴투 13-05-20 20:11
   
원숭이 똥자루가 장화에에다 깔창넣고 솜으로 벌크업하고  징기스칸이 되네..우리역사도 저 쉐이들이 주물러놔서 엉망인데 ..끝이 어딘가 진상 들.. 테무진의 어린시절은 어찌 다듬을까 환타지 기다려지네
자기자신 13-05-21 01:56
   
웃기고있네 칭기즈칸이 일본인이래 ㅋㅋㅋㅋㅋㅋㅋ 역시 날조민족답구나 쪽바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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