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그 오랑캐가 우리랑 같은 말을 사용했군요 고구려를 계승한 고려도 오랑캐란 말이죠? ㅎㅎ 당시 고구려 백제 신라가 그리고 남북국시대인 발해와신라가 같은말을 사용했다는건 후한서나 구당서 등등 여러 역사서를 통해서 확인할수있고 중국또한 이것만은 인정하고있는사실인데 님께선 다른민족 대하듯하시네요 ㅎㅎ 그럼 북한주민들도 오랑캐라는 말인가요? ㅎㅎ
삼국의 언어와 풍습에 대한 사서의 기록을 살펴보면 삼국의 언어에 차이가 없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강단학계에서는 고대삼국의 언어가 개별언어였으며 특히 고구려의 언어는 백제와 신라하고는 차이를 가진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하지만 70년대 이후에 면밀한 분석과 연구로 삼국의 언어가 방언적 차이는 있지만 단일어였다고 인식합니다.
삼국언어의 연구결과 한(韓)민족의 고대삼국에 계통을 달리하는 근본적인 언어차이는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학자들은 삼국의 언어차이뿐 아니라 방언차이도 부정하고 있다.
고대어가 개음절(열린음절)로 이루어져서 국명과 지명어휘를 몇개의 기원어의 범주로 묶어 고찰했는데 이러한 관점은 확대되어 비교언어학적인 연구를 통해 고대삼국의 언어가 동일했음을 입증하고 있다.
그리고 자료를 통해 삼국의 언어를 서로 다른 개별언어로 볼 수 있는지 검토했는데 고구려어휘 자료들에는 중세국어와 이어진다고 본 어휘가 각각 44%, 68% 였는데 이는 오히려 삼국의 언어가 모두가 중세국어에 이어지고 있다는 증거가 되고 단일어라는 전제가 없이는 설명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기문- 고구려어 76개중 31개를 중세국어와 대응 발견
*박병채- 고구려어 63개중 41개를 중세국어와 연관 발견
<후한서>
東夷相傳以爲夫餘別種故言語法則多同
[고구려는 동이족들이 서로 전하기를 부여의 별종인 까닭에 언어와 법제가 많이 같다고 한다]
言語諸事多與夫餘同其性氣衣服有異
[고구려는 언어와 여러일들이 부여와 많이 같은데 그 성질과 의복은 다른데가 있다]
言語食飮居處衣服有似句驪
[동옥저는 언어, 음식, 거처, 의복이 고구려와 비슷하다]
耆舊自謂與句驪同種言語法俗大抵相類 言語法俗大抵與句麗同
[예의 늙은이들이 스스로 이르기를 고구려와 같은 종족이라 한다. 언어와 법속이 대개 서로 유사하고 고구려와 같다]
이렇게 화하족 사서의 기록에서 고구려와 부여 그리고 예(濊)의 언어와 풍습이 같았음을 증언합니다.
<후한서>권85
弁辰與辰韓雜居城郭衣服皆同言語風俗有異
[변진과 진한은 섞여 산다 성곽과 의복은 다 같은데 언어와 풍속은 다른 점이 있다]
<삼국지>'위지'
弁辰與辰韓雜居亦有城郭衣服居處與辰韓同言語法俗相似
[변진과 진한은 섞여 사는데 또한 성곽이 있다 의복과 거처는 진한과 더불어 같고 언어와 법속이 서로 비슷하다]
한(韓)에 대한 화하족 사서의 기록이며 여기서 [다른점이 있다]와 [서로 비슷하다]의 상반되는 기록에서 두 가지를 해석할 수 있는데 하나는 두 사서의 기록자가 실제에 근거한 것이 아니고 어느 한 책이 다른 한 책을 가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 하나는 <후한서>의 기록자가 이 지역의 방언차이를 목격하고 [다른데가 있다]로 기록한 것으로 보이지만 어느쪽이든 변진과 진한의 언어차이를 증명하는 기록으로 볼 수는 없다.
그리고 서라벌신라지역에 대한 기록에서 한반도 남부에 존재한 언어는 단일어였음이 실증된다.
<양서>
語言待百濟而後通焉
[신라의 언어는 백제의 통역이 있어야 중국과 통한다]
이 기록은 당시에 화하족과 신라가 의사소통을 하려면 백제가 통역을 해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다시 말하면 백제어와 신라어는 같았음을 확인하게 되고 백제어에 대한 기록을 찾아 보면 다음과 같다.
<양서>
今言語服章略與高驪同行不張拱拜不申足則異
[백제의 지금에 언어와 복장은 대략 고구려와 같은데 다닐 때 두손을 맞잡지 않고 절할 때 다리를 펴지 않는 점이 다르다]
<남사>권79
言語服章略與高麗同
[언어와 복장은 대략 고구려와 같다]
<위략>
百濟高麗新羅基三國全朝鮮裔裳也用同語
[백제, 고구려, 신라 삼국 모두 조선의 후예들로 같은 언어를 쓴다]
지금까지 살펴 본 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고구려와 부여, 옥저, 예의 언어가 같았고 한(韓)의 언어 즉 백제와 서라벌신라의 언어가 같았으며 고구려와 백제의 언어가 같았으므로 결국 고대 한(韓)민족의 언어는 단일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주서>의 기록에 백제는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언어가 달랐다고 하는데 왕을 ‘어라하’ 또는 ‘건길지’라고 불렀는데 ‘어라하’는 지배층인 왕족과 귀족들이 사용하고 ‘건길지’는 평민들이 사용한 호칭이었다.
그렇다고 언어가 다른것은 아니고 관료들은 '주상' 또는 '전하'라고 부르고 백성들은 '상감마마' 또는 '임금님'으로 부른 차이로 봐야 하는 것이다.
비류와 온조가 주도한 초기백제가 건국한 곳은 대륙의 발해만인데 고구려의 공격으로 남하하여 산동성과 한반도로 이동하므로 백제는 마한과는 별도의 국가로 존재했으며 후대에 마한을 통합한다.
고대의 언어가 달랐다는게 핵심이 아닙니다. 제가 발제한 내용이 언어에 대한 내용도 아니며. 고대 언어가 남아있지 않고 사료가 없어서 증명이 불가능합니다. 고대 사서의 특정 내용만으로 확인할수 없다고 봅니다. 이미 서두에 강단사학=공식역사학계의 입장에서 부정하고 있다고 서두를 시작하고 있네요.
그건 주장일뿐이고 증거가 안되는것임. 논파되었다는 주장일뿐이고 통설로 인정되는것도 아님. 대중역사서에는 그런식으로 기술되고 있고. 인터넷 검색으로도 수도 없이 나옴. 강단사학=정론도 부정하고 주장만 하고 있는 그런 입장에서는 내가 적시한 블로그의 주장도 주장으로서 일응의 논거임.
신라가 고구려-백제 멸망을 시켰다해도,,
엄연히 발해가 들어서 해동성국 소리 듣고, 일본에 고(구)려국왕을 자처했죠.
고구려가 계속됐다한들..
발해처럼 거란한테 수도가 급습당해 멸망안한다는 보장도 없구요..
고구려 멸망할 무렵만 하더라도 이미 거란족의 성장세가 만만찮았던 시절이었고..
그런 의미에서 역사란 가정이 무의미한 것도 사실이고,
만에 하나 고구려가 존속되었다해도 다른 요소에 의해 멸망안한다는 보장도 없는것이죠.
사실상 북방영토가 사라진것은 발해 멸망 이후이고.. (이후 거란(요나라),여진족(금나라),몽골족(원나라)
몽골의 부마국으로써 고려왕이 심양왕 자리를 겸할 때는 북방지역에 대한 영향력이 살아났다가,
다시 고려왕가와 심양왕가가 분리되고, 나중에 공민왕 때 요동정벌로 잠시 수복할 기회가 있었죠.
다만, 군량미 부족으로 철수.
그러다 주원장이 원나라를 몰아붙이며, 요동에 진출하고, 여기서 철령위 문제가 발생하죠.
여기서 위화도 회군이 터지면서 요동정벌이 날아가버린거고..
이후 명나라와 조선이 요동지역에 일종의 완충 공백 지대를 형성하고 있었지요.
그런데, 청나라가 세워지면서 이 완충지역도 청나라 관할이 되어 버리죠.
그래서 백두산정계비가 세워지고 청나라랑 국경선 확립이 되는데..
뭐.. 따지고 보면 이 요동지역에 대해서는 고구려 멸망 이후에도
영유권 문제가 복잡하게 오락가락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로, 고구려 멸망 이후 만주가 우리 역사에서 사라졌다고 하는 것도 백프로 옳은 말은 아니지요.
엄연히 발해가 있고, 그 뒤에도 고려왕의 심양왕 겸직, 공민왕 때의 요동 점령, 명나라와의 국경 문제,
청나라와의 국경문제 등을 통해 간도문제로 이어지는 복잡한 역사가 얽혀있거든요.
그런데 신라때문에 한반도로 찌그러 들었다고 못을 박는것도 잘못된 주장이라고 볼 수 있지요.
이건 엄연히 발해의 존재를 부정하는 발언입니다.
청나라의 건륭제(乾隆帝)는 전 국가적 사업으로『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라는 역사서의 편찬에 착수하였다. 만주족이 건국한 청나라는 압도적인 인구와 압도적인 문화적 우위를 지닌 한족(漢族)이라는 엄청난 존재에 맞서기 위하여 만주족 자신들의 역사적 원류를 찾고 그것을 통하여 자신들의 민족적 정체성을 정립함으로써 국가와 만주족의 자긍심을 고양시킨다는 취지와 목적을 가지고 건륭제(乾隆帝) 시기에 만주족의 학자들을 총망라하여 역사 편찬을 추진하였다.
이 역사서는 흥미롭게도 우리의 삼한(三韓), 부여, 백제, 신라, 발해 등의 국가와 민족을 만주족의 '강역(疆域)'과 '부족'란에 포함시켜 설명하고 있다. 이 책의 서문은 건륭제가 직접 썼는데, 건륭제는 '계림(鷄林)'과 '길림(吉林)'의 발음이 동일한 사실을 예시하면서 이를 근거로 하여 "신라라는 국가가 한반도가 아니라 만주의 길림성에 존재하고 있지 않았을까?" 라는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건륭제의 문제의식은 상당히 날카로웠으나 거기에서 한 수를 더 생각했어야 했다.
계림주(鷄林州)의 설치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당나라 시대에 '계림주(鷄林州)'가 현재의 길림성에 실재(實在)하고 있었다(『구당서』).
원래 당나라는 AD 662년에 백제를 멸망시킨 뒤 백제의 고토(故土)에 웅진도독부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이듬해인 663년에는 신라에 계림도독부를 설치하고, 신라 문무왕 김법민(金法敏)을 계림도독에 임명하였다. 이렇게 하여 최소한 '형식적으로는' 신라 역시 당나라에 편입시켰다.
그 뒤 668년 고구려가 멸망당한 후 670년에 일어난 고구려 유민 검모잠(劍牟岑: 고구려 멸망 이전에 大兄 벼슬을 하고 있었던 인물이다)과 안승(安勝)의 부흥 운동이 실패했을 때, 한반도 전체를 손에 넣으려 획책했던 당나라에 맞서기 위하여 신라는 고구려 부흥운동의 잔여세력을 끌어들여 당나라에 저항하였다. 그러자 당나라는 신라 문무왕 김법민의 계림도독 직위를 삭탈하고 대신 당나라 장군 유인궤(劉仁軌)를 계림도총관(鷄林道總管)에 임명하여 신라를 토벌하도록 하였다. 이 전쟁에서 신라는 패배하여 항복하였으며, 사신을 보내 입조하고 예물을 바쳤다. 하지만 그 뒤 신라를 중심으로 백제와 고구려 유민들은 한반도 전체를 속국으로 편입시키려는 당나라의 야욕에 끝까지 맞서 강력한 저항을 전개하였다. 결국 당나라는 이 끈질긴 투쟁에 배겨내지 못하고 계림도독부를 한반도로부터 오늘날의 길림성으로 이전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뒤 유명한 설인귀(薛仁貴)가 유인궤에 이어서 계림도총관에 임명되었다.
이렇게 하여 본래 신라를 지배하기 위해 설치되었던 계림도독부는 여전히 '계림(鷄林)'이라는 명칭이 사용되고는 있었지만 이미 신라에 대한 지배라는 의미를 완전히 상실하고 대신 만주 지역을 그 관할 통치범위로 하는 지배기구로 변화하였다. 그 뒤 당나라는 계림도독부가 있던 오늘날의 길림성 지역을 공식적으로 계림주(鷄林州)라는 행정구역으로 칭하게 되었다. 당나라 시대 이후 그곳은 발해를 거쳐 요나라, 금나라, 원나라 등 북방민족의 세력권 하에 놓여 있었고(이러한 역사 시기에서도 중국 한족들은 상당 기간 그곳을 계속하여 鷄林州로 지칭했을 것이다), 청나라 강희제(康熙帝) 때 처음으로 이곳에 길림장군(吉林將軍)을 임명하는 등 '길림(吉林)'이라는 용어가 정식으로 사용되게 되었다. 여기에서 '길림(吉林)'이라는 말은 세월이 흘러 이미 그 기원과 뜻이 상실된 '계(鷄)' 자 대신 발음은 같고 '길하다'라는 좋은 의미를 지니고 있는 '길(吉)' 자로 대체하여 사용하게 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길림(吉林)'과 '계림(鷄林)'이라는 단어의 중국어 발음은 모두 '지린(jilin)'으로 동일하다(다만 발음의 聲調만 서로 다르다).
< 흠정만주원류고>에서 이처럼 금나라의 연원이 신라로부터 기인되었다고 강하게 주장하는 것은 이 책의 ‘부족’편과 ‘강역’ 편에서 설명을 하고 있는 것처럼 신라의 9주가 현재의 만주 지역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 요사습유(遼史拾遺)>와 <흠정만주원류고>에는 <봉사행정록(奉使行程録)>을 인용하여 신라산(新羅山)에 대한 기록이 나오는데 “신라산은 함주(咸州)로부터 북쪽으로 가서 동주(同州)에 이르면 동쪽으로 큰 산이 바라보이는데 신라산이며 산의 깊은 곳과 더불어 고려와 경계를 이룬다.”고 되어 있으며
이 신라산은 오늘날(청나라 건륭제 당시) ‘철령(鐵嶺)과 개원(開原)의 사이’라고 하고 있어 이곳이 신라의 강역이었으며 고려로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현재도 ‘길림(吉林)’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는 것은 신라를 뜻하는 ‘계림(鷄林)’이라는 말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고 있다. 즉 우리나라 한자 독음으로는 ‘길림’과 ‘계림’이 서로 다르지만 현 중국어 발음으로도 ‘지린(Jilin)’으로 발음이 같다. 김함보가 추장으로 있었으며 아구다가 금나라를 세운 요나라의 완안부가 신라의 강역 안에 포함되어 있던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청나라 시대 건륭 42년(1777년) 한림원에서 편찬된
<만주원류고>에서는 신라의 강역을 현재의 만주지역을 포함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만주원류고에 따르면
<구당서>에 신라를 계림도독부로 삼고
그 왕 김법민을 계림도독으로 삼았다는 내용과
<신당서>의 신라왕은 금성(金城)에 거처하며
금성의 둘레는 8리이며 그 왕을 계림주도독으로 삼았다는 내용과
신라는 한나라 시대의 낙랑지역에 할거하였고
횡으로 천리이며 종으로는 삼천리였다는 내용을 인용하면서
계림은 현재(청나라 시기)의 길림이라 하였다.
계림(鷄林)과 길림(吉林)은 우리 발음으로는 달리 부르지만
중국 발음으로는 지린[jilin]으로 발음이 같으며
현 길림이라는 지명이 신라의 계림에서 유래되었다고 설명을 한다.
또한,
신라의 구주(九州)를 설명하는 항목에서는
"신라의 땅은 동남쪽으로 오늘날 조선의 경상도 강원도의 2개의 도를 아우르고
서북족으로는 길림 오랍에 이르고 또한 서쪽으로 개원 철령에 가깝다"라고 하였으며
"개원(開元) (당나라 현종 713 ~ 741)이후 발해가 성할 때 압록강으로 경계하였다. "고 하였다.
그리고
"구주(九州)의 설치는 동쪽으로 길림에 이르고 서쪽으로 광녕에 이른다"고 되어 있어
길림 광녕이 현재도 있고 광녕 근처에 철원 개원이 있으니
신라의 서쪽은 개원 철령 광녕으로 이어지는 선을 경계로 나타내고
동쪽은 길림으로 이어짐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신라강역은 북쪽의 동쪽은 길림에서 서쪽은 개원 철령까지라고 하였다.
***************
여기에서 제일 앞쪽 프레시안의 분석은..
"계림도독부"가 한반도 내에서 만주로 밀려났고,
그래서 길림이 계림도독부의 터전이 된 것이다로 보고 있고..
후자의 청나라 역사서 만주원류고의 경우엔..
신라가 요동지역에 위치한 개원, 철령, 광녕 등에 걸쳐 진출했고,
현재의 길림을 차지했었다로 보는 시각입니다.
개원과 철령은 나중에 고려와 조선초기 문제가 되는 철령위 문제에도 나오는 지역인데..
개원은 심양 북쪽에 위치한 곳이죠. 철령 역시 그 남동쪽에 위치한 지역이고.
우리나라는 철령위를 저 강원도 북쪽지역이라고 비정하고 있는데..
실질적으로 고려가 철령위 문제로 명나라와 충돌해, 압록강을 건너 요동정벌에 나서려 한 것을 봐도
철령이 요동의 철령을 의미하는걸 알 수가 있죠.
(아니라면 명나라가 설치한 철령위를 부수러 함경도나 강원도쪽으로 출병해야 마땅한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