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근대화는 서구 열강의 힘에 의해 급격히 몰락해 가는 청과 아시아의 새로운 신흥 강국으로 부상하는 일본제국 그리고 부동항을 쫓아 적극적인 남하 정책을 펴던 러시아라는 다자외교와 군사적 충돌의 한가운데에서 채 꽃도 피지 못하고 몰락하게 되었는데, 사실 이 모든 과정의 핵심에는 청의 악역이 결정적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전근대 시기 한중관계는 조공책봉체제하에 있었다. 그런데 악명 높은 이 관계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는 훨씬 형식적인 것이었다. 특히 18세기 중엽 이후에는 정기적인 사절단 파견과, 중국을 상국으로 대접하는 외교 의례만 지키면 나머지는 거의 조선의 자유 의사가 존중되었다. 병자호란(1637년) 이후 조선에 청군이 주둔하거나 청의 관리가 서울에 주재하는 일이 단 한 번도 없었던 것이 이를 증명한다.》
조공 관계는 ‘지배-복속’ 관계라기보다는 오히려 그런 관계를 막고자 서로 비호하거나 원조하는 일종의 ‘패트론-클라이언트’ 관계였다고 할 수 있다.(김봉진, ‘조선=속국, 속방’의 개념사)
19세기 후반 서양과 일본의 국가들이 조청(朝淸)관계의 ‘정체’를 묻기 시작한 것이다.
그 계기는 병인양요(1866년), 신미양요(1871년)였다. 프랑스와 미국은 조선과 전쟁을 하면 청나라를 침범하는 게 되는지, 청나라는 개입할 것인지, 그 이전에 도대체 조청관계는 어떤 것인지를 물었다.
청 정부의 답변은 ‘속국이지만 자주적인 나라이고, 자주적이지만 동시에 속국’이었다.
즉, 속국자주(屬國自主)였다. 조선 같은 조공국은 사실상 독립국이라는 게 당시 조선과 서양, 그리고 일본의 입장이었다.
1880년대 들어 청은 전통적인 입장을 바꿔 조선 속국화 정책을 급격하게 추진했다.
그 주도자는 북양대신 이홍장(李鴻章)과 그 부하인 마건충(馬建忠), 원세개(袁世凱)였다.
정책 변화의 이유는 청의 위기감이었다.
신미양요 후 대원군이 실각하자 일본은 조선과 강화도조약(1876년)을 맺고 이어 류큐 왕국을 병합(1879년)해버렸다.
청에서는 어떤 방법으로 조선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인가를 두고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임오군란(1882년) 때 대군을 이끌고 조선에 들어온 오장경(吳長慶)의 부하 장건(張건)은 고대 한사군의 전례에 따라 조선국왕을 아예 폐하고 조선성(朝鮮省)을 설치하자고 했고, 한림원 시강 장패륜(張佩綸)은 대신을 파견하여 조선의 내정과 외교를 직접적으로 장악하자고 했다.
사실상의 대원군 쿠데타인 임오군란을 진압하고자 병자호란 후 약 250년 만에 청군이 들어왔다.
난을 진압한 청군은 대원군을 청으로 납치해 갔고 민씨 정권을 다시 세워줬다.
청은 이제 서울에 있는 군사력을 배경으로 조선 내정에 맘대로 개입했다. 그 선두에 선 게 원세개였다.
먼저 김옥균은 일본의 지원을 받아 갑신정변(1884년)을 일으켜 조공관계를 폐기하고 아예 독립하려는 급진적인 시도를 했지만 청군은 이를 간단히 진압해 버렸다. 이어 고종은 러시아의 힘을 빌려 청을 밀어내려고 꾀했지만 원세개는 이를 알아채고 그를 폐위시키려 했다.
청은 청일전쟁(1894년)이 발발하기까지 조선의 ‘자주’와 개혁을 방해했다.
매우 불평등한 무역관계를 강요했고(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 사실상 총독으로 군림하던 원세개는 조러밀약을 분쇄했다.
한미조약에 따라 1887년 고종은 박정양(朴定陽)을 미국공사로 임명했으나 청은 ‘주재국에 착임하면 그곳 청국공사와 협의하고 그 지시에 따르라’며 조선의 ‘자주’를 인정하지 않았다. 박정양은 청나라의 방해로 제대로 임무 수행을 못하고 결국 일찍 귀국하고 말았다.
전통적인 조선의 ‘자주권’을 무시하고 속국으로 만들려고 했던 청의 야욕이 조선의 개혁을 가로막았고 조선인을 등 돌리게 했으며 청이 그토록 우려하던 일본의 한반도 침략을 불러들였다.
개항부터 청일전쟁까지의 한국 근대사는 ‘속국화’에 맞서 ‘자주’를 확보하려는 청에 대한 항쟁이 중심축이었다. 영은문과 모화관을 헐고 세워진 독립문(1897년)은 바로 그 상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