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촌산책. 세상의 중심에서 친일을 외치다!
경복궁역 4번출구를 나와서 통인시장을 지나 배화여대쪽 으로 길을 잡고 옥인길을 따라, 다소 가파른 비탈을 지나다 보면, 먼저 아름다운 박노수 화백의 집을 만나게 되고, 조금 더 가면 수성동 계곡과 인사를 하게된다.
수성동 계곡은 서울에서 찾기 어려울 정도로 아름다운데, 거기에 있는 기린교는 유일하게 원 위치에 복원된 다리 라고 하는데, 작은 암석으로 된 다리이다.
수성동 계곡을 지나 아래로 내려오면 서촌이 시작이 된다. 지금은 서촌이 아름다운 카페와 갤러리가 어울어진 서울의 문화공간이지만, 한 때 이 곳에는 아방궁이라고 불리우던 프랑스식 건물이 놓여있었다.
이름은 송석원, 벽수산장, 10여년의 공사를 끝내고 집주인인 윤덕영이 발을 들여 놓은지 겨우 5년을 못넘기고 윤덕영은 세상을 뜨고 만다.
윤덕영은 순정효황후의 삼촌이고, 황후의 아버지 윤택영의 형이 되는 인물이다. 윤택영이 황제에게서 옥쇄를 빼앗아 일본 통감에게 갖다 주었고, 그 댓가로 자신의 빚을 갚았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 옥새를 훔친이는 당시 황제의 비서실장인 시종원경 윤덕영이었고 자작작위와 함께 엄청난 은사금을 받은 인물이다.
당시 아이들은 윤택영을 이렇게 노래했다.
합방이후 한양보소 만고역적 윤택영이
부원군 명색되고 인궁에 옥새빼사 (인궁 =임금)
일본통감 갓다주고 저에비절 벗고나내(자기 빚에서 벗어나네)
원래 윤덕영이 벽수산장이란 아방궁을 지은 자리는, 임진왜란 전까지는 집을 지을 수 없었다. 경복궁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즉 세상의 중심이었던 자리이다.
그러나 임란 후 월산대군 저 지금의 덕수궁에 이어한 후에는, 김수항이 청휘각 이란 별장을 짓기 시작했고 그러면서 서촌의 역사가 시작이된다. 그리고 그 옥류동 계곡의 송석원에 윤덕영은 자신의 아방궁을 짓게 된다.
송석원 터를 중심으로 한 윤덕영의 집터의 전체규모는 약 1만 9,467.8평에 달했다. 전체 옥인동의 54%를 소유한 셈이었다.
송석원의 주인을 시대순으로 배열해 보자! 조선시대 사대부 서인, 대한제국의 황실외척 민씨일가, 일제강점기 매국노와 일본 광산회사, 대한민국 건국 이후 인민군과 미군 그리고 국제연합, 우리역사의 응집체이다!
윤덕영: 대한제국 융희 4년인 서기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 때에는 윤택영, 민병석과 함께 대궐 안의 반대를 무마하면서 고종과 순종을 협박하고 국새를 빼앗는 따위의 방법으로 늑약 체결에 가담하여 일본제국으로부터 훈1등 자작(子爵) 작위를 받았다. 그가 한일 합방을 강제로 체결하려 하자 그의 조카 딸인 순정효황후는 자신의 치마 속에 옥새를 숨겨두었으나 그는 조카딸을 협박하여 옥새를 탈취하였다.
훈1등 자작으로 합방 은사금 5만 엔을 받았으며, 이왕직찬시(李王職贊侍)가 되었고 곧 장시사장(掌侍司長)이 되었다.
벽수산장은 1935년 최종 준공된 이후 줄곧 홍만자회 조선지부에서 임대하여 사용하다가, 윤덕영 사후 윤강로에 의하여 1945년 미쓰이광산주식회사에 건물과 부지 일체가 매각되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해방 직후 덕수병원에 불하(拂下)되었다가, 한국 전쟁 중 미8군 장교 숙소로 사용된 기간을 거쳐 1954년 6월부터 한국통일부흥위원단(UNCURK, 언커크)에서 사용하였다. 이후 1966년 4월 5일 화재로 전소되어1973년 6월 도로정비 공사로 인하여 철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