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당나라에 간 일본 중 永忠 등이 보낸 편지 내용이다(796년 4월). 여기서 토인이란 고구려인들을 말하는 것으로 지배층은 대부분 고구려인들이고 피지배층은 말갈인이라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이 자료에 나타난 상황은 발해의 초기, 그리고 현재 연해주 지방 정도를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발해를 2000리로 본 것도 신당서에 표현한 5000리의 반도 안되고, 주 현 관 역들이 없고 마을들만 있다고 했는데 발해는 5경, 15부, 62주가 있었다(신당서)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 다. 처음 나라를 세운 지역은 오지로 인구가 많지 않았었다. 신당서에는
[땅은 사방 5천리이며 호구는 십여 만이고 승병(勝兵)은 수만이다. 부여, 옥저, 변한, 조 선 등 바다 북쪽에 있던 여러나라 의 땅을 거의 다 차지하였다]
이것이 초기의 상황이 된 것이다. 이 때는 나라를 세운 지역이 말갈인들의 지역이기 때문 에 피지배층에 말갈인들이 많았다. 그러나 인구는 약 50만 명(10여만 호)밖에 되지 않았고 오히려 대조영이 끌고간 군인들이 수 만명이나 되었던 것이다. 당시 이때 나라를 세우러 몰 려간 고구려인들이 지배충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발해는 급속히 팽창하였고, 안동도호부가 요동을 떠나 요서로 이동했을 때는 요 동반도를 포함한 고구려의 땅은 모두 발해로 편입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자료를 가지고 발해의 주민 구성을 논의할 수는 없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