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벼농사는 대륙에서 건너온 도래인의 것이나 그것이 꼭 한반도일 수는 없으며, 중국, 러시아, 태평양 등 경로는 다양하다.
2. 벼농사 전파 직후 일본에 벼농사가 전국적으로 퍼진 것은 이미 일본인들이 벼농사에 대해 익숙하였기 때문이다.
3. 벼농사는 중국 강남지방에서도 직접 규슈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었고, 중국농법을 일본인들이 알고 있었다.
일본의 권위 있는 학자들, 예를 들어 일본 기마민족설로 유명한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와 일본문화 기원론의 고쿠부 나오이치(國分直一), 오키나와를 일본민족의 박물관론으로 구성한 도리고에 겐자부로 등이 한결같이 주장하는 것은 왜인의 기원은 일본 열도가 아니라, 진(秦)나라대에까지 양자강 유역과 산동반도 등에 흩어져 해상무역을 하던 집단이라는 점이다.
이런 왜인들은 후에 한(漢)나라의 남하정책에 따라 중국남부, 한반도, 그리고 일본 열도로 흩어지게 된다.
왜인의 정체에 대해서는 중국 고대 인문지리서 <산해경>이 처음 언급하고 있다. 진한(秦漢)기에 걸쳐 저술된 <산해경>에는 “개국(蓋國)은 거연(鉅燕)의 남쪽, 왜의 북쪽에 있으며, 왜는 연에 속한다”라고 설명한다.
중국의 사서들이 ‘왜인은 얼굴에 문신을 한다’고 언급한 풍습 역시 양자강 이남의 중국 남방 민족들에게 흔했다는 점도 지적된다.
에가미는 ‘왜가 연에 속했다’는 산해경의 기술은 화중·화남의 왜인들이 연나라에 무역을 하기 위해 들어갔던 것이라고 추정한다.
에가미는 원래 왜인이 중국 강남에 기원을 두고 여러 지역에서 활동하는 해양민족이었다가, 1세기 이후에는 일본에 정착된 무리만이 왜인으로 불리게 됐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