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론의 반박 >
첫 번째, 위나라 경초 문제
호랭이해님의 반론대로 위나라 경초 연간은 서기 237년~239년입니다. 저는 앞서 글에서 <삼국사기> 백제본기에서 백제의 고이왕이 낙랑군을 침입한 기록이 <삼국지>에서 마한의 신지가 대방군을 공격해 대방태수 궁준을 죽인 것과 같은 기록이라는 것을 밝혔습니다.. <삼국사기>에서 고이왕이 낙랑군을 공격한 시기는 서기 246년입니다. 그런데 <삼국지>에서는 이 사건이 경초 연간, 즉 서기 237년~239년에 일어난 일이라고 했습니다. 같은 사건인데 연도가 대략 7년에서 9년 정도라는 매우 긴 차이가 나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건 논쟁을 할 가치도 없습니다. <삼국지>의 기록을 잘 보면 마한의 신지가 대방군을 공격하여 대방태수 궁준이 전사한 시기가 서기 237~239년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삼국지>의 다른 기록을 보면
<삼국지> 정시 6년(245)에 영동[단단대령의 동쪽]의 예가 고구려의 지배 아래 들어가자, 낙랑태수 유무와 대방태수 궁준은 군사를 일으켜 공격했다. 불내후(不耐侯) 등은 수하의 마을을 들어 항복했다.
위의 기록을 보면 정시 6년에 낙랑태수 유무와 대방태수 궁준이 영동의 예를 공격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정시는 위나라 명제 조예의 4번째 연호입니다. 그리고 정시 6년은 서기 245년이고요. 이 기록을 보면 대방태수 궁준이 서기 245년에 멀쩡히 살아남아 예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마한의 신지가 대방군을 공격한 것과 대방태수 궁준이 죽은 것은 서기 237년~239년에 일어난 사건이 아닌 겁니다. 문제의 <삼국지> 기록을 다시 보죠.
<삼국지> 위나라 경초 연간(237~239)에 명제는 몰래 대방태수 유흔 · 낙랑태수 선우 사를 보내 바다를 건너 2군(郡)을 평정하고 여러 한국(韓國)의 신지(臣智)들에게는 읍군의 인수를 더해 주고 그 다음 사람들에게는 읍장이란 벼슬을 주었다.
부종사 오림이 낙랑에서 원래 한국(韓國)을 관할했다는 이유로 진한의 8개의 나라를 분할하여 낙랑에 주려고 했는데 통역하는 관리가 말을 잘못 옮겼다. 그러자 신지가 한(韓) 백성들을 격분시켜 대방군의 기리영을 공격했다. 대방태수 궁준과 낙랑태수 유무가 군사를 일으켜 이를 정벌하였는데, 궁준은 전사했으나 두 군은 마침내 한(韓)을 멸망시켰다.
즉, 위에서 본 <삼국지>의 기록에서 밑줄을 안 친 부분은 경초 연간인 서기 237년~239년에 일어난 일이 맞습니다. 밑줄을 친 부분은 서기 237~239년에 일어난 일이 아닌 겁니다. 그러므로 이 기록이 <삼국사기>와 연도가 매우 오차가 난다며 두 기록이 서로 다른 사건이라고 말하는 것은 사료를 잘못 읽은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위나라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저는 이를 고구려와 백제의 협력으로 반박하고자 합니다. 앞서 글의 <송서>의 기록을 보면, 고구려와 백제가 협력했다는 뉘앙스가 느껴지지요. (나만 그런가?)
당시, 고구려는 유주자사 관구검에 의해 수도인 환도성이 함락되고 고구려의 왕인 동천왕이 피난을 가는 위기를 겪었습니다. 그 상황에서 백제를 이용해 위나라의 후방을 공격할 수 있다면 고구려로서는 기회 중에 기회이지요. 마침 그 당시 유주자사 관구검이 낙랑태수 유무, 대방태수 궁준과 함께 고구려를 치기 위해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로 떠났으니 유주는 평소보다 방비가 허술해졌습니다. 그러니 백제로서도 유주에 속한 낙랑, 대방을 치는데 부담이 없습니다. 더구나 위나라 중앙에서는 중원통일을 위해 오나라, 촉나라에 주로 신경을 쓰고 동북쪽은 기껏 해봐야 고구려에 신경을 쓰는 정도였습니다. 결국 이런 조건이 다 맞아떨어져 백제는 고구려와의 적극적인 협력 아래 유주자사 관구검과 낙랑태수 유무, 대방태수 궁준 등이 고구려를 치는 사이에 낙랑, 대방을 기습한 겁니다. 왜냐하면 고구려의 동천왕, 백제의 고이왕 이전에도 <삼국사기>에서 태조대왕 69년,70년(서기 121년,122년)에 고구려와 백제의 협력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기록들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의 논증에는 딱히 문제될만한 것이 없습니다. 이로써 기리영 전투에 대한 글을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