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급이 나빠서 잘 싸울 군대는 없고,
나폴레옹, 히틀러의 러시아(소련) 원정이나, 이 땅에서 벌어진 살수, 귀주대첩 모두
보급문제에서 상당부분 기인한 것이라,
임란때 해상수송이 불가한 점이 일본의 패인이 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해상수송의 불가 = 패인' 이렇게만 볼 수 있는 가에 대한 다른 시각입니다.
소서행장이 1592년 6월 평양성에 입성하면서, 평양성에 10만석이 있었습니다.
의병 때문에 보급로가 차단돼 보급이 어려워서? 이건 해당이 안 된다 그겁니다.
부산에서 평양까지 식량을 보급할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보급때문에 전진 못했다.. 이건 말이 아닙니다.
의주에 있는 조선 조정을 개전초 할 수 있었음에도 무력화 시키지 않은 것이 패인입니다.
분조가 있다 하더라도 독려의 차원이지, 세수나 보급같은 나라 전체 돌아가는 상황은
의주에서 선조와 신하들이 결정할 사안이라.
평양성 공격할 때 조선군 병력을 보면, 의주의 조선군 병력은 1만 정도로 보는 것이 타당하고,
그 3배수 정도 왜군이라면 의주를 점령해서 선조를 명으로 망명시킬 수 있고.
함경도에서 임해군, 순화군이 잡히는 마당에 분조가 의주조정처럼 전쟁을 총 지휘할
인력과 공간이 없습니다.
의주조정은 조선군이 버티고 있는 상황이라 베이스 역할을 한 것입니다.
막상 왕이 중신들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했다면, 조선에 남은 의병이나 저항세력이
힘 빠지는 것은 어쩔 수 없고.
전쟁 초기에 의주 외에 점령못한 전라도지역, 저항이 있던 함경도지역 외에
보급로에서 기다리다 왜군을 치는 의병은 있지만,
왜군과 정면 대적할 군대라는 것이 조선에 없는 상황이라..
한 3만 정도 의주로 보내서 조선조정을 압록강 밖으로 내보냈어야 했습니다.
상인출신으로 온건파이자 협상파인 소서행장이 평양 선에서 대충 전쟁을 수습하자는 입장이어서,
북진에 열의가 없었는 지..
아니면 아는건 섬안의 전국시대 전쟁이라.
한성 찍어놓고 평안도, 함경도 찍었으니.. 조선 왕은 알아서 찌그러 질거고,
시간이 흐르면 백성은 왜군을 따를 것이다..
이런 오판을 해서 평양에 식량이 10만석이나 있었음에도 의주에 조선 왕을 방치한 것일 수 있겠습니다.
이거는 보급의 문제가 아닙니다.
국가 대 국가의 전쟁을 해보지 못하고,
섬 안에서 영주들끼리 땅따먹기 하던 왜군 자체의 판단미스로
왜군의 실책이자 대외전쟁 경험부족 탓입니다.
4월에 전쟁 시작해서 5월에 한성 점령하고 6월에 평양까지 점령했으면.
좀 있음 추수기입니다.
왜군이 각 고을까지 세수를 확보할 지방관을 보낼 처지는 아니었으나,
마을별로 할당하는 식으로 얼마 식량 내라는 식으로 나갈 방법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또 개전 초기에는 주민들을 그렇게 학살하거나 막 대하지 않았기에,
피난을 떠나서 식량을 징발할 방법이 없다거나..
이것도 적당히 운영의 묘를 발휘하면 굳이 모든 식량을 일본서 보내 부산에서부터 육상수송할
필요가 없습니다.
바다가 이순신에 막히고 육상보급이 의병이 막혀도,
적당히 타협해서 추수기인 9월 현지 징발할 수도 있었습니다.
조선군대가 의주에 있고, 함경도가 시끄러웠긴 했지만 거기가 곡창지도 아니고.
주둔한 지역에서 적당히 징발해서 추수기가 곧 돌아오기에 유지할만 했습니다.
왕까지 망명한 상황에서 명나라 군대가 조선에 들어가기도 참 버겁고.
3만 동원에서 의주 치고, 3-4만 군세로 충청에서 전라쪽으로 천천히 들어간다면.
추수기까지 아니면 겨울이 오기까지 전라도 상당지역을 점령할 수 있었습니다.
고바야카와 1개 군만 전라도로 보내니 깨지지..
지속적으로 3-4만 군세면 전라도를 점점 점령해나갈 수 있죠.
그럼 여수의 전라좌수영도 갈 곳이 없습니다. 남서해안 섬으로 가야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조선수군에서 유일하게 남은 이순신함대가 떠난 그 만큼 왜군의 해상보급로도 같이 길어지는 것입니다.
히틀러는 강력한 적과 마주하면서 보급의 문제가 있었고,
나폴레옹은 광활한 땅에 추위와 상대했고.
임란때 일본은 6월에 평양에 입성하고 최전방에 10만석이라는 덤까지 없는 행운이 있었음에도,
섬에서 하듯 적의 수도와 영지만 지키고 버티면 백성은 알아서 따른다는 생각으로,
가장 유리한 시기를 날려버렸습니다.
대외 국가대 국가 전쟁에 무지했고,
전국시대 일본 영지에서처럼 강압적이지 않고 적당한 선에서 현지징발하는 방법도 몰랐습니다.
임란을 자세히 보면, 왜군의 패인을 무조건 보급로가 막혔다고만 볼 것이 아닌 것 같네요.
평양의 10만석을 이용해 조기에 의주 조정을 압박해 조선 왕을 명으로 망명시켜
조선 내 저항의 불씨를 끄고,
조선의 신분제 병패를 이용해서 현지를 수습해
현지 징발을 무난히 처리하고, (함경도에선 왜군에 협조자까지 나왔죠)
전라도 지역을 코바야키와 7군 15,000 정도가 아닌,
3-4만 정도 군세로 장기적으로 공략을 해서 좁혀갔다면..
딱히 부산서 서울 평양까지는 육상 보급로나, 해상보급에 사활을 걸 일은 없었을듯 합니다.
히틀러의 독, 소 전쟁처럼 전선을 따라 항시 위협하는 적 주력이라는 것이 없었기에,
'운영의 묘'라는 부분에서 왜군이 패착을 많이 한 전쟁 같습니다.
분조가 있기는 했지만, 왕조 국가에서 왕이 있고 없고는 저항하는 데 큰 힘이 되거나,
맥이 빠지거나 큰 차이가 있죠.
왜군이 전쟁경험이 많긴허나,
섬에서 다이묘간 땅따먹기에 익숙해, 임란처럼 밖에 나가서 국가대국가 전쟁을 해본 경험이
없었던 점도 패인이네요.
다이묘 영지 하나 따먹는 법은 알았지만,
개전초기 좋은 기회가 있었지만, 한 나라 전체를 어떻게 점령하는 지를 몰랐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