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란이 일어날 무렵만 해도 신립은 당시 명실상부한 조선 최고의 소드마스터로 명성을 떨쳤습니다.
니탕개의 난 당시에 신립이 지휘한 조선군은 비록 병력수는 적지만
신립과 오랜기간 손발을 맞춰온 졍예기병이었고
(당시 6진의 병력은 조선전체에서 정예병력이었고, 6진병력 가운데서도 신립의 병력은
정예 가운데 정예였으니,
오늘날로 치면 6진에는 한국군 가운데 비교적 정예인 해병대나 특전사가...
신립이 거느린 병력은 해병대나 특전사에서도 추리고 추린 해병특수수색대나 707특임대 급이랄까...)
그런데 반란을 일으킨 여진족들은 주로 이전까지 조선에 예속되었던 번호들이었는데,
비록 반란군 전체규모는 1만 단위를 넘었지만, 여러 잡다한 부락들이 참여하여 통일성과 명령계통이
일원화되지 못했고, 무엇보다 이들 반란에 참여한 번호들의 결정적인 취약점은 자기부락에게 미치는
위험도와 손실은 최소화하면서도 떡고물은 크게 떨어지는 약탈,납치에는 적극적이었지만...
큰 손실이 예상되는 조선관군 등 무장병력들과의 전투는 상대적으로 소극적으로 임했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경원성전투와 같이 성안팎의 대부분을 장악했으면서도, 소수의 조선관군이 버티고 있는 손바닥만한
면적의 관아에는 공격을 회피하는 소극적인 경향을 나타냈고, 이와 비슷한 전투양상이 여러차례 연출됩니다!
이와는 반대로 임란 당시 신립의 처지는 비록 휘하 병력규모는 대략 8,000명 수준으로
니탕개의 난보다 월등히 많다고는 하지만... 한양에서 거느리고 내려온 소수의 군관들과 경군 일부를
제외하고는 병력의 대부분이 충청지역에서 급조된 오합지졸에 불과했습니다.
반면 충주전투 당시의 일본군은 조선군보다 병력규모가 2배에 달하는데다
실전경험이 풍부하고 니탕개의 난 당시의 번호들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의 조직화된
병력이었습니다. 물론 일본군 또한 임란 시기를 거치며 다이묘휘하별로 또는 각 군별로
시기와 반목 비협조를 연출하기도 하지만...
그리고 결과적으로 직접 부딪히지는 않았지만.. 당시 병력손실을 거의 겪지 않은 2군 가토 키요마사의 병력이
충주로 접근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만약 신립의 조선군이 1군 코니시군의 예봉을 꺾었다 하더라도
얼마지나지 않아 기진맥진한 상태로 가토의 제2군과 맞부딪히게 되므로... 이러나저러나
충주전투에서 최종적인 승리를 거두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신립은 수도를 지키겠다는 생각에 무리한 면이 있습니다.
가장 좋은수는 백성과 임금을 피난시키고 수도를 내준후,
북쪽에 배치되 있던 병사들과 합세해 싸우는 것인데요.
임금을 피난시키고 수도를 내준다는게 신립 혼자서 결정할수 있는것도 아니고,
그시대 정서에도 어긋나지만.
조금 더 유연성을 발휘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은 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