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2년 음력 4월 28일
탄금대 전투
3일전인 음력 4월 25일 있었던
상주전투가 허망하게 패전하고 경상도가 완전히 적의 손에 넘어갔다
도순변사 신립은 조선 팔도의 마지막 희망이었다
도순변사 신립,
자타공인 조선 최강의 맹장으로 칭송받던 그는
북방에서 여진족과의 싸움에서 엄청난 활약상을 쌓아왔으며,
조선 건국이래 최고의 위협이었던 여진족 니탕개의 난도
큰 공을 세우며 진압하는 등 선조의 총애도 한 몸에 받던 장수였다
1591년, 왜의 침공 분위기가 조선을 무겁게 짓누를때
비변사와 신립은 조선 수군을 폐하고 육군을 집중 육성하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유는 왜구들은 수전에 강하고 육전에 약하다는 이유였다
흐르는 역사를 모두 알고 있는 현대인들은 이는 완전히 잘못 짚은 것을 알고 있지만
당시 비변사와 신립의 판단은 정당했다
을묘왜변 당시, 판옥선이 아닌 맹선을 주력으로 사용하던 조선 수군은
재빠른 왜구들의 선박들을 따라잡지 못했으며, 소규모 교전에서도 계속해서
피해를 강요받았었다
하지만 왜구들이 상륙했을때는 조선육군이 왜구들을 압도하였었다
후에 개발된 신형 전함 판옥선 역시 흥양왜변에서 별다른 성과를 보이지 못한 것이
이런 판단에 더욱 부채질을 가하였다
따라서 비변사와 신립은 수군을 폐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지만
당시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이순신의 극렬반대로 인해 겨우 무산되었다
이렇듯 신립의 전략 전술에 대한 시각은 순변사 이일보다도 못한듯 보였지만,
그 무력만큼은 조선 최고임은 그 누구도 부정하지 못하였다
허나, 이번의 상대는 한낱 왜구들이 아닌 10년여간의 경험을 쌓은 노련한 왜군이었다
1592년 음력 4월 28일
탄금대 전투
3일전인 음력 4월 25일 있었던
상주전투가 허망하게 패전하고 경상도가 완전히 적의 손에 넘어갔다
도순변사 신립은 조선 팔도의 마지막 희망이었다
도순변사 신립,
자타공인 조선 최강의 맹장으로 칭송받던 그는
북방에서 여진족과의 싸움에서 엄청난 활약상을 쌓아왔으며,
조선 건국이래 최고의 위협이었던 여진족 니탕개의 난도
큰 공을 세우며 진압하는 등 선조의 총애도 한 몸에 받던 장수였다
1591년, 왜의 침공 분위기가 조선을 무겁게 짓누를때
비변사와 신립은 조선 수군을 폐하고 육군을 집중 육성하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유는 왜구들은 수전에 강하고 육전에 약하다는 이유였다
흐르는 역사를 모두 알고 있는 현대인들은 이는 완전히 잘못 짚은 것을 알고 있지만
당시 비변사와 신립의 판단은 정당했다
을묘왜변 당시, 판옥선이 아닌 맹선을 주력으로 사용하던 조선 수군은
재빠른 왜구들의 선박들을 따라잡지 못했으며, 소규모 교전에서도 계속해서
피해를 강요받았었다
하지만 왜구들이 상륙했을때는 조선육군이 왜구들을 압도하였었다
후에 개발된 신형 전함 판옥선 역시 흥양왜변에서 별다른 성과를 보이지 못한 것이
이런 판단에 더욱 부채질을 가하였다
따라서 비변사와 신립은 수군을 폐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지만
당시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이순신의 극렬반대로 인해 겨우 무산되었다
이렇듯 신립의 전략 전술에 대한 시각은 순변사 이일보다도 못한듯 보였지만,
그 무력만큼은 조선 최고임은 그 누구도 부정하지 못하였다
허나, 이번의 상대는 한낱 왜구들이 아닌 10년여간의 경험을 쌓은 노련한 왜군이었다
음력 4월 26일
북방에서부터 따라온 신립 장군 직속의 정예 궁기병대와 한양에서 지원받은 병력이 도합 8천
남하하며 꾸준히 모병한 병졸의 수가 대략 8천
총합 1만 6천의 대군이 충주에 도착하였다
이는 당시 조선이 전쟁 발발 초기 수십일 안에 가용할 수 있는 최대의 병력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었다
종사관 김여물이 지형이 험한 조령(문경새재)에서 싸울 것을 권했으나
신립은 자신의 기병대가 충분히 활약할 수 있도록,
산세가 험한 조령이 아닌 충주성 옆의 평야지대인
달천 평야를 격전지로 선정하였다
그가 이런 결정을 내린 이유는 기마대의 활약을 기대한 것도 있지만,
조령(문경새재) 이외의 진격로 역시 왜군의 위협을 받고 있었으므로
그로서는 최대한 단기간에 고니시 유키나가의 군세를 깨부수어
방어작전에 시간을 크게 할애하지 않고,
다른 왜군 부대를 요격하려 하였기 때문이다
근세시대의 기마병과 일반 보병의 전력비는 약 3:1
대부분의 병력이 보병이었던 왜군과 비교해보면
겉으로 보기엔 조선군의 우세였다
일반적이라면, 그리 틀린 판단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결국 틀린 판단이었다
달천평야는,
질척질척한 논두렁이었다
거기다가 왜군이 조령을 넘었다는 보고를 올린 군관을
그냥 처형해버렸다는 기록 또한 존재한다
왜군이 다른 진격로를 통하여 충주로 진입하여
포위될 것을 걱정하던 자가 저질렀다고 보기엔 이상한 일이었다
이는 상주전투에서 이일이 어쩔 수없이 농민을 처형한것과는 대비되는
이해할 수 없는 처사였다
거기다가 자신의 선배이자, 상주에서 왜군과 직접 마주친
순변사 이일의 조언을 싸그리 무시한다
이일은 북도 제승방략제를 재정리하는 등 전략 전술에도 조예가 깊었고
실력 또한 자신과 비등하면 비등했지
결코 부족한 자가 아니었던 만큼 결코 이일의 조언은 무시할 수 있는 조언이 아니었다
그 실력과는 별개로,
굉장히 거칠고 오만했다는 신립의 성격이 증명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