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서 고도문명(근대문명)이 일어나지 않은 이유
춘추전국시대, 삼국시대를 거쳐 중국은 서진제국 시대가 되었다. 서진은 부패와 타락의 극한점에까지 이른 제국이었다. 그러나 그때까지 중국은 역사진보의 도상에 있었다. 그런데 행운으로 하여 천년 세월에 걸쳐서 그때까지 발전한 중국문명도 주변의 호전적인 야만족에 의해서 마침내 뿌리째 뽑혀져 나가게 되고 만다. 다행히 중국을 정복한 야만족은 중국 문명을 소돔과 고모라처럼 완전히 파괴시키지는 않았다. 부패와 퇴폐로 병든 서진의 세상을 개조하여 건전한 정신의 세상으로 만든 면도 있기는 했다.
구미의 사상가들은 중국을 가르켜 진보를 못하고 ‘다람쥐 쳇바퀴 돌 듯’이만 하는 정체된 문명국가라고 한다. 그러나 동서양 할 것 없이 역사상 국가들의 태반이 그러했다. 구미인이 그토록 찬미하는 그리스 국가도 마찬가지였다. 근대 유렵국가 단 하나의 문명권만이 행운으로 하여 높은 단계로 발전하는데 성공했을 따름이다.
서진시대 이후 이민족에 의해서 문명이 뿌리째 뽑혀져 나가버린 중국은 세월이 흐르자 다시 진보의 도상에 오르게 된다. 어떤 역사가는 송나라 말과 명나라 말에 다시 자본주의의 맹아가 싹텄다고 한다. 송나라와 명나라는 부패하고 타락하여 멸망했다. 그러나 그것은 한 차원 높은 단계로 올라가기 위한 과정, 곧 새가 알을 깨고 나오는 과정일 뿐이었다. 그런데 주변 이민족에 의해서 중국은 다시 그때까지 발전시킨 문명이 뿌리째 뒤흔들리게 되어서 발전이 정체되고 말았다.
명나라는 임진왜란 때 부패 타락이 극에 달해 내란으로 붕괴되기 직전이었다. 그러나 내란은 역사진보, 문명발전의 한 과정이며 자신의 문명 자체를 뿌리째 뽑아내 버리지는 않는다. 명나라가 주변의 호전적 야만족인 청나라에 정복되었기에 문명이 뿌리째 뽑혀져 나가게 된 것이다. 동양문명이 서양문명을 앞설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그때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런데 명나라는 어째서 자신보다 백배나 약한 국력의 청에게 정복당하고 말았는가. 사실 청나라는, 내란으로 아무리 허약해져 있었다고 하지만 백배나 국력이 강한 나라인 명을 결코 정복할 수가 없었다. 역사연구가들은 청이 명을 정복할 수가 있었던 것은 일본과의 칠년전쟁으로 인하여 명의 국력이 극도로 쇠잔되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렇지 않아도 부패와 내란으로 침체해 있는 명이 세계 최강인 일본군과 칠년 동안이나 싸웠으니 어떠하였겠는가.
명나라에서 싹튼 고도문명의 맹아를 짓밟아버린 사람은 누루하치가 아니라 히데요시였다. ― 누르하치의 청은 명을 멸망시켰으나 병든 정신의 중국을 건전한 정신의 중국으로 만든 면도 있다. 히데요시는 유럽의 고도문명(근대문명) 새싹을 짓밟아버리지 못하였지만 고도문명 새싹을 짓밟아버린다는 목표는 어쨌든 이룩한 셈이다. 그는 명의 고도문명의 맹아뿐만이 아니라 조선의 것도 짓밟아버렸다. 그때 조선에서도 고도문명이 발아하고 있었다.
조선 초 과학 문명은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외래 민족에게 정복됨이 없이 한 문명이 수천 년 간 지속된 국가는 세계역사에 한국밖에 없다고도 한다. 한국은 끊임없는 외침을 받았지만 이민족에 의하여 완전히 정복되지는 않고 신라, 고려, 조선으로 수천 년 동안 문명이 지속되었다. ― 역사진보 법칙상 조선에서 고도문명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실제로 조선 초기에 고도문명이 발아하였던 것이다.
세종시대 문명은 세계최고 수준이었다고도 한다. 그처럼 높은 수준은 중국에서는 전설상의 시대인 요순시대가 있었을 뿐이라고 한다. 조선 초 과학문명 수준은 높아서 중화기 분야에서는 근대문명이 벌써 발아한 유럽수준을 넘어섰다. 세종 시대 그처럼 과학이 발전한 것은 원나라를 통하여 아라비아 문명이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물론 조선 초 과학문명은 실용적인 것이었지 그리스 수학과 논리학의 뒷받침이 없는 것이라 모래성 같은 것이기는 했다.
그러나 과학문명은 그런 과정을 통해서 발전해가는 것이다. 유럽에서 그리스 수학과 논리학을 뒷받침으로 하는 근대문명이 마침내 꽃피게 된 것도 그런 과정을 거친 것이었다. 게르만 국가는 원래 그리스와 같은 대륙의 국가였다. 그러나 게르만인은 그리스 수학과 논리학, 곧 고급문명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대신 먼 지역에 있는 로마제국을 정복하여 저급 문명을 받아들였으며, 로마문명을 소화한 다음에도 여전히 그리스 문명은 어려워서 받아들이지 못했다. 아리비아 문명권이 어느 정도 소화시켜 먹여주자 그때서야 게르만인은 그리스 수학과 논리학을 겨우 소화 흡수하여 고도문명(근대문명)을 이룩한 것이다. 게르만제국은 그리스 문명을 천년세월에 걸쳐서 받아들였다. 끊임없이 주변민족과 투쟁을 벌이면서 살 수밖에 없었던 게르만인의 지적 수준으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조선인의 경우는 사정이 달랐다. 물론 특별히 머리가 좋아서가 아니고 행운으로 하여 수천 년 세월동안 자기문명을 보전할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인은 그때 그리스 수학과 논리학을 받아들일 수 있는 지적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 조선은 아라비아와 지구 반대편에서 마주하고 있는 나라이다. 그런데도 아라비아 문명의 파편이 들어오자 바로 세계 최고 수준의 실용적 과학문명을 이룩했다. 다시 그리스 수학과 논리학이 들어오고 조선인이 그것을 소화흡수하여 고도문명(근대문명)을 꽃피우는 것은 단지 시간의 문제였을 따름이었다. 물론 그 이전에 조선 문명이 이민족에 의하여 뿌리째 뽑혀져나가는 일이 발생하지 않는 경우의 이야기이다.
조선은 타락과 부패의 극에서 임진왜란을 맞았다. 그러나 그런 현상은 문명발전의 한 과정이었다. 춘원 이광수가 자신의 ‘이순전’전에서 조선시대를 얼간이 임금과 간신무리 관리들, 얼뜨기 백성들이 어우러진 절망적 시대로 묘사한 것은, 분명히 그런 점이 있기는 하지만, 옳은 것이 아니었다. 이광수는 조선장수들은 비겁하게, 일본장수들은 의젓하게 묘사했는데 사실이 그러하기도 했다. 그러나 비겁함은 타락한 문명인의 속성이고 의젓함은 호전적인 야만인의 속성이기도 했다. 이광수는 평면적 시각에서 그 시대를 보았다. 그는 임진왜란 이후 조선시대 모습에 너무 사로잡혀 있는 사람이었다. 문명발전 역사를, 우주 법칙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신은 공평한 것인가. 그때까지 세계역사에서 특별하게 수천 년 간 지속한 조선 문명도 이윽고 뿌리째 뒤흔들리게 되고 만다. 조선 한반도 땅이 호전적인 이민족에 의해서 완전히 정복된 것은 아니지만 중국, 일본, 한국 삼국의 전쟁터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조그만 나라가 세계최대 국가인 명과 최강군의 국가인 일본 간의 칠년전쟁 터가 되고 말았다. 인구는 반의 반으로 줄고 산천은 폐허가 되었다. 비록 일본군이 물러났다고는 하지만 수천 년 세월에 걸쳐서 겨우 이룩한 문명은 뿌리째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조선은 세계 여타 문명권이 그랬듯이 원점으로 돌아가서 다시 시작할 수밖에 없게 되어 버린 것이다.
임란 후 조선에는 역사진보에 불리한 점이 또 있었다. 진보를 위해서는 내란이라도 일어나 부패한 이씨 왕실이 전복되고 새 왕조가 들어서야 하는데 그렇게 되지도 않은 것이다. 임진칠년전쟁은 명과 일본에 내란이 일어나 왕조가 바뀌게 하였는데 조선에서만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내란이 일어나 왕조가 바뀌는 일이 조선에서는 일어나지 않은 것은 몇 가지 원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칠년전쟁 터가 되었기에 전체 인민이 빈사상태에 빠져버려 내란을 일으킬 인물들이 일본과 명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적을 수밖에 없었고 더하여, 당시대 고도수준이었던 조선 관료제가 내란을 일으킬 요주의 인물들을 전쟁이 끝나기 전에 모조리 제거시켜버렸다. 또한, 조선왕실의 권위는 땅바닥으로 떨어졌지만 수십 배 국력의 명제국이 뒷받침하여 주고 있는 상황 때문에 조선 민중이 조선왕실에 반항할 엄두를 못 내는 것을 지식인들이 알았다. 그래서 조선에서는 왕조가 바뀌지 않게 된 것이다.
조선은 정묘병자호란이라는 국가적 재난을 다시 당하게 된다. 이에 이르러서는 수천 년 세월에 걸쳐서 축적된 문명이 완전히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누가 그리스 수학과 논리학을 반소화시켜 먹여준다고 해도 소화흡수시킬 수가 없는 빈사 상태에 빠져버리게 되고 말았다. 이렇게 해서 조선에서 발아하던 고도문명(근대문명)도 고사하고 만 것이다. 히데요시는 고도문명 파괴 욕구본능을 조선에서도 만족시킨 셈이다.
임란이 끝나고 오십년이 지난 후에도 조선의 인구는 조선 초의 삼분의 일에 불과했다고 한다. 임진왜란은 글자 그대로 조선의 인구가 반의반으로 줄게 만든 대재해였다. 그것은 이민족의 완전정복, 파괴를 능가하는 재해였다. 조선인의 우아성은 사라지고 추악성만 남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