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글은 예전에 제가 다른 사이트에 올렸던 글입니다.
뭐 개인적 취향으로 무력으로 영토를 넓히고 일부 귀족과 군벌들이 설치던
시기를 더 높게 보는 사람도 있을수 있지만 국가의 융성이란걸 단지 군사적 힘으로
만 판단할수는 없다고 봅니다.
중국사에 明君이라고 하면 누가 있을까?
삼황오제시대 말고 역사적으로 검증된 시기만으로 한정해 보면
한고조 유방, 한무제 유현, 당태종 이세민, 명성조(영락제) 주체, 청성조(강희제)애신각라현엽
등등을 꼽는 사람이 많을꺼다.
송나라를 세운 송태조 조광윤을 꼽는 사람은 별로 없을거 같다.
통일 왕조 가운데 국력(군사력)이 가장 약했던 宋史 자체가 별로 주목받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제위기간이 너무 짧아서일수도 있고, 제위를 아들이 아닌 동생에게 물려줌으로써 송나라 역대 황제들의 직계조상이
아니었기 때문일수도 있고 등등 이유는 많을꺼다.
아무튼 송태조 조광윤은 기본적으로 혼란의 오대십국 말기에 보기 드믄 성인군자 스타일이었다.
그를 성인군자스타일 이라고 하는데는 몇가지 이유가 있다.
1) 후주의 마지막 황제인 7살 먹은 공제 시종훈으로부터 "진교의 변"이란 쿠테타로 선양을 받아 제위에 오르게 되나
끝까지 시종훈을 죽이지 않고 보호해주었다. 단지 시종훈 한 사람 만을 보호 한것이 아니라 시종훈의 후손 대대로 특별한
작위를 내려주고 송나라가 망하는 날까지 보호해 주었다.
수호지에 나오는 소선풍 시진이 태조로부터 하사 받은 집안의 보검이라고 내밀면 관리들이 꼼짝 못하는 장면이 있는데
소설에서는 시진이 바로 이 시종훈의 후예로 묘사되었기 때문이다.
태조 이성계와 태종 이방원이 왕씨들을 어떻게 처리했는지 생각해보면 조광윤의 이런 배려는 더욱 돋보인다고 할수 있다.
2) 공신들을 단 한명도 죽이지 않았다.
토사구팽이란 속담이 있다. 토끼를 잡고나서 더 이상 쓸모없어진 사냥개를 삶아 먹는단 얘기다.
명태조 주원장이나 한고조 유방, 태종이방원 등이 공신들을 피비린내 나는 숙청으로 제거해버린거에 해당되는 얘기다.
왕권강화를 위해 이제는 거추장스러운 존재가 된 공신들을 제거하는거 어찌보면 너무나 당연한 수순일수도 있다.
설령 공신들을 제거하지 않더래도 역으로 공신들에게 놀아나 군주 노릇 제대로 못해버리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조광윤은 피의 숙청으로 공신들을 제거하지도 않았고, 공신들에게 놀아나 왕권을 내팽겨 치지도 않았다.
조광윤은 역사상 거의 유일한 예인데 자신을 황제로 옹립한 제장들을 불러모아 눈물까지 보이며 진솔하게 상황을
설명하고 설득해 장수들이 스스로 군권을 내놓고 물러나게 만들었다.
3) 효성이 지극했으며 형제간에 우애가 두터웠다.
홀어머니를 극진히 공경해 죽기전까지 단 한번도 어머니의 말을 거스르지 않았다.
동생 조광의를 극진히 아껴서 동생이 아파 쓰러져 있자 눈물을 흘르며 옆에 누워 함께 침과 뜸을 맞았다.
4) 어린 아들 대신 동생 조광의에게 제위를 물려준다.
이게 별거 아닌거 같지만 자기 욕심을 버리고 나라의 안정을 더 우선시 한거 결코 쉬운 선택 아니다.
5) 부하장병들 최말단 사병까지 극진히 아끼고 사랑했다. 보초서는 사병들에게 자기 옷을 덥어주거나 한 일 등은 역사상 별로 비슷한 예가 없을 정도다. 물론 조조가 병사들을 아꼈다는 기록이 많지만 어디까지나 법가적인 입장에서 전략적인 입장에 기반한 거고 춘추시대 오기가 병사의 고름을 입으로 빨았다는 얘기도 치밀한 계산상의 일로 보이는데 비하여 조광윤에 대한 각종 기록이나 야사의 모습은 그런 차원을 넘어섰다고 볼수있다.
이렇듯 기본적인 성품이 성인군자 스타일이라고 밖에는 말할수 없다.
아무튼 얘기를 돌려서 5대의 마지막 왕조 후주 얘기 부터 해보자.
풍도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후주를 곽위가 세웠다는 얘기를 했었다.
곽의는 후사가 없어 시영을 양자로 삼았는데 곽위가 죽고나서 34살의 영민하고 야심만만한 시영은 후주의 세종으로 제위에 오르게 된다.
시영의 목표는 바로 천하통일이었다.
구체적으로는 각지에 할거한 지방 정권들을 통일하고 연운16주등을 차지하고선 호시탐탐 중원을 노리는 거란을 몰아내는 일이었다.
풍도는 시영의 야심찬 목표를 허무맹란한 것으로 봤다. 그래서 전쟁을 일으키는 것을 반대했다.
그러나 이 젊은 황제 시영은 단숨에 남당을 굴복시키고 북한을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으며 거란을 몰아내기 까지 한다.
이런 정벌 때마다 최일선에서 뛴 장군 가운데 하나가 바로 조광윤이다.
시영은 매우 영민하고 훌륭한 군주였고 조광윤은 일선 사령관으로써 부족함이 없었기에 천하통일은 이제 시간 문제인듯 보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시영은 급사하고 만다. 이에 시영의 아들 시종훈이 7살의 나이에 제위에 오른다.
조광윤은 이러한 시기에 요나라와 싸우기 위해 출전했다가 진교에서 제장들의 추대를 받고 쿠테타를 일으켜 황제가 된다.
비록 그 통치 기간이 짧았지만 당나라 말기 절도사들에서부터 5대10국의 혼란기 까지 줄곳 유지되온
군인들의 지방에 대한 무단통치를 종식시켜 백성들의 고통을 경감시켰으며 문치주의를 확립해 실질적으로 중국 역사상 최초라 할수 있는 과거제를 만들어 이 후 중국과 한국의 전통이 된 철인=학자=관료 시스템을
만들었다.
피를 흘리지 않고도 지방군벌들과 공신들의 군권을 차근 차근 빼앗아 나라의 안정을 이루었고
북한과 오월 등 일부 지역을 제외한 실제적인 천하통일을 이루게 된다. 비록 연운 16주를 뒤찾진 못하지만 요나라가 감히 송나라를 치지도 못하게 만들었으니 그 역시 나름 성과가 있었다고 할수 있다. .
중앙에서부터 각 지방에까지 법령이 제대로 이루어 질수 있게 하기 위한 시스템을 만든것은 중국사에서 아마 이때가 처음 일꺼다.
또한 처음엔 사천과 호북,호남의 물자를 대요 전쟁에 차출하기 위해 만든 문물에 이동 시스템은 이 후 상업이 급격하게 발전하는 계기가 된다.
진위 여부 논란이 있지만 "뜻이 맞지 않더래도 선비들을 함부로 죽이지 말라" 라는 유훈은 이후
동양사회의 전통적 미덕이 되어 수많은 논쟁이 가능한 토대를 만들었고 이 후 왕안석의 신법파,
구양수의 구법파 논란 가운데 성리학이 발전하는 밑거름으로까지 작용하게 된다.
조광윤은 비록 그 스스로가 군인 출신이었지만 문치주의를 내세워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동양적 세계의
기틀을 만들었으며 혼란의 시기에 비록 제한적인 의미일지라도 사람을 함부로 죽이지 않았으며,
봉건시대의 한계가 있긴 하지만 당시로써는 획기적인사상의 자유, 언론의 자유 를 내놓았다는 점에서
그 어떤 명군 못지 않은 업적을 이루었다 할수 있다.
태조 이성계가 군사적으로는 조광윤 못지 않은 뛰어난 점이 있었지만 정치적으로는 자기 아들 이방원한테 속수무책으로 당할 만치 무능력했는데 조광윤은 군사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분명 매우 뛰어난 성군이라 하지 않을수 없다.
태조 조광윤이 만든 이러한 틀은 몽골 점령시기 일시적으로 퇴보하나 후에 명,청 바다 건너 조선에까지
그대로 이어져 동아시아 문명의 특징을 완성했다고 할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