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뜩이나 발해관련 사료도 너무 부족하고
더군다나 발해의 중심지인 5경이 거의 중국 길림성 헤이룽장성 일대에
있고 그나마 북한지역에 걸쳐있는터라
한국이 발해에 대한 연구를 할 수 있는 여건이 태부족한게 현실입니다
발해가 한민족과 이질적인 말갈족이 세운 나라라 주장하는 중국 동북공정의
주장과는 달리
발해인들은 당시 고려인들과 민족적 유대 내지 동질성이 컸으리라는
추측을 하게 되는데 그 근거는 의외로 단순한 논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926년 거란의 야율아보기에 의해 발해의 상경성이 함락된 후
요나라의 피지배민족으로 편입된 상당수의 발해인들은
발해 멸망후 2~300년동안 발해인이란 정체성을 계속 유지했다는 중국측
기록이 적지 않습니다.
요나라에 의해 요양 등지로 수많은 발해인들이 강제사민됬지만
요나라 지배 근 200년간 발해인들은 여전히 자신들을 발해인이라
생각하고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키고 있었죠
더군다나 발해시절 발해의 영향력 하에 있던 흑수말갈계통 완옌부가
아골타의 지도하에 요나라를 멸망시키고 금나라를 세우지만
대씨 고씨 세력가를 필두로한 발해인들은 아골타의 회유에도 불구하고
여진족에 저항하다 발해부흥운동이 실패로 돌아가기도 합니다.
흔히들 여진족의 금나라가 발해와 여진은 본래 일가였다는 선전을 한
기록때문에 여진족과 발해인은 동일계통으로 오해를 하는 분들이 많지만
여진족의 금나라는 발해인들의 정체성을 없애기 위해
발해유민 핵심세력들을 요동 하북등지에서 산동성으로 강제사민시켜
한족들과 반강제적인 동화정책을 시키기도 했죠
심지어 징키스칸에 의해 금나라가 멸망한후 원나라 초기에도
발해인들이 하북등지에서 모여살고 있었다는 원나라기록도 있을 정도로
발해인들은 발해 멸망후 이민족의 터전인 요서와 하북 산동 등지에서
이삼백년간 여전히 발해인이란 정체성을 유지하며 살고 있었다는
중국측 기록들이 여럿 보이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발해멸망후 거란 여진족에 의해 강제사민된 것과는 달리
자발적으로 고려로의 이주를 택한 수십만의 발해유민들은
우리역사에서 고려로의 유입이후 여전히 발해인이란 정체성을
별도로 유지한채 살고 있었다는 기록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니까 요나라 금나라에서 이민족 이중지배체체의 구속을 받으며
발해인이라 불리던 것과는 달리
고려에서는 전혀 이민족 지배 통치방식을 전혀 받지 않고
곧바로 고려인으로 살아가고 있던 겁니다.
1019년 강감찬의 귀주대첩으로 수만명의 거란족 포로들이
발생한후 그들은 고려에 강제적으로 귀화된지 200년 가량 흐른뒤
몽골군에 쫓긴 거란족 일파(대요수국)가 고려의 국경을 넘어
강동성에 침입했을때
이들 거란족 포로들의 후손들은 여전히 자신들을 거란족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한채 거란군의 앞잡이 역할을 자처하기까지 합니다.
(고려사에 이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나와 있음)
심지어 최충헌의 집권기에 거란족 포로의 후손인 기생이
여전히 자신을 거란족이라 생각하고 살고 있었고
최충헌의 눈에 들어 호화로운 생활을 하다가
동족인 거란족 포로의 후손들에게 악행을 저지르다
이들에게 몰매맞아 죽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이들 거란족들은 심지어 조선 전기 세종조 성종조 조선왕조실록에도
등장하여 당시 화척 재인들과 같은 천인들이 본래 고려때 귀주대첩때
발생한 거란족 포로들의 후손들이 적지 않다고 밝히고 있는 기록도 있습니다.
그러나 발해멸망후 근 이백년 가까이 꾸준히 고려로 유입되었고
최대 2~3십만에 이를것으로 추정되는 발해인들은
거란족들과는 달리 고려사회에서 별도로 발해인이라는 칭호로 불렸던적도
없고 그들만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살았다는 기록도 한줄 없습니다.
태조왕건이 발해의 마지막 세자 대광현을 대환영하면서
그에게 왕씨성을 주고 발해왕들에 대한 제사를 지내는것을 허락해주었지만
발해인들은 이후 거란족의 고려에 대한 3차에 걸친 침입에서
최일선에서 고려를 위해 고군분투하죠
물론 귀화한 발해인들에 대한 고려의 기록이 미비한게 너무나 아쉽지만
발해인들이 고려인과 언어 풍습 역사인식 등에서 동질성이 적지 않았기에
요나라 금나라 원나라에서와는 달리 고려에서는 굳이 발해인이라는 정체성을
따로 유지하며 살 이유가 전혀 없었던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참고로 중국 길림대에서 발해상경성에 발굴된 발해인들의 고인골이
현대 한국인과 매우 흡사하다는 결과또한 의미심장하다고 봐야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