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번째로 가장 큰 이유.
일본 본토로 부터 보급이 끊겼다.
임진 왜란 발발 직전 일본은 전쟁에 관해서는 유럽에서 소수의 원정군이 와도 지지않는다고 자신 할만큼 상당한 수준으로 발전해 있었다.
게다가 유럽과의 무역에 있어서 암흑기에 빠져있던 조선과는 달리 활발하게 유럽의 선진 문물을 홍수처럼 받아 들이고 있던 만큼 일종의 우월감에도 젖어있는 상태다.
유럽의 선진문물을 모방해 대량 생산한 조총 부터 다양한 물품들이 산처럼 쌓인 항구를 배경으로,
끝없이 사각형 대형으로 정렬한 일본 병사들을 바라보면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금방이라도 명 나라를 정복한것 같은 카타르시스를 맛 봤을테지만.
불행하게도 대부분의 조총과 유럽을 모방한 물품 그리고 식량들은 조선에 상륙하지도 못하고 대부분이 조선 함대에 의해 바다 속으로 가라 앉았다. 전쟁 기간 내내.
다급해진건 조선 반도로 건너간 일본 원정군이었다. 자신들이 사용하고 있는 대부분의 물품과 식량 공급이 끊겨 버렸기 때문이다.
담백한 입맛과 일본 현지에서 생산하는 식량에 익숙해져 있는 일본 병사들이 뒤늦게 조선 현지에서 식량을 공급받아야 하는 처지가 돼 버렸다.
가장 쉬운 방법은 물론 약탈.
하지만 처음엔 효과가 좋아도 나중엔 다 도망가 버리기 때문에 결국은 전투에만 동원돼도 모자랄 병사들을 차출해 농사를 직접 지어야 한다.
일본 본토에서 농사를 전담할 농민들이나 노예 계급을 데려오려고 해도 조선 수군에 막혀 전혀 들어 올수 없다.
게다가 중세 시대는 일본군이 아무리 조총등 유럽의 선진 문물을 모방한 물품들로 무장했다 해도,
대나무를 자르면 창이 돼고, 급하면 쇳덩이나 돌을 던져도 일단은 화살과 같은 효과를 낼수는 있는 만큼 무기 공급이 쉬운 시대였다.
즉 낮에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고 숨어 있다가 아무것도 안 보이는 밤에는 일본군 주둔지 주변을 어슬렁 대면서,
요즘말로 하면 재빨리 테러를 하고 달아나는걸 반복하는 농민출신 게릴라들이 후방을 교란하면서,
식량도 자체적으로 농사를지어 해결해야하고, 각지에서 빈발하는 게릴라들과의 소규모 전투에도 병사들을 내 보내야 하고,
일본군 점령지 바로 옆에는 조선군과 명나라 군이 대군을 이끌고 반복적으로 침공과 후퇴를 하는 만큼 대부분의 병사들이 농사를 지을 틈도 없이 상시 대기하고 있는 상태.
즉 도저히 식량을 공급받을 상황이 아니라 시간이 갈수록 굶주릴수 밖에 없는 처지가 되 버린다.
일본이 자랑하던 물품들도 마찬가지 상황이다. 조선에서는 일본이 가진 물품을 생산할 만한 시설도 장비도 기술자들도 아무것도 없는 상태다.
유럽과 무역을 해본 경험이 없어 유럽을 모방한 일본의 물품을 생산해본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시간이 갈수록 고갈돼가는 조총탄때문에 급한대로 조선군의 무기고에서 꺼내온 다양한 형태의 총통와 대포를 써먹으려 해도,
문제는 일본군은 사용해본적 없는 형태의 총포기 때문에, 전술부터 사용법까지 모든 것을 다시 연구해야 하는데 전시 상황에서 언제 그럴 여유가 있을까?
결국은 자신들의 물품과 무기들은 일본 본토에서 공급 받아야 하는데, 조선 수군때문에 공급이 끊긴 상태라는 것이다.
총탄이 바닥나 조총도 쏠수 없고, 식량이 바닥나 굶주리는 일본 병사들이,
보급이 활발한 조명 연합군과 각지에서 활약하는 농민병들이 휘두르는 칼에 난자당해 죽어갈뿐이었다.
두번째로 당시 일본은 왕이 없었다.
모두가 왕이다. 머리가 똑똑하고 부하들과 영민들을 잘 대해주는 영웅 적 기질만 있으면 개나 소나 왕이 될수 있는 시대였다.
나름 단단한 작은 성과 주변 몇 키로 정도의 영지를 확보한 영주부터 강원도 크기만한 영토를 확보한 다이묘까지 수백에서 수천이 넘는 소국들이 난립하는 시대였다.
비록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했다하지만,
실상은 수천이 넘는 영주들의 가족들을 인질로 잡아 협박하고, 돈과 명예를 보장해 주는 방식으로 영주들과 다이묘를 설득해 자기를 지지하게 하는데에 불과했다.
반면 조선이나 명 나라 심지어 유럽만해도 왕이나 왕실에 대한 충성은 절대적이다.
죽으라면 죽어야 하고, 왕이 곧 국가라는 인식으로 목숨 바쳐 지키는것이 애국이던 시대다.
조선의 왕이라고 자칭하던 선조가 뛰어난 활약을 보이는 의병장들이나 장군들.
심지어는 조선의 구세주로 여겨지던 이순신 장군마저 처형했거나 처형하려던 암울한 분위기에서도,
모두가 기꺼이 처형장에서 죽거나 백의 종군하면서 까지 본인들이 직접 새로운 나라를 건국해보겠다는 생각은 해보지도 않았다.
세번째로 일본 장군들과 영주들이 전쟁에 소극 적이기 때문이다. 전쟁에 대한 가치관도 다르다.
당시 조선으로 건너온 일본 군대에겐 조선이나 명나라처럼 통일된 지휘체계가 없고, 그 중심에 왕실이라는 구심점이 없었다.
사실상 몇천에서 몇만 정도의 병사들을 보유한 작은 왕들의 동맹군이다.
일본 본토에선 히데요시가 아무리 가족들을 인질로 잡고 이래 저래 명령하고는 있지만,
괜히 무리해서 적극적으로 전장에 나갔다가 자신이 확보한 병사들을 모두 잃으면?
자신이 평생을 바쳐 이룩해온 영토와 야망이 모두 허무하게 사라져 버리고 만다.
어떡하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말도 안되는 명령을 피해서 자신이 확보한 병사들을 온전히 최대한 유지해 일본 본토로 복귀하려는 생각뿐이다.
그러니 자신들이 이제껏 해왔고 그렇게 살아왔던 대로 최대한 빠르게 북상해 조선의 수도를 함락하려 한것이라고 본다.
수도를 함락해 조선의 왕을 인질로 잡거나 처형하면, 또는 자신의 운명을 받아 들여 스스로 xx하기만 하면,
분명히 조선 각지에서 조선 왕의 공포 통치에 눌려 지배받던 지역 호족들을 설득해 자신들의 일본 식 동맹체제로 끌어 들이기만 하면 조선 전쟁은 끝날거라고 믿었을 것이다.
그런데 왠걸? 수도에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자신의 영지와 운명을 함께해야 할 조선 왕이 국경지대로 도망가 버리지 않나?
또 이미 조선 각지를 통치하는 구심점인 한양이 함락됬는데도 여전히 거의 모든 지역의 호족들이 무기와 사병을 끌어 모아 전쟁을 계속 이어가지를 않나?
조선이나 명 나라를 자신들처럼 작은 영주들의 동맹으로 바라본 일본 영주들은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현실에 혼란과 패닉에 빠져 아무것도 할수 없는 상황이 돼렸다.
일본군의 가장 바깥에서부터 조명 연합군의 대군에 무너져 간다는 정찰병들의 보고에도 일본 영주들은 한 자리에 모인 상태에서...
이제 어쩌지?
어이..당신 생각은 어때?
뭐 좋은 방법 없어?
나보고 죽으라고? 당신이나 가봐!
나 돌아가고 싶은데, 누구 같이 갈 사람 없어?
야야. 내 병사들 다 죽겠다. 나 좀 도와줘.
등등...
백년 천년... 부산등 몇 군데에서 농성하면서 회의만 하고,
히데요시의 독촉에 시달려 소극적으로 전투 좀 깔짝대고는 다시 농성하면서 또 회의만 하는 처지가 되버린 것이다.
마지막으로 조선으로 돌아선 일본 병사들과 영주들이다.
임진왜란 초기, 모래성처럼 무너졌던 조선군의 상당수를 재 정비하고 조총의 사용법부터 전술,
그리고 일본군에 대항하는 전법이나 일본 식 전술등을 전수해 일본군을 격파하면서 승전을 이어가던 김충선 장군이 대표적이었다.
본명은 사야가. 뛰어난 조총 전술로 전국시대 말기에 큰 활약을 했던 명장.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가족들을 인질로 잡힌 상태에서 조선 원정에 참전한 그는 부산 상륙 직후 현지민들이 잔인하게 약탈당하는 걸 목격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한다.
그리고 비록 유럽식 문물을 모방해 큰 발전은 했지만,
긴 전국 시대로 야만적이었던 일본과는 다른 조선의 문화와 문물 그리고 평화로움을 접한 사야가는 인간다운 삶을 살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일본은 영웅적인 개인에 사람들이 모여드는게 익숙한 만큼,
조선 선조처럼 말도 안되는 처형에도 아무 말 없이 충성을 하는 조선의 명장들과는 달리 히데요시에게 충성할만한 이유가 없었다.
조선을 선택한 사야가는 자신이 데려온 병사들과 자신의 설득으로 조선을 선택한 일본 영주 및 병사들을 데리고 조선군 주둔지로 향했다.
사야가의 귀순 이후에도 조선 각지에서 개별 적으로 백기 투항하는 일본 병사와 소규모 병사들을 데리고 귀순하는 영주들이 끊이지 않았다.
심지어 이순 신 장군조차 휘하에 조선으로 돌아선 일본인들로 구성된 부대가 있었고, 전쟁 기간 내내 이들로 구성됀 부대가 일본군을 격파하는데 큰 활약을 했다고 전해진다.
만약 조선 조정이나 현지 군 지휘관등이 조선으로 돌아서는 일본인들을 같은 민족으로 받아 들이지 않고 잔인하고 냉정하게 대했다면?
어차피 전세가 기울어가긴 했지만, 전쟁이 끝나는 시점이 더 길어지진 않았을까 싶다.
최악의 경우는 우선은 전쟁에서 이긴 다음 생각해보자는 식으로,
기존의 영주들과 사야가를 포함해서 이미 마음이 일본을 떠난 영주들이 일치 단결하는 것이다.
그럴 경우 일부 조선 영토를 조선과 갈라 먹는 사태가 벌어졌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