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뽕 운운하는 사람치고 정상적인 사람 못봤음. 님의 과거글보면서 성향 파악하고 있습니다만. 개인적으로 이런 단어 쓰는 애들은 대개 어리거나, 조선족-화교일 가능성이 높다라고 봄.물론 님이 그렇다는건 아님. 다만 오늘도 국뽕 운운하는 종자를 보았고, 화교벌레였으니까요.
본론만 따지자면
1번. 중국사는 왜 자기네 민족성과 상관없는 요,금,원,청을 자국사라고 인식하게 되었을까요? 여기에는 hiStory라는 본질과 의문을 같이 하는 겁니다만. 신해혁명 당시의 중국인들은 만주족을 자신을 억압하는 전제식민정권으로 생각했어요. 손문의 민족주의에서 나올 겁니다만. 님 의견대로라면 청사를 중국사라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물론 저도 원, 청은 중국사가 아니라고 보고요. 단지 그 시대의 기록이 오랑캐로 생각했다라는거 자체가 자국사에 들어가야 하는가 아닌가를 결정짓는 요소가 아니라는 겁니다. 백제와 신라가 서로간의 역사적 동질성과 같은 계보학을 가졌을까요? 이들을 삼국시대라고 묶는건 후대의 일이에요. 그 시대는 불가능한 발상이죠.
2번. 발해사도 따지면 한국사의 범주가 아니에요. 조선도 그랬지만, 발해사가 자국사의 범주라고 생각하게 된건 조선후기부터입니다. 이게 논쟁이 있다가 정식 교과서에 들어온게 된게 1970년대부터죠. 덕분에 국내에서는 남북국시대로 정하게 되지만 해외에서는 약간 중립적으로 봅니다. 고구려는 한국사로 놓지만요. 동북공정도 마찬가지인데 고구려는 대륙교과서에서 외국사(한국사)에 놓지만 발해는 그렇지 않거든요.
. 중국사는 왜 자기네 민족성과 상관없는 요,금,원,청을 자국사라고 인식하게 되었을까요? 여기에는 hiStory라는 본질과 의문을 같이 하는 겁니다만. 신해혁명 당시의 중국인들은 만주족을 자신을 억압하는 전제식민정권으로 생각했어요. 손문의 민족주의에서 나올 겁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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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투기꾼 당신 말대로라면
우리와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는 금나라지만
동국공정이니 뭐니 시끄러우니
정치적인 이유때문에 우리랑 아무상관없는 금나라를 우리 역사에 편입시키자?
"그러니까 투기꾼 당신 말대로라면
우리와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는 금나라지만
동국공정이니 뭐니 시끄러우니
정치적인 이유때문에 우리랑 아무상관없는 금나라를 우리 역사에 편입시키자? "
1번. 뭐가 그렇게 두려운지 모르겠지만, 금나라는 커녕 당나라도 우리나라 역사라고 우겨도 신이 와서 벌하는거 아닙니다. 일단 님은 심리적으로 뭔가 쫓기고 있다고 보여집니다만. 일종의 진실압박이라고 해야 하나. 웃기죠. 역사는 스토리이지 고고학이 아니에요. 제가 history의 본질을 말한것도 이 때문입니다. 더욱이 국내역사기술과 대륙의 역사기술의 차이를 놓고 간략하게 비교한 소리가 잇는데 대륙에서는 권력과 진실이 갈마드는 그런 자리를 열어놓지만 한국에서는 진리오리지날리티에 지나치게 목숨건다는 겁니다. 님처럼요.
2번. 금나라가 우리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라는건 님의 멋대로 생각입니다. 물론 이게 한국사의 계보에 들어가야 한다라고 막바로 우기지는 않겠습니다만. 말갈이나 여진족의 구성이 언어에서는 차이가 나지만 형질인류학, 분자인류학에서는 상당한 동질성이 있다라는게 증거니까요.
3번. 1번의 연장선이지만 그 '정치적인 이유'로도 금나라를 자국사라고 볼 여지는 있습니다.순수한 진실의 결정체에 목숨걸지 마시길.
4번. 그리고 말 함부로 하지 마시죠. 국뽕운운하는건 절대 용납할 수 없는 겁니다만. 제가 말했지만 님이 과거에 쓴 글 보고 있어요. 거기서의 글들과 지금 여기서 떠드는게 얼마나 모순적인가 확인하고 있으니까요.
본인이 잘못해놓고 남보고 성질내시네요. ㅎ
'쉰소리'를 왜 썼는지 의문.
그냥 단어 갖다 붙인다고 말 되는게 아니에요.
욕 먹을 짓을 해놓고 본인이 잘났다라고 생각하시는겁니까?
금사가 왜 한국사가 아닌가 그냥 담백하게 썼다면 제가 굳이 여기서 안 떠들 가능성이 컸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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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뭘 잘못했어요?
내가 욕을 했어요?
저게 욕인가?
환빠 국뽕이 욕인가요?
당신의 담백한 쉰소리에
내가 얼큰하게 일침을 놓은거지.
이제 하다하다 안되이
형질인류학, 분자인류학같은 소리 하고 있다.
인류 이동경로나 분포에 대한 연구에서나 나올법한 이야기를
금나라 역사는 우리 역사다..라고 하는 것에 쓰는데
쉰소리지..암..
님처럼 따지면 '한민족' 거릴 이유 없어요. 그냥 말하고, 밥먹고, 똥싸는 인간이라면 다 호모사피엔스의 후손들일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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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처럼 따지면 왜 우즈벡이 우리 역사가 아니냐고요..
들이돼는 게 잘못됐다구요 알겠어요?
신채호? 하...신채호라가 다 맞는 줄 아나..
금사(金史) 조선상고사(신채호), 몽배금태조(박은식), 규원사화(북애자)
중에 그나마 제일 믿을만한게 신채호인데
신채호라고 다 맞는 줄 아냐구요..
신채호 독사신론부터 조선상고사까지...
틀린게 얼마나 많은지, 당신이 자신있게 퍼온 금나라부분도 역시 전부 맞는게 아니예요
아....
조선상고사 보기는 보셨나?
그거 한글이라고는 하지만 한글은 조사뿐이고 전부 한문인데.
읽을 수는 있나?
직접 읽어보고 뭐라고 쓰여있는지 보긴 봤어요?
어디가서 베껴온 주제에..
뭘 잘 났다고..
여담이지만 여진어 = 중세 한국어 설은 깨진지 오래되었습니다. 애초부터 사역원에서 출간했던 만주어 (여진어) 교본을 보면 당시의 중세 한국어와 어휘 같은 기초 부분부터 일치하는 부분이 별로 많지가 않아요. 이 얘기는 한국어, 만주어, 몽골어 등등을 한 군데에 묶어놓는 알타이어족 학설이 견인하던 중이었는데 이 학설 자체가 무너지면서 흐지부지.
여진어와 중세 한국어간의 친연성을 주장할 수 있는 게 어순밖에 없는데, 어순 같다고 비슷한 언어라 칠 거면 한국어 화자는 터키어, 헝가리어도 아주 쉽게 배울 수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가 않죠. 중국어랑 어순 똑같고 성조도 있는 태국어가 중국어와 다른 어족으로 분류되는 건 이유가 있는 겁니다.
정관용의 시사자키라는 프로그램에서 만주어에 대해 다룬 적있는데
여기서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의 김경나 강사와 만주어에 대해 인터뷰한 내용이 있습니다
해당 부분 발췌 하겠습니다
1. 여진어에서 파생한 만주어와 몽골어
김경나> 거기서, 뭐 우리나라 국문과에서도 한문도 배우고 여러 가지 언어들이라든가 학문을 배우잖아요.
몽골에서는 만주어와 티벳어가 필수 커리큘럼에 있었어요. 제 의지로 배운 건 아니지만...
정관용> 우리 국문과에서 옛날 고문 이런 거 배우듯이?
김경나> 예, 그래서 처음에 배울 때는 내가 왜 이런 것까지 배워야 되나,
만주어는 몽골문자를 따서 이렇게 만주어로 옮긴 거거든요.
원래 전신은 여진어였구요
2. 언어학적으로 유사한 몽골어 한국어 만주어
김경나> 예, 몽골어랑 만주어랑 이제 지역으로도 그렇지만 굉장히 밀접한 관계에 있어요.
우리 알타이 어족이라고 하잖아요. 거기에 이제 한 계통, 비슷한 언어라서
만주어랑 몽골어랑 놓고 보면 만주어랑 한국어 하고 가까운 점이 있듯이 만주어랑 몽골어도 굉장히 가깝거든요.
그래서 비교언어학적으로 비교민속학적으로도 굉장히...
정관용> 알겠습니다. 그럼 몽골어와 한국어 사이에 만주어가 있다고 말해도 되나요?
김경나> 지역으로 보면 그렇긴 한데요, 예 징검다리가 될 수 있겠죠.
근대 국어에서 17, 18세기에 사역원, 그러니까 통번역 기관.
고려시대 조선시대에 통번역기관으로 있었던 사역원에서 간행된 교과서들,
옛날 역관들이 배우던 교과서를 보면
그게 이제 청학사서라고 <신석노걸대>, <팔세아>, <소아론>,
그리고 이제 만주어로 된 <삼국지>가 있어요.
그런 걸 보다 보면 근대국어로 발음이 다 달려있거든요.
그걸 보면 ‘진짜 이건 비슷하다’, 그런 것도 굉장히 많구요.
저 사람은 말은 언어학적으로 비슷하다고 하고 있지만 그 어디에도 언어학적인 설명은 없군요. 언어학도 세부적인 분야가 무수히 나뉘지만 비교언어학의 경우 주로 형태론, 음운론적으로 접근하는 편입니다. 보셨을진 모르겠지만 '라틴어와 유럽언어들의 비교' 라는 표에 각 언어들의 유사한 어휘를 나열하는 방식이 비교언어학의 한 방법이죠.
그런데 보시면 알겠지만 대체 '어떻게' 유사한 건지 별 설명은 없군요. 삼국지에 주석을 달아놓았더니 발음이 비슷한 것이 많았다? 이건 흔히 한국어와 일본어가 동일한 어족에 묶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하는 착각인데, 한자 어휘의 발음이 같다고 기초 어휘가 같은 게 아닙니다. 그렇게 치면 한국어와 베트남어가 동일한 한장어족에 묶이는 결과를 초래하죠.
그리고 세 번째로 제시하신 영상은 정말 요약을 잘해주셨네요. 아무런 근거 제시 없이 '고려와 여진은 동일한 언어, 동일한 지역, 동일한 문화를 공유하였다' 한 마디 하고 신속하게 다음으로 넘어가는군요. 이런 건 쓸만한 참고자료가 아닙니다만.
여담이지만 여진어 = 중세 한국어 설은 깨진지 오래되었습니다. 애초부터 사역원에서 출간했던 만주어 (여진어) 교본을 보면 당시의 중세 한국어와 어휘 같은 기초 부분부터 일치하는 부분이 별로 많지가 않아요. 이 얘기는 한국어, 만주어, 몽골어 등등을 한 군데에 묶어놓는 알타이어족 학설이 견인하던 중이었는데 이 학설 자체가 무너지면서 흐지부지>???
1. 우랄알타이어족은 언어간에 '어순' 만 같을 뿐 어휘의 유사성이 거의 없기 때문에 망해가는 학설입니다. 애초에 알타이어족이란 것 자체가 인구어족, 오스트로네시아어족마냥 북방에도 그룹을 만들려다가 망한 건데 알타이 요소라뇨. ㅋ 한국어는 엄연히 고립어로 분류됩니다. 만주어는 퉁구스어군이라고 따로 분류되는 기준이 있어요.
한일어족이 성립하지 않는 가장 중요한 이유도 고유 어휘의 유사성이 전혀 없다는 점. 물론 일부 위키백과 같은 사이트에선 자기들 맘대로 수정하면서 한일어족이라 표시하는 경우도 있긴 합니다만, 그런 건 학계의 정설이 아닙니다.
2. 완전 상이하다는 말은 한 적 없습니다. 그러나 다른 언어입니다. 프랑스인이 독일어를 이해할 수 있던가요? 언어에 어중간함이란 것은 없어요. 본문에 제시된 것처럼 '근거' 의 하나로서 활용될려면 적어도 포르투갈어-스페인어 수준의 유사성은 있어야 합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이게 님이 원하는 자료는 아닐 거란 건데요. (논문이 아니기 때문에) 원래 봤었던 표로 된 객관적인 자료는 구글 돌아다니다가 보게 된 거라 지금 다시 찾기가 좀 곤란합니다만, 제가 뭘 말하는지는 저 정도로도 충분히 설명된다고 봅니다.
그리고 전 글의 내용 자체에 반대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금나라가 한국사로 편입된다면 좋아할 사람이구요. 하지만 그럴 거라면 그에 따른 근거는 확실하게 하고 가자는 소립니다. 짱깨가 고구려를 중국사라고 우기는 것보다야 훨씬 많은 디딤돌이 있는데, 반박당할 여지가 최대한 적게 깔끔한 돌만 골라서 성을 지어야지요.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중세 한국어와 여진어 사이의 친연성 정도는 세계 각지에 널리고 널렸습니다. 언어학 많이 판 사람이 하는 말인데, 이딴 걸 근거로 썼다가는 상대방에 언어학 고수가 왔을 때 영혼 저 끝까지 탈탈 털린다고 장담할 수 있습니다. ㅋ
위의 (꽃들의 희망) 이분은 토론을 할줄 모르는사람이네~~~
여긴 토론방이고~ 개개인의 의견을 듣는곳인데~ 안좋은 소리하면서 저렇게 다른 사람의 말을 무시할필요가 있나? 참 어의 없는 양반이네~ 이보세요" 꽃들의 희망님" 당신 애기만 하면 됩니다. 다른사람 폄하하는 말 상가 하시고~~~ 금나라보다 앞선 고구려는 우리역사고 그후의 금나라는 우리역사로 편입이 안될이유가 뭐가 있수? 지금에 와서야 만주지역의 역사가 중국역사다 라고 배워서 이해가 안가는거지? 그당시 금나라 침략을 받은 중원사람들은 금나라를 자기 역사라고 생각했을까요?
애초에, 금사, 요사는 같은 이민족 정복왕조였던 원나라가 편찬한 사서입니다.
드라마 기황후에도 나왔던 진이한씨가 연기한 [메르키트 토흐토=일명 탈탈]이라고 하는
사람이 편찬했지요.
중원인들은 금, 요, 원 모두 중원왕조라고 보지도 않았어요. 특히, 금과 요는 중원을 다 차지한 나라들도 아니구요. 원이 그나마 남송까지 먹고 한때 전 지역을 통치했는데, 그걸 인정해서 명나라가 원사는 썼지요. 그래봤자 한족들 눈엔 달자(=타타르, 오랑캐)였던건 마찬가지고
고구려는 우리역사고 그후의 금나라는 우리역사로 편입이 안될이유가 뭐가 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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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맘대로 꼴리는대로 할꺼면 역사를 왜 배워요? 차라리 김진명 소설을 학교에서 배우지.
말이라고 다 말인가?
아놔..뱉어놓고 쳐다보면 안 쪽팔려요?
그리고 저 화교 어그로가 재밌는게
고려사, 고려사 절요, 조선왕조실록 등을 들먹이면서 금, 청사는 우리 역사가 아니다라고 흥분하는데
정작 금나라의 역사서인 <금사>에 시조 함보는 고려인이라고 써있는거는 왜 무시하는건지 ㅋㅋㅋ
金之始祖諱函普,(금의 시조는 이름이 함보였다)
初從高麗來,(원래 그는 고려에서 왔다)
年已六十餘矣.(그가 고려를 떠날 때 60대였다)
兄阿古好佛,(그의 형 아고는 불교를 숭상했는 데)
留高麗不肯從,(그와 함께 고려를 떠나기를 거절하면서)
曰:「後世子孫必有能相聚者, 吾不能去也」(말하기를, 우리 후손들이 다시 돌아와서 만날 곳이 필요하다. 나는 갈 수 없다)
獨與弟保活里俱.(그래서, 동생인 보할리하고만 왔다)
始祖居完?部僕幹水之涯,(그는 완안부의 복간수 근처로 갔다)
保活里居耶懶.(동생 보할리는 야뢰로 갔다)
발해가 망한 뒤 요동 지역을 장악한 게 여진족인데, 만약 여진이 우리와 전혀 상관없는 이민족이라면 이건 말이 안 되는 거죠
발해의 인구가 고구려와 비슷하다고 치면 500만 이상은 될 텐데, 그 많은 발해인들은 어디로 간 겁니까?
하늘로 증발했나요?
그리고 여진족은 어디서 이주해온 민족이고요?
고구려나 발해나 사실 단일민족 국가가 아니죠. 개네들은 다민족 국가입니다.
물론, 크게 따지면 퉁구스를 기반으로
소소하게는 다양한 부족들이 존재합니다.
청이 중원으로 가기전에, 누르하치가 한 일이, 분열된 여진족들의 통합이였는데
만주엔 여진족만 있는게 아니죠. 지금도 거기엔 다우르족, 나나이족, 오르촌족, 에벤키족, 등
다양한 부족들도 있습니다. 16세기 당시엔 요동한족이나 고려에서 이주해간 계통도 있을꺼고, 애네들을 모두 합쳐서 [만주]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만든거거든요.
원래, 북방민족들의 특징 중 하나가 뛰어난 지도자(칸-이라고 한다면)을 만나면 급속도로 세력이 커져 단결했다가, 지도자가 죽거나, 후계자가 별로면 또 급속도로 와해되서 원래 부족생활로 돌아간다는 것임.
애네들은, 일종의 느슨한 부족동맹 체제임.
고구려엔 뛰어난 말갈장수들이 있었고, 발해엔 여진족 장수들이 있었을꺼고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엔 뛰어난 발해계 장수가,
청나라에도 마찬가지로 부용세력인 다우르나 시버족의 장수들이 있었구요.
고구려가 망하고 대조영이 발해 세운거나, 발해 망하고 아골타가 금을 세운거나
이를테면, (이건 가상이지만) 청나라가 망하고 잔존한 유민들과 부용세력들이 또 힘을 키워서 그 중에 용맹한 다우르족 장군 하나가 또 새 나라를 세우고-뭐 이런 사이클로 나갔다는거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저 화교 어그로가 재밌는게
고려사, 고려사 절요, 조선왕조실록 등을 들먹이면서 금, 청사는 우리 역사가 아니다라고 흥분하는데
정작 금나라의 역사서인 <금사>에 시조 함보는 고려인이라고 써있는거는 왜 무시하는건지 ㅋㅋㅋ
金之始祖諱函普,(금의 시조는 이름이 함보였다)
初從高麗來,(원래 그는 고려에서 왔다)
年已六十餘矣.(그가 고려를 떠날 때 60대였다)
兄阿古好佛,(그의 형 아고는 불교를 숭상했는 데)
留高麗不肯從,(그와 함께 고려를 떠나기를 거절하면서)
曰:「後世子孫必有能相聚者, 吾不能去也」(말하기를, 우리 후손들이 다시 돌아와서 만날 곳이 필요하다. 나는 갈 수 없다)
獨與弟保活里俱.(그래서, 동생인 보할리하고만 왔다)
始祖居完?部僕幹水之涯,(그는 완안부의 복간수 근처로 갔다)
保活里居耶懶.(동생 보할리는 야뢰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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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rdicBerry 이 덜떨어진 인간님아.
일본 황족이 백제 왕족 후손이라고 일본 역사 우리 역사입니까?
방학이 빨리 끝나야지 ...
고려사, 고려사 절요, 조선왕조실록 등을 들먹이면서 금, 청사는 우리 역사가 아니다라고 흥분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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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인간님은 왜 우리 역사를 우리 사서에서 안 찾고
남의 나라 사서에 찾냐 이거요?
님, 토론을 할때는 근거를 제시하면서 차분히 반론하면 됩니다.
위에서부터 읽어 내려오면서 님이 참 예의가 없는게 제 눈에도 보이는군요.
오는 말이 고와야 가는 말이 곱지요.
주제가 님이 보기에 황당하다는건 알겠는데, 그런식으로 되받아치는 것 또한 분란거리를 스스로 만드는 행동입니다.
(1) <고려사>
"예전에 우리 평주의 승려 금준이 달아나 여진족의 아지고촌에 들어가 살았는데
그를 금의 조상이라 한다
혹은 말하기를 평주의 승려 김행의 아들 극수가 처음에 여진족의 아지고촌에 들어가 여진 여자에게 장가들어 아들 구얼 태사를 낳고 구얼이 훠러 태사를 낳았다.
훠러는 아들이 많았는데 큰 아들은 해리버요, 막내 아들은 잉거였다.
잉거가 가장 웅걸하여 민심을 얻었더니 잉거가 죽으니 해리버의 장자 우야소가 위를 이었으며
우야소가 죽으니 아우 아골타가 섰다."
(2) <고려사> 제3권 세가(世家)
예종 4년(1109) 6월 기해, 동번(여진)이 요불과 사현 등을 사신으로 보내 내조하였다.
경자에 사신 온 이유를 물으니 요불 등이 상주하기를
“옛날 우리 태사 영가(함보의 6대손이자 아골타의 숙부)께서 일찍이 말씀하기를
‘우리 조종(祖宗=시조가 되는 조상)이 대방(고려)에서 나와 자손에 이르게 되었으니
의리상 귀부하는 것이 합당하다’라고 하였습니다.
현재 태사 오아속(아골타의 형)도 대방(고려)을 부모의 나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3) <고려사>의 기록 예종 14년 (서기1119년)
그해 8월 정축일 기록에 의하면" 중서주사(中書主事) 조순거(曺舜擧)를 금나라에 파견하였다.
그가 가지고 간 편지에 '...."하물며 귀국의 근원이 우리나라에서 시작되었다" 는
말이 있다고 트집을 잡아 금 나라 임금이 그 편지를 받지 아니하였다
>>>금과 고려사이 마찰이 심화될때,
고려는 금의 그 근원이 고려(나말여초기 신라)에서 시작되었음을 내세워 금을 압박합니다
2. <동국통감> 조선 전기 서거정
생여진(生女眞)의 완안아골타(完顔阿骨打)가 황제를 칭하고 이름을 민(旻)으로 고쳤으며,
국호를 금(金)이라 하였다
(....중략....)
혹자는 말하기를,
“옛날 우리나라 평주(平州)의 승려인 금준(今俊)이 도망하여 여진으로 들어가 아지고촌(阿之古村)에 살았는데, 이를 김지선(金之先)이라 불렀다.”
“평주의 승려 금행(今幸)의 아들 극수(克守)가 처음에 여진으로 들어가 아지고촌에 살면서
여진의 여인에게 장가들어 아들을 낳으니, 고을태사(古乙太師)라 하고,
고을태사가 활라태사(活羅太師)를 낳았는데, 활라태사에게는 아들이 많았다.
장자를 핵리발(劾里鉢)이라 하고 막내를 영가(盈歌)라 하였는데,
영가가 가장 웅걸(雄傑)하여 군중의 마음을 얻었다.
영가가 죽고나서 핵리발의 장자 오아속(烏雅束)이 자리를 잇고,
오아속이 죽고 나서 동생 아골타가 서게 된 것이다.”
3.<동사강목> 조선 후기 안정복 저
"김준은 삼형제인데 김준이 여진으로 망명할 때 두 형제를 두고 혼자서 갔다."
4.<몽태금태조> 일제강점기 국학자 박은식 (1911년)
"무릇 대금국(大金國) 태조 황제는 우리 평주인(平州人) 김준(金俊)씨의 9세손이요,
그 발상지는 지금 함경북도 회령군이요, 그 민족의 역사를 말하면 여진족은 발해족의 변칭자(變稱者:고쳐서 달리 부르는 것)요, 발해족은 마한족의 이주자가 많은지라. 금국 역사로 말하면 두만강변 일개 소부락으로 굴기하여 일거에 요(거란이 세운 국가)나라를 멸하고 재거(再擧)에 북송을 취하여 지나(支那:중국) 천지에 주권을 장악했노니,
같은 땅에서 나온 우리 민족의 사람으로 특별히 천제(天帝)의 사랑하는 아들이 되어 무등(無等)한 복록(福祿)을 받고 무상(無上)한 광영(光榮)을 발표함은 실로 단군 대황조(大皇祖)의 음덕과 백두산의 영우(靈佑)로 인함이라"
대충 찾아봐도 우리 사서에 이렇게 많은 기록이 있네요ㅋㅋㅋ
도대체 무슨 근거로 막말을 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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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우리보다 객관적 시각을 견지할수 있는 송과 청의 사서를 볼까요
1.<삼조북맹획편> 송 서몽신
"여진의 시조 건푸는 신라로부터 달아나 아촉호에 이르렀다. 돌아갈 데가 없어 완옌부에 의지하여 완옌을 성씨로 삼았는데 나이 60여세에 아직 처가 없었다. 그 때에 이들은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능멸하며 제도와 법도가 없었다. 건푸는 나무를 깎아 약속하는 의미를 세워 사람들에게 빚을 놓아 이자를 생기게 하고 농사를 부지런히 짓게 하였으며 가축을 도둑질 한 자에게는 형벌과 배상의 법을 마련하였다. (중략) 이웃의 추장이 딸이 있었는데 나이 40여에 아직 미혼이었다. 소와 말, 예물을 가지고 건푸에게 시집을 갔다. 뒤에 여진의 여러 추장이 동맹을 맺고 그를 추대하여 수령으로 삼았다."
2. <흠정만주원류고> 청 건륭제
'금의 시조 합부(哈富)는 처음 고려에서 완안부로 거주하니 마침내 완안부 사람이 되었다.
안출호(安出虎)에 거주하였으니 금을 안출호라고 한다'
3.<송막기문> 남송 홍호 저
"여진 추장은 신라인으로 성은 완옌이다.",
"금나라가 건국되기 이전 여진족이 부족의 형태일 때, 그 추장은 신라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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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한족과 전혀 관계가 없음에도 영토 내의 모든 역사를 자신의 역사로 편입시키고 있습니다
우리는 위와같은 역사적 실재를 통하여 우리와 금의 공통성을 충분히 주장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금사를 적어도 우리 역사의 방계로 편입함을 이론으로 완성한다면
고구려와 발해에 대한 중국의 억지논리에 대한 대처로서 매우 적절하다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