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난 주제라..
광개토대왕 -- 중국 삼국시대가 끝나고 5호16국 시대의 틈을 노려, 말갈, 거란 정도 휘어잡은 것이지,
북중국의 강국을 정면승부로 쳐들어가서 뺏은 것은 아니고..
장수왕 -- 남진정도 했고..
김유신 -- 중원도 아닌 백제 정도 침입에서 구원투수로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불을 끄긴 했지만, 야구로 치면 구원투수.. 다른 나라를 공세적으로 쳐들어가서 정벌한 경우 없고.. 황산벌이야 허둥지둥 급조해 나온 백제군에 10:1 (전문가들은 당시 백제군 1만5천병 예상, 그래도 3:1)로 수적으로 질 수 없는 싸움이었고, 실제 사비성을 점령을 주도하고 백제 주력군과 대치하다가 백제 내부반란으로 의자왕을 사로잡은 것은 당나라 10만 대군이라.. 고구려 멸망도 당고종때 100% 당나라 힘으로 한 것이라, 김유신이 고구려정벌에서 한 것이라고는 겨울철 평양 근교에 고립돼 전멸 직전인 당나라 군대를 지원하러 남들 다 못간다고 할 때 쌀부대 끌고가서, 당나라에 쌀 전달하고 온거라.. (영화 '평양성' 이거 역사적으로 거의 가공 SF)
강감찬 -- 6차에 걸친 거란 침입을 다 혼자 막은 것도 아니고.. (서희도 1차례 막고 영토를 확장)
마지막 침입에서 거란의 침입로를 미리 예상하고 개전부터 적에 데미지를 주고, 우회하여 개경직공에 나선 적을 추적하여 개경을 포기하고 후퇴하도록 했고, 적의 귀환로를 미리 예상해서 귀주 인근에서 수성이 아닌 들판 정면승부를 펼치다가, 김종현 1만 기병 뒤치기도 우연이 아닌 아마 강감찬의 작전이었을 것으로 봐짐.. 뛰어나긴 하나, 30만 40만으로 안되는 전쟁을 전쟁말기라 거란군과 전투에도 능한 고려군을 상대로 후방병참도 없이 비록 황실기병 정예이긴 하나 딸랑 10만으로 고려원정에 뛰어든 거란의 판단미스도 커서..
을지문덕 --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청야 산성전투 전술를 딱히 을지문덕이 그걸 개발했다고 할 수 없고..고구려가 중원과 첫 전쟁이라 고구려 국력이 살아있을 때였고 고구려 산성, 청야 전쟁방식도 중원이 첨 겪는터라
중국측이 넓은 중원에서 전투하다 산성위주의 고구려 전술에 파악치 못하고 준비하지 못해 애먹었으리라고 봐짐.. 쪽수로만 밀어붙이면 된다는 생각이라.. 그뒤 당나라 태종도 딱히 수나라와 달라졌다고 할건 없지만.. 당 고종(측전무후)은 달랐음.. 꼬드기는 신라를 끼기도 했지만, 전쟁을 수십만의 1회성 대군몰이이 아니라,, 빈번하게 수만 단위로 쳐들어가서 고구려 힘을 서서히 빼는 식으로 가서.. 고구려를 지치게 하여 북방방어선의 힘을 빼고.. 그래도 신라가 뒤에서 쌀부대 지원 안했으면, 너무 깊이 들어가다가 중간에 당 주력도 몰살당할 위기가 있었기고 당의 힘만으로 고구려 멸망은 쉽지 않았다고 봄
윤관 -- 대단한 사람이나 십수만을 동원해서 여진을 친 것이라.. 물론 그 여진이 30년 뒤에 금나라를 건국하는 싹수있는 여진이긴 하나.. 여진이 국가급으로 정비되기 전이라.. 해볼만한 전쟁이었음..
최영 -- 애국자이자 고려의 기상을 최후에 보여준 사람.. 고려는 홍건적 침입, 거의 정규전인 왜구의 침입을 겪고도 요동을 치는 뒤끝 저력을 발휘함.. 이거는 대단한 기상임.. 북진정책이라는게 단지 말로 그친게 아니란 걸 보여줌.. 고려인으로 전주에서 고려 원나라 접경지로 이사가 원나라에 빌붙어 살던 가문의 이성계가 그 습성을 못 버리고 중원대륙하면 빌빌 기는 습성이 있어서.. 위화도 회군 당시 요동은 무주공산임.. 암두 없음.. 몽고도 아주 망한 몽고도 아니고 북원이 건재했었고 명은 중원도 채 정비하기 전이라.. 조선이 건국하고도 "조선이 10만대군으로 요동을 치면 어뜩하냐"고 발발기던게 명이었음.. 명의 소유도 아니었고 북원의 소유도 아닌 나라도 없이 족보 없는 동네 군벌따위나 설치던 요동이라 1차 정벌처럼 그냥 입성하면 되는 상황이었음.. 괜히 최영이 요동치자고 한게 아님.. 가면 어서옵쇼하는 상황이었고, 고려 요동성 먹었다고 과연 명이 그 요동찾겠다고 새 나라 정비하기도 전에 중원을 비우고 동북지역에 십수만의 대규모 원정을 할 여력이 있었나 싶음..
권율 -- 전라 의병을 몰고 가서 행주산성의 기적을 만들었으나 그걸로 끝임.. 원균을 개패듯이 패서, 백수십척의 판옥선을 날려버린 데 일조함..
알렉산더 -- 장창에 기병을 넣어 적을 측면을 치는 전술을 이 사람이 개발했는 지는 몰라도 암튼 실전에서
보여준 것은 이 사람이라.. 페르시아를 친 것은 배꼽이 배를 치는거라, 명량과 비교할만 하고.. 그건 인정.. 페르시아 쳐서 그 힘을 갖고 이집트 정벌한 것이라 그건 페르시아를 흡수한 힘이고.. 헬기가 있는 요즘 세상도 치기 힘든 박트리아(아프가니스탄)를 정벌한건 인정.. 걔들이 그 당시 상황이 좀 안좋았나.. 지형이 험준하나 이슬람이 생기기 전이라 뭉치는 구심점이 없었나..
시저 -- 로마제국이라는 힘을 바탕으로 갈리아 정도 치고, 갈리아도 쳤으니 그 여세로 이집트 진 거는..
알렉산더처럼 마케도니아라는 작은 나라에서 페르시아를 치고 나간 것에 비하면 세발의 피.. 알렉산더 한테는 안됨..
징기스칸 -- 몽고를 뭉치게 한 리더쉽은 인정.. 하지만 몽고기병의 전술을 징기스칸이 개발한 것은 아니고..
징기스칸 살아생전에 중원을 통일한 것도 아니고.. 유럽원정을 간 것도 아니고.. 호라즘(우즈벡)하고 서하, 금정도 친 것인데, 십자군도 실패한 중동을 장악한 것도 후손들이라.. 몽고의 세계정벌을 전부 징기스칸업적이라 할 수 없고.. 인생의 대부분을 내전 치루다 보내, 나면서 부터 전쟁무기인 몽고초원을 통일했다는 점에 의미..
나폴레옹 -- 당시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인 프랑스를 가지고, 고만고만한 나라 하나씩 치다가.. 신장의 야망 노부나가 땅 늘려가듯 하나씩 따먹어, 포병장교출신이라 포를 이해하고 기동력을 중시해서 앞선 근대전술로 연전연승한건 인정하지만, 프랑스란 베이스가 있었다는 점에서, 알렉산더보다 낫다고 할 수 있는지..
이순신 -- 자기나라를 지키는 수비형 전투결과임.. 타지를 나가는 정벌전술은 없었고..
자기나라 안에서 전쟁이라 적군의 이동과 같은 정보전에서 먼저 우위를 점했고..
함포의 유무로서 적절한 전략을 취하는경우 원거리타격으로 연전연승할 수 있는
근간이 됨..
비록 명량, 노량 등에서는 수적으로 열세였지만.. 매전투가 수적열세에 있었던 것도 아니고..
작은 규모의 군력을 가지고 이기는 전투만 골라서 할 수 있는 전략이 있었고..
쫄기 쉬운 병력을 데리고 잘 싸우게 한 리더쉽이 있었고..
(왜군이 옆 고을까지 왔다고 정상 보고한 백성 등등 멀쩡한 사람 여럿 목을 침,
쫄기 쉬운 때 군기하나는 확실히 잡음)
노량은 이순신이 택한 장소, 시기도 아니었고, 순천에서 도망가는 소서행장 뵈기 싫어서 죽이러
간거라 원거기 함포를 효율적으로 이용하기 힘든 야전이 벌어진거고..
작은 나라의 장수로 태어나 자기 나라 지키기 위해 100년 전쟁머쉰들이 쪽수로 밀고
와도 부하들 쫄지 않게 적당히 목도 치면서 순간순간 떼죽들을 상대할 장소를 정해서,
가지고 있는 원거리 댐지를 잘 사용한 것이라 봐짐..
둔전이나 어민통행세 등으로 군비를 욕 안 먹고 무리없이 충당할 줄 알아
경제에 대한 개념도 있었고, 무엇보다 벼슬에 욕심도 없이 임란이 있기전부터
상관에 옳은 말을 하다 2-3번 좌천된 점은 다시 보기 어려운 충직한 사람임
이거는 조부가 사화에 휘둘려 폐가할뻔한 일이 있어 영향을 받은듯 함.
작은 나라에서 태어나 자기 나라 지키는 데에는 이보다 더 효율적으로 군대를
지키기 어렵고, 죽음직전까지 몰리고, 칠천량이후 명나라해군이 참전해,
해군지휘군을 갖고 조선수군 작전에 관여하는 등 주변의 어려운 상황이 많았음에도,
명나라 해군까지 휘둘러서 노량에 참전시켜 죽어도 싸우게(등자룡 사망) 한 점은,
전쟁을 위해 장군으로서 모든 덕목을 갖췄다고 봐짐.
참고로 임란에 참전해 목에 힘주던 명나라 장수들 임란 끝나고 후금 치러갔다가
만주에서 거의 다 요절해 쪼금 시원한..
* 누가 우위인지는 각자 알아서들 판단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