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자에 고려가 표문을 상주하는데 언사가 많이 부실하여 짐이 이미 담당 관청에 이를 규명하도록 명했다. 듣자하니 그들은 수도 개경으로부터 압록강에 이르기까지 요충지에 비축하는 군량이 매 역마다 1, 2만서 혹은 7, 8만석 혹은 십수만 석에 이르며 사람을 보내 동녕부의 여진을 유인하여 국경을 넘어오게 하고 있으니, 이는 그 뜻에 반드시 깊은 음모가 있는 것이다...(중략)...지금 요동은 군량이 모자라 군사들이 굶주리고 고단한데, 만약 즉시 사령창의 식량을 내어 그들을 구휼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고려로 하여금 도망병을 꾀어 드이려는 마음을 일으키게 할 것이니 좋은 계책이 아니다. 만일 고려가 20만 군대를 내어 쳐들어오면 여러 부대는 어떻게 막겠는가. 이제 건축과 보수를 잠시 정지하고 임시 막사를 지어 10년 간 거주한 후에 다시 공사를 시작하라. 옛 사람의 말에 사람이 수고로우면 화란의 근원을 막을 수 있다고 했으니 깊이 생각해 볼 일이다.
위화도 회군에 논의에 앞서 위화도 위치를 규명해야 될 것 같습니다. 흔히 위화도를 압록강 부근이라 하고 만주는 공지라 하는데 동북면과 서북면이 만주의 행정기구 라는 것은 아시는 지요. 면은 여진족의 행정기구 명칭입니다. 식민 사관 매식자가 억지로 고려의 영토를 한반도 축소 시키다 보니 이상한 결과나 나온 것이지 면(面)은 여진족의 행정기구 명지자 지금도 우리가 쓰는 명칭입니다. 쌍성의 위치는 지금도 모르지만 내몽고로 추정하기도 합니다. 결론은 최소한 공민왕 때에는 이미 만주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고 명과 일전을 할 수 있는 국력 이었다는 것 입니다.
명나라의 철령에 관한 영토 주장은 고려에 대한 직접적인 침략의 의사를 밝힌 선전포고 입니다. 그래서 방어를 위한 선제공격으로 출병 한거고요 이미 최영이나 이성계등은 몽고군과의 연합으로 주원장 등의 홍건군과 한번 맞 붙어본 경헙이 있기에 최영이 섣부른 결정을 내렸다 보기는 어렵습니다.
결론: 요동 출병은 단지 정치적 위세를 보이기 위한 무모한 결정으로 보이지 않고 나름 세밀한 분석에 의해서 출병한 거로 위화도 회군을 주도한 이성계나 정도전은 개xx 라는 겁니다.
만주 내몽골과 발해만의 중요성은 이 지역의 정치적 변동이 일어나면 한반도나 중국만이 아니고 유라시아 전대륙으로 파급이 된다는 것을 지난 역사를 통해 일 수 가 있습니다. 일찍이 독일과 러시아는 이 정치적 변동의 늘 피해를 입었기에 히틀러나 스탈린은 이 지역을 굉장히 중시 여겼다고 합니다. 중국의 동북공정은 정치적인 면을 봤을 때 단순히 고구려의 역사나 북한 땅의 욕심이 아니라 이 지역의 영구적 정치적인 안정을 꾀한 그들의 자구책입니다.
중국은 이 지역의 변동이 자국의 재앙으로 변함을 최근 일본의 만주국 성립과 더불어 중일전쟁으로 확인 하였기에 이 지역의 정치적인 안정이 그들의 사활적 이익으로 동북공정은 더욱 가속화 되면 되었지 중단하진 않을 것으로 보이네요.
위에 착각하시는 분들 많으신데... 요동이라는 지역의 중요성이 문제가 아닙니다. 그곳이 동북아의 요충지라는거 모르는 사람 없습니다. 실제로 그곳을 경락할 역량이 고려에게 있었느냐가 중요한거죠. 실제 그럴 역량이 있었다면 그곳을 취함이 마땅합니다. 근데 그럴 역량이 안됐으니 문제인거죠.
1차 요동정벌때 최대로 잡아도 10만 이하로 예측되는 병력의 보급도 실패해서 함락시킨 요동성을 버려두고 퇴각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게다가 이후 활발해진 왜구의 공격으로 개성이남의 곡창지역이 아예 쑥대밭이 된 상황에서 어떻게 대군을 일으켜 천리길을 진군해 요동을 점령하고 그곳의 주민을 먹여살리고 사방의 적을 막아낸단 말입니까?
일단 고려라는 나라의 시스템의 이해가 있어야 겠지요. 고려는 봉건제 국가입니다. 중앙 집권적인 국가 아니고요. 그러기에 동북면 이나 서북면이라는 행정기관을 세우고 책임자를 세웠다는 것은 고려가 완전히 장악 했음을 의미 합니다. 이성계의 고향이 길림이나 장춘으로 추정되고 있지요? 이씨 일가가 고려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쌍성 공략 때 부터인데 쌍성의 위치를 식민사관에서는 모른다 하였는데 최근 쌍성유적이라 추정 될만한 유적이 내몽골에서 발견 되었습니다. 이자춘은 고려에 귀속하면서 동북면 만호가 됩니다. 일단 이차춘이나 이성계 쫒겨 났다는 기록이 없으니 만주는 확실히 고려의 영토였음을 알수 있고 고려의 통제하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요동의 위치에 관해서 식민사관이 고려의 영토를 한반도로 쪼그려 트려 놓고 요동의 위치를 추정해 놓아 엉뚱하게 해석되고 있는데요 동북면과 서북면의 이름만 보면 만주 전역이거든요 그럼 요동의 위치는 어딜 까요? 조선이 만주를 상실한 시기는 많이 잡으면 청의 건국시요 늦게 잡으면 강희제가 봉천성을 설립한 후로 추정이 되고 있습니다. 그전에는 조선의 영토였고 고려의 영토 였습니다. 동북면과 서북면을 양계라 하는데 여기는 양계는 고려장성을 기준으로 나눈 것이라 합니다. 고려장성이 만주 한 가운데를 뚷고 지나가는 것을 표현한 지도 원본이 서울대에 있다는데 공개를 안하고 있습니다. 왜 일까요? 영인본만 나돌아 다니고 있지요. 이제 만주가 확실히 그 당시 고려의 영토였슴을 아시겠죠? 윗글의 서북피아양계만리이란지됴西北彼我兩界萬里一覽之圖를 참조 하세요.
보급은 자국의 영토라 해도 실패 할 수 있죠 언제나 성공해야 하나요? 북관 대첩비를 다룬 역사 스페살에서 본 내용인데 가등청정이 함경도 공략을 위해서 함경도 정보수집에 총력을 기울였고 그것이 일본에 있더군요 그 정보에 따르면 함경도의 생산량이 상당하더라고요 일단 정보의 신뢰성을 고려하더라도 함경도(물론 그 당시의 합경도는 만주와 연해주를 포함 한 것이라 보아야 함)의 생산량이 상당한 것임을 알 수 있고 개경의 곡창지대에 의존하지 않아도 충분히 보급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