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문제에 대해서는 아직도 우리나 일본에서도 의견이 분분 합니다.
일단 문자 그대로 보면 왜가 한반도 남부를 침입해서 백제,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는데, 이에 백제 신라가 도움을 청해서 호태왕이 "왜"를 박살냈다는 요지입니다.
일부 소수학자들은 이주갑인상설을 도입하면 일본의 한반도 진출시기라 적힌 일본서기 내용과 일치하는 거라고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이주갑인상설은 일본서기 일부에는 맞고 일부는 또 자기들 주장의 연대가 맞아서 약간 뒤죽박죽입니다).
여기서 분명한 건 삼국사기의 기록, 그리고 송서의 기록, 광개토대왕비의 기록, 일본서기의 기록을 교차검증해보면 당시 "왜"라는 제법 강대한 군사력을 갖춘 세력이 한반도에서 주도권을 가졌다는 것이 사실이라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 주류사학에서는 아직 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다수 의견으로 알고 있습니다. 즉, 칼리님의 의견처럼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높이기 위하여 왜가 침입해서 두 나라가 위기에 처한 것을 강조한 것이 아닌가라는 의견입니다.
그러나 이덕일, 이희근과 같은 소장파(였을 때 주장한 내용, 지금은 학계에서 무시되는 분위기인 이덕일씨)의 주장인 "왜"가 임나지역에서 세력을 넓힌 한반도 거주민이었는데 고구려에 패해 열도로 도망갔다는 주장이 다소 설득력을 얻고 있습니다.
계속 검색해 보니 제가 쓴 "왜"라는 세력이라는 발제글 밑에 붙은 쎄근한 펭귄님과 냠냠님의 글이 이미 하나의 가설로서 언급하는 사람들이 있더군요.
대표적으으로는 김상씨입니다. 재야사학자이긴 하지만 주류사학의 사료를 재해석하는 자연과학 교수로 알고 있습니다.
김상씨와 기타 소장파의 주장을 결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일단 "왜"는 한반도의 세력, 혹은 한반도와 열도에 걸쳐 있는 해양세력이다...(이덕일은 한반도, 김상씨는 한반도 거점, 일본에 분국을 가진 세력, 그리고 어떤 아마추어 사학자는 삼국사기 일본서기 그리고 유전학 언어학을 기반으로 하여 인도 동남아시아의 이주민족이 한반도 남부와 열도에 동시 정착하여 서로 연계된 세력)
왜와 가야는 구분하기 어려운 세력이고, 이들의 일부는 신라와도 연계되어 있고 이후 백제와도 연결되는데, 신라와는 주로 적대, 백제와는 주로 우호를 한다. 다만 백제와 적극적 연대를 하는 시기는 4세기 이후다.
4세기 이후 백제와 주로 연대하는 것은 이들이 열도로 후퇴하고 자신들의 한반도 연고권을 백제와 협력하여 주장하기 위함이었다.
이들은 백제의 식민지도 그렇다고 백제가 이들의 식민지도 아니었으나 연대에 따라 백제 왕실에 주도적인 영향력(왕위 찬탈하여 친왜 세력을 앉히거나 하여)을 끼친 세력-김상
칠지도는 두개가 있었고 하나는 하사-백제우위시기-하나는 헌상-왜의 군사력 의존시기-로 보이며 현재 남아있는 칠지도는 하사한 것이다.
한 아마추어 사학자는 "왜"라는 단어가 일본인을 가르키는 것이 아니라 해안(열도, 한반도, 남중국해안)에 거주하는 군사력 갖춘 떨거지들을 총칭하는 의미라고 주장함.
또한 이들이 이런 이름을 가진 것은 이들이 같은 뿌리를 가진 이주세력이었기 때문임-유전학적으로 동남아시아, 인도계 이주민
이들은 한반도에서 가야, 신라로 통합되었고 신라의 박, 석씨는 이들의 세력임.
이후 선비, 흉노족이 침입하여 초기 신라를 멸망시키고 이를 계승한 것이 김씨세력임- 김알지 이후
그리하여 한반도의 이주민의 유전자는 동남아 유전자와 선비흉노의 유전자가 복합되어 있음.
어원학적으로 한국어는 지금까지 알려진 것과 달리 우랄 알타이어가 아니라 인도계 드라비다어, 타밀어에 더 가깝고 몽골, 만주어, 터키어와는 확연하게 다름.
왜라는 단어가 지금 남아있는 의미와 한자 자체의 의미 모두 비칭이라는 점에서 왜가 만일 의미있는 세력이었다면 우리가 부르는 '왜'라는 비칭 이외의 그들 스스로 부르는 세력 이름이 있었을 것입니다.
일본은 훨씬 뒤에 나오는 국가명이기 때문에
'왜'라는 비칭만 남아있는 세력을 의미있는 세력으로 보려는 의도는 참 이상합니다.
일단 왜곡의 형태가 어떤 것인지는 논란이 분분하지만, 광개토대왕비의 수정 사실은 맞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주갑인상설? ... 이건 어디서 나온 용어인지 참... 인터넷 검색하게 만드네요.... 그냥 일본서기는 날조다 라고 하면 될 것을 120년 차이 나게 기록된 것이라고 굳이 사실성을 강조하여 정사로 만드려고 하는 의도는 무엇인가요?
우리나라 보통 사람들은 일본서기의 이주갑인상설 같은 것은 대부분 알지도 못하는 용어 입니다. 그냥 풀어 써도 되는 것을 저렇게 사용하는 이유가 무언지.
왜라는 글자는 동이東夷=동시東尸=동왜東倭 등으로 혼용해서 중국에선 쓰였습니다. 왜라는 종족은 미스테리한 종족으로 왜 하면 일본이라고 단정을 짓는데 아닙니다.
왜의 초음(원음)은 가라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왜를 언급 할 때 가야(가라)를 언급하는 것입니다. 왜와 가야는 동계이고 신라는 사라로 역시 가라족입니다. 결국 신라 가야와 왜는 동계입니다. 한韓 당唐 예濊 리夷 왜倭 등의 초음(원음)이 가라임은 최춘태 교수 등이 논문으로 증명하고 있습니다.
광개토 대왕 비문에 있는 왜는 누굴 말하는지 논쟁이 많지만 아지도 확실한 결론은 없습니다.
저는 동이==동왜 라는 것에는 조금 이견이 있습니다.
동이는 분명이 우리민족에 대한 중국의 비칭이 맞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동이라고 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훨씬 높다고 생각합니다. 일부 의견 대로 구리 또는 고려의 형태로 '리' 또는 '려' 형태로 불렀을 가능성이 훨씬 높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동이==동왜 라면 우리나라 기록에는 왜라는 비칭을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을 것 입니다.
아무리 발음이 유사해도 한자로 음차를 하는데, 그 한자의 뜻까지 무시하면서 사용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중국의 외국어 음차를 보시면 아실 것 입니다.
한자 음의 초음이나 원음에 대한 논의는 저는 빠지겠습니다. 알지도 못하는 것이고, 누가 그렇다고 해도 찬성도 반대로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영락) 9(399)년 기해에, 백제가 맹세를 어기고 왜(倭)와 통하였다. 왕이 순시차 평양에 갔을 때 신라가 사절을 왕에게 고하기를 "△인들이 국경에 가득차 성과 못을 파괴하고 있으니 이 노객(老客)을 백성으로 여기시는 왕께 구원을 요청합니다"고 하였다. 태왕은 은혜를 베풀고 그들의 충성을 칭찬하며 사절들이 돌아가 △△를 알리도록 하였다.
(영락) 10(400)년 경자에, 보병과 기병 5만 명을 보내 신라를 구원하였다. 남거성으로부터 신라성에 이르니 왜△가 그 안에 있었는데 관군이 곧 이르자 왜적이 물러났다. △△△△△△△△ 뒤에서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라에 이르러 성을 쳐 빼앗아 탈환하였다. 안라인(신라인) 수병(戍兵)이 신라성과 △성에서 왜를
궤멸시켰다.
이부분은 님의 의견도 옳은 말입니다.
제가 예전 읽은 해석의 내용을 기억에 의존해서 적은 내용입니다.
아래 내용을 참조해 주세요.
[광개토왕릉비의 신묘년(391년)에 해당하는 기사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이 부분의 내용은 신묘년에 일어난 구체적 사건을 적은 기사라기보다는 396년부터 407년까지 사이에 고구려가 벌인 남진정책의 명분과 성과를 집약 기술한 집약문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부분은 비문이 파손되고 "海"의 경우 "每"를 고친 것으로 볼 여지가 있어서 비문의 일부가 일제에 의해 조작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원문: 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 渡海 破百殘□□新羅 以爲臣民.
백잔(백제), 신라는 과거 속민으로 조공을 해왔었다.
그런데 왜가 신묘년(391년)에 내습하니 바다를 건너 백잔, □를 격파하고 신라를 [구원하여] 신민으로 삼았다.
그런데 왜가 신묘년(391년)에 바다를 건너와 백잔 □□ 신라를 격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논란 부분을 참고할 것)
일본에서는 손상된 글자를 "任那"라고 주장하여 "왜가 바다를 건너(渡海) 백제, 임나, 신라를 격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석하는 주장이 제기되어 왔다.[4]
반면, 한국에서는 손상된 글자에 대해 같은 기사의 바로 다음에 "영락 6년에 왕이 몸소 수군을 이끌고 백잔을 토벌했다."고 쓰여있는 것과 당시 백제와 왜가 연합해 신라를 압박했던 상황, 광개토왕릉비의 여러 기사에서 백제와 왜가 연합하고 고구려가 왜를 궤멸시켰다고 쓰여 있는 것을 근거로 "(고구려가) 신묘년에 왜가 내습하니 백제, 왜를 격파하고 신라를 구원하여 신민으로 삼았다."라고 해석하는 주장이 많다.
그밖에 고구려가 백제를 상대로 남진전쟁을 일으킨 것은 백제와 연합한 왜가 제후국인 신라를 공격했기 때문이라는 전쟁 명분을 기술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최근에는 임나일본부설에 대해 일본인 학자들도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5]]
- 위키백과
위에도 언급한 내용이지만 광개토태왕비문 자체가 세계최대 비문이라고 해도 1802자에 불과합니다.
이런 짧은 문구에 장수태왕이 자기 아비의 공덕을 찬양하고 업적을 열거하기도 바쁜 상황에서
위에 어떤 사람은 뭔 있지도 않는 문자 그대로 왜가 백제,신라 신민??같은
전범 잽 극우들의 해괴한
임라일본부설 자체를 반증할 어떤 문구도 없거니와 최근에는 이형구교수를 중심으로 이런
조작이 더욱 분명히 드러나고 있군요.
"광개토대왕비 탁본 비교분석 결과 日 조작 확실"
이 교수는 쌍구가묵본은 물론 이와 거의 같은 1909년 상하이 유정서국 탁본부터 이후 100여년간 10여종의 탁본을 비교·분석한 결과 문제가 되는 부분의 글자체가 계속 변화하고 흐릿해짐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이 교수는 사카와 중위가 쌍구가묵본을 뜰 당시 글자가 불분명한 부분에 석회를 발랐기 때문이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1981년 중국에서 나온 저우윈타이(周雲台) 탁본에서 '倭滿'이 '倭寇'로, '倭潰'가 '大潰'로 각각 바뀐 것은 당시 바른 석회가 비바람에 모두 제거된 결과라고 그는 설명했다.
아울러 이 교수는 실제 작업해본 결과 비문에 종이를 대고 직접 쌍구가묵본을 뜨기란 불가능했고, 도쿄국립박물관에 있는 쌍구가묵본 문자는 서법이나 서예의 운기가 전혀 없는 인공적 '도안문자'여서 역사 왜곡을 시사한다고 덧붙였다.
이 교수는 "최근 중국 지린(吉林)성 지안(集安)시의 광개토대왕비를 방문해 살펴본 결과 문제가 된 부분의 글자가 끌질한 흔적을 찾아냈다"며 "일본 군부가 처음부터 '왜'자에 주목하고 비문 기록의 주어를 '왜'로 삼아 이를 중심으로 글자를 조작, 광개토대왕비가 마치 왜의 전적인 양 조작했음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쌍구가묵본은 백지에 글자 윤곽을 베낀 후, 글자 사이를 먹물로 채워 글씨가 하얗게 나타나게 하는 탁본 방식이다. 쌍구가묵본은 1883년 일본 육군참모본부 소속 사카와 가게노부 중위가 만들었다.
탁본 가운데 문제가 되는 경자년 기록에는 '왜가 신라성을 가득 채우고 성을 무너뜨렸다'는 내용이 있다. 이에 대해 이 교수는 경자년 기록 중 '滿'은 '도둑 구(寇)'자를, 이어지는 왜(倭)는 '대(大)'자를 각각 바꾼 조작이라고 분석했다.
이에 따르면 경자년의 실제 기록은 '왜가 신라를 궤멸시켰다'가 아니라 '왜구가 고구려 원군과 신라군에게 궤멸됐다'는 내용이라는 설명이다.
이 교수는 쌍구가묵본은 물론 거의 같은 1909년 상하이 유정서국 탁본부터 이후 100여년간 10여종의 탁본을 비교·분석한 결과 문제가 되는 부분의 글자체가 계속 변화하고 흐릿해짐을 확인했다고 강조했다.
이 교수는 사카와 중위가 쌍구가묵본을 뜰 당시 글자가 불분명한 부분에 석회를 발랐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이에따라 1981년 중국에서 나온 저우윈타이 탁본에서 '倭滿'이 '倭寇'로, '倭潰'가 '大潰'로 각각 바뀐 것은 당시 바른 석회가 비바람에 모두 제거된 결과라고 덧붙였다.
문헌 고고학적으로 봐도 열도는 우리의 개척 건국사로 고조선시대 본격적 삼한, 가야, 백제가
통합하고 외치영토로 분명히 다스린 우리의 영토였고 열도는7세기 후반에 가서야 그나마 국호가
나옵니다. 이후 나라헤이안 시대도 잽 극우들이 교묘히 물타기를 하기 위해 당풍이 극세했니
당이 어쩌고 하지만 사신왕래나 정치,문화 상황을 보면 우리의 신라, 발해로의 견문사가 압도적
횟수로 많군요. 심지어 남북국시대에 신라 임금에 의해 열도의 사찰등 다분히
내정간섭에 준하는 사항등 여러가지 통제까지 받았던 속국적 상황이였고.
이런 흐름이 이후 나라헤이안기 후반에 우리쪽
신라 발해의 본토가 어지러운 상황에서 문호를 닫고 쇄국적 상황에 있다 고려가 들어서면서
수백척의 함대를 이끌고 문호 개방에 대해 어쩌고 하는 기록부터 여전히 고려의 속국인
일본으로 기록되어 서토사서에도 비춰지고 있었던 것이고.
이후 조선 전,중기에도 세력이 여전히 서열도에 머물려 있던 왜국의 입장에서
조선대국관에 입각해서 조선의 임금을 황제로 지칭.
남북국시대(발해-신라)
동북아 해상무역을 장악한 신국(神國)의 신라.
성덕왕(聖德王) 30년,
일본국 병선 300척이 바다를 건너 우리의 동쪽 변경을 습격하였는데, 왕이 장수를 시켜 군사를 내어 이를 크게 깨뜨렸다. (日本國兵船三百?, 越海襲我東邊, 王命將出兵, 大破之.)
- 제대로 상륙도 하지 못하고 박살난 일본, 결국 용서를 빌기 위해 서기 742년에 사신을 파견하지만‥
애장왕(哀莊王)
5년 여름 5월에 일본국이 사신을 보내와 황금 300량을 바쳤다. (五年夏五月, 日本國遣使, 進黃金三百兩.)
- 이를 기특하게 여긴 신라는 드디어 일본을 용서하고 속국으로서 인정한다. 서기 806년 속국에게 하교하는 신라.
애장왕(哀莊王) 7년,
봄 3월에 일본국 사신이 왔으므로 조원전(朝元殿)에 불러 접견하였다. 교서를 내려 말하였다. 『절을 새로 짓는 것을 금하되, 다만 수리하는 것은 허락한다. 또 수놓은 비단을 불교 행사에 사용하는 것과 금과 은으로 만든 그릇의 사용을 금한다. 마땅히 담당 관청으로 하여금 이를 널리 알려 시행하도록 하라.』(七年春三月, 日本國使至, 引見朝元殿. 下敎禁新創佛寺, 唯許修葺. 又禁以錦繡爲佛事, 金銀爲器用, 宜令所司, 普告施行.)
- 사찰을 수리하는 것조차 '종주국' 신라의 허락이 없으면 감히 하지 못했던 일본. 이후 '속국' 일본에 대한 종주국 신라의 사랑은 계속되고… 신라의 어버이와 같은 사랑에 감동한 일본은 서기 882년, 보답한다.
헌강왕(憲康王) 8년,
여름 4월에 일본국 왕이 사신을 보내 황금 300량과 야광주[明珠] 10개를 바쳤다. (八年夏四月, 日本國王遣使, 進黃金三百兩·明珠一十箇.)
근자에 사신이 그곳에 가서 물어보고 알았지마는, 임천각(臨川閣)에는 장서가 수만 권에 이르고, 또 청연각(淸燕閣)이 있는데 역시 경(經)ㆍ사(史)ㆍ자(子)ㆍ집(集) 4부의 책으로 채워져 있다 한다.국자감(國子監)을 세우고 유관(儒官)을 선택한 인원이 완벽하게 구비되어 있었으며, 횡사(黌舍 학교를 말함)를 새로 열어 태학(太學)의 월서계고(月書季考)하는 제도를 퍽 잘 지켜서 제생(諸生)의 등급을 매긴다. 위로는 조정의 관리들이 위의가 우아하고 문채가 넉넉하며, 아래로는 민간 마을에 경관(經館)과 서사(書社)가 두셋씩 늘어서 있다. 그리하여 그 백성들의 자제로 결혼하지 않은 자들이 무리지어 살면서 스승으로부터 경서를 배우고, 좀 장성하여서는 벗을 택해 각각 그 부류에 따라 절간에서 강습하고, 아래로 군졸과 어린아이들에 이르기까지도 향선생(鄕先生 자기 고장의 글 가르치는 선생)에게 글을 배운다. 아아, 훌륭하기도 하구나!
-송나라 서긍의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 1123년의 내용)-
우리나라는 문물과 예악이 흥행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으며 장삿배가 연이어 내왕하여서 값진 보배가 날마다 들어오니, 중국과 교통하여도 실제로 소득이 없을 것입니다. 거란과 영구히 절교하지 않을 터이면 송 나라와 교통함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하니 따랐다.
<고려사절요 문종 12년>
“옛 사서(역사책)에 따르면 고려의 풍속은 사람들이 모두 깨끗 하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다. 그들은 항상 중국인이 때가 많은 것을 비웃는다.
(고려인들은) 아침에 일어나면 먼저 목욕을 한 뒤 집을 나서며,
여름에는 하루에 두 번씩 목욕을 한다.” -고려도경
倭國乃日本國也. 本名倭旣恥其名. 又自以在極東因號日本也. 今則臣屬高麗也 - 郭若虛.『圖畵見聞志』 卷6. 高麗國
왜국은 일본국이다. 倭라는 원래 이름을 부끄러워했는데, 극동에 있다고 해서 스스로가 일본이라고 부른다. 고려의 속국이다
天順三年,邊將奏,有建州三衛都督私與朝鮮結,恐為中國患
명사
천순3년(1459년 조선세조 제위당시) 변경장수가 보고하길 건주삼위의 도독이 몰래 조선과 결탁하였습니다. 이에 두려워하여 중국이 병이 나다.
세조실록
야인과 왜인들은 모두 우리의 번리이고 우리의 신민(臣民)이니 왕된 자는 똑같이 대우하고 차별을 없이 하여 혹은 무력을 사용기도하고, 내가 즉위한 이후에 남만, 북적, 이것은 하늘의 끌어들이는 바이지, 나의 슬기와 힘이아니다. 흑룡강, 속평강, 건주위, 올량합, 이만주 동창등 심처 야인과 삼위 달자가 관문을 두드리고 입조하기를 청하거든, 그 종인을 줄여서 후대하여 올려보내라
세조 40권, 12년(1466 병술 / 명 성화(成化) 2년) 11월 2일(경오) 3번째기사
시무8조에 관한 대사헌 양성지의 상소문
우리 나라의 인민(人民)은 무려 1백만 호(戶)나 되는데 그 중에서 활을 잘 쏘는
병졸이 30만 명이고, 정예(精銳)한 병졸이 10만 명이며, 용감한 군사가 3만 명입
니다.
(조선)황제 폐하(皇帝陛下)의 수(壽)가 남산(南山)처럼 높고, 덕(德)은 동해(東海)에 젖으시어...
성종 28권, 4년(1473 계사 / 명 성화(成化) 9년) 3월 13일(계묘) 3번째기사
일본국 경극전 경조윤 좌좌목씨 등이 사람을 보내 와서 토의를 바치다
태화 4년 5월 16일 병오일의 한낮에 백 번이나 단련한 철로 된 칠지도를 ○○○○가 만들었다. 온갖 적병을 물리칠 수 있으니 제후국의 왕(侯王)에게 주기에 알맞다. 지금까지 이런 칼이 없었는데 백제 왕세자 기생성음이 일부러 왜왕을 위하여 정교하게 만들었으니 후세에 전하여 보이라.
“이나리야마”에 새겨진 백제의 열도 지배
이두로 이 글을 다시 풀어보니 놀랍게도 이것은 고구려가 남침한 369년 당시 백제 땅이던 하동에서 후왕으로 있던 장수 집안이 동경까지 망명온 뒤 이곳에서 다시 백제 후왕으로 책봉된 내용을 담은 집안 이야기 였던 것이다.
이두로 풀이한 칼 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서기 471년에 “고” 확고는 조상이름을 적어 둔다. “오호 비꼬”어르신, 그 아들 “다가리 쪽니”어르신, 그 아들 “고리 확고”, 그 아들 “다사기 확고”. 그 아들 “바라 고비”, 그 아들 “가사 비리”, 그리고 그 아들은 “고 확고”이다. 오늘날까지 우리는 장수로서 대대로 섬긴바 그 임금님은 사기궁에 마실을 차리고 천하를 다스리시는 크신 확가 개로 대왕이시니라. 온 번 불리고 달구어 만든 이 칼에 우리 집안 내력과 뿌리를 적어두는 바이다
...................
이렇듯이 이나리야마 쇠칼의 글은 5세기 가운데 즈음에 옛 일본의 관동, 관서, 규슈 등 세 곳에 백제가 다무로를 다스리고 있었으며, 왜 왕실은 백제 왕실에서 갈라져 나왔음을 밝혀주는 귀중한 역사자료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