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교과서를 통해서만 고조선을 접한 역사를 전혀 알지 못하는 학생인데요.
흥미로운 동영상인것 같네요. 제가 알고 있는 고조선이란 변방의 청동기 문화를 통해 발전한 제정일치의 부족국가와 위만조선 이후 철기를 수용하여 부흥을 하다가 우거왕때 한나라의 한무제에 의해 멸망한 나라로 알고 있었거든요
개인적으로 한반도 남부를 왜 고조선 영토에서 빼는 것인지 이해가 안됩니다. 특히 영향권이라면 더욱 더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죠. 삼국사기 신라본기를 보면 신라를 건국한 사람들은 조선의 남겨진 백성들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기록은 신라가 있었던 지금의 경삼남도 지역이 고조선의 영토였음을 알게 해줍니다.
특히 고려사 지리지에는 강화도 마리산 꼭대기에 있는 참성단은 단군이 하느님께 제사지내던 곳이며 강화도의 전등산에 있는 삼랑성은 단군의 세 아들이 쌓은 것이라고 나왔습니다. 이는 경기도지역도 고조선의 영토였음을 알게 해주죠. 즉 한반도 남부가 고조선의 영토였다는 것입니다.
특히 유물로 볼 때 역시 한반도남부를 고조선 영향권에서 뺄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특히 동영상에 나오는 고인돌같은 경우는 북한에 1만여기 정도 있는 것으로 추정하는데 전라도지역에서만 북한의 고인돌 수의 두배인 2만여기가 발굴되었습니다. 남한 전체도 아니고 남한 중에서 전라도 지역에서만 2만기입니다. 이것만 해도 북한의 2배라는 겁니다. 그런데 어째서 한반도남부를 고조선 영향권에서 제외한단 말입니까..
비파형 동검같은 경우는, 그런 기술을 보유하고 있지 않던 집단이 그 같은 우수 문물을 수입했을수도 있을거 같아요.
대륙의 유물이 한반도에서 나왔다고 한반도를 대륙의 영향권 아래에 있었다고 볼수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로마식 유리구슬이 한반도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반도를 로마의 영향권 아래에 있었다고 볼수 없겠지요.
단순한 문화 수입으로도 볼수 있다 생각합니다.
그러나 고인돌 같은 경우는 변변한 도구도 없던 시절에 거대한 돌을 옮기고 고임돌을 세우고 뚜껑돌을 올리는건 간단한 일이 아니었을거 같아요.
그 당시에 타 집단간의 기술교류가 용이했을리도 없구요. 이건 고조선의 영향권으로 볼수 있지 않나 합니다.
물론 어느 지역에서 특정 유물이 나왔다고 그 지역이 영향권에 있다고 단정 할수는 없지만, 그 유물의 성격이나 분포도를 보면 어느정도 알수 있을거라 생각합니다. 로마식 유리구슬과 비파형 동검은 분포도나 그 유물의 정치적, 경제적 의미가 다르기 때문에, 그것이 교류의 의미인지 정치적 지배권의 의미인지 파악할 수 있지 않을까요?
저는 견해가 좀 다르네요.
비파형 동검이 출토되는 지역은 모두 고조선의 영역이라 주장하시는 분들도 계시나, 비파형 동검의 형식이 요동 지방의 비파형 동검 문화와 요서 지방의 비파형 동검 문화가 차이를 보이고 대체로 다양성을 띠기 때문에 모든 출토 지역을 고조선의 영역으로 보지는 않는 것이 학계의 주된 설로 알고 있습니다.
'중국 내몽고 및 요서 지역 답사를 통해 본 한국 고대문화(송호정)' 참조
비파형 동검의 출토가 로마식 구슬과 정치적, 경제적 의미가 남다르다고 하시는데요. 비파형 동검이 제례용으로만이 아니라 실제 전투에도 사용했다고 학계에서 보더군요.
무기가 전투에서도 사용되었다면 전투시 노획, 부족간의 물물거래등으로도 충분히 습득이 가능한만큼 꼭 고조선인만이 비파형동검을 사용했을까 하는것이 제 견해입니다.
2년 여름 6월, 송양이 나라를 바치며 항복했다. 그곳을 다물도로 개칭하고, 송양을 그곳의 군주로 봉
했다. <고구려 말로 옛 땅을 회복한 것을 '다물'이라 하기 때문에 그곳의 명칭으로 삼은 것이다.>
-삼국사기
이미 서토 사서나 우리 사서고 이런 열국시대 나아가 이후 사국 삼국시대를 낳게 한 나라들이
엄연히 고조선에서 나온 땅이며 자손으로 명칭하고 있는데 우리 민족의 형성에서
매우 중요한 신석기의 발달한 정주문명을 토대로 나온 고조선 청동문화와 건국 시기를 빼고
어떻게 우리 민족의 형성을 논하려고 하는지??(고조선의 홍익인간 자체가
이런 고조선의 천하관이자 통치 이념이구만)
그기에 이미 고구려도 이런 고조선 토착 재지 세력인 기존 왕을 자처하는 엄연한 국가 체재를
갖춘 5부 소국들을 토대로 해서 나온게 고구려.
아래 보니 무슨 고구려를 5부족 어쩌고 이런 식으로 보는 사람이
여전한데 고구려 5부 중 하나인 송양왕이 괜히 왕이 아니며 삼국사기 초기 기록에
성읍 성읍 어쩌고
방어형 정주 성곽들의 기록이 괜히 자주 나오는 게 아님.(이런 고구려 5부는
지금의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교육부, 노동부,국방부 같은 최고 의결 중심 기관
식으로 보아야 할 것임. 초기에는 이런 고구려 건국에 참여한 5부 기존 군장 혹은
소왕급을 대표하는 최고 의사 결정권의 개념에서 이후 이게 3세기를 지나면서
점차 중앙집권화가 가속화
되면서 고구려 수도 중심을 토대로 사방의 행정체계로 변화 이후 발해 5경체재로
이어진 것이고 이게 다시 금나라 역시 이런 후발해와 연합 5경 체재를 물러받고 빠르
게 대국으로 오른 것임)
잽강점기 이후 80년대 교육부에서도 이미 부족국가 부족연맹 같은 용어는 부족과 국가
라는 개념자체가 상치, 모순과 왜곡된 개념을 불러 일으켜 공식적 폐기.
1500년 전 베이징에 살던 한민족 무덤 발견?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1,500년전 원적(原籍)이 ‘조선현(朝鮮縣)’인 이의 무덤이 발굴됐다. 무덤 주인공이 우리 민족일 가능성이 커 주목된다.
경화시보(京華時報) 등에 따르면 베이징시 문물국은 최근 다싱(大興)구 황춘(黃村)진 싼허좡(三合庄)촌 일대 고대 무덤군 발굴 작업(사진) 중 북조(北朝) 시대의 묘 2기를 발견했다. 이중 한 무덤에서 나온 벽돌모양 묘비에는 무덤에 묻힌 이가 ‘韓顯度’(한현도ㆍ중국어 한셴두)이며, 원적이 ‘낙랑(樂浪)군 조선현’이라는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었다. 무덤 주인공은 원상(元象) 2년 사망했다. 원상은 동위(東魏) 효정제 원산견의 2번째 연호로 서기 539년이다. 베이징시는 톈안먼(天安門) 광장에서 남서쪽으로 20여㎞ 떨어진 이 곳을 재개발하던 중 1,000년 이상 된 무덤 129기가 발견되자 지난해부터 발굴 작업을 해 왔다.
중국 매체들은 무덤 주인공의 원적인 ‘낙랑군 조선현’에 대해 “낙랑군은 한무제(漢武帝)가 기원전 108년 고조선을 평정한 뒤 지금의 한반도 내 설치한 사군(四郡) 중 하나이고, 조선현은 지금의 평양시”라고 주장했다. 이어 중원 왕조들의 힘이 쇠약해지면서 313년 낙랑군이 고구려에 의해 ‘탈취’당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한사군이 존속한 기간은 25년에 불과했고 가장 오래 남아있던 낙랑군도 사실상 상업적인 무역기지로서 명맥만 유지됐다는 게 우리 학계 입장이다. 중국이 이런 낙랑군을 강조하는 것은 ‘동북공정’을 염두에 둔 것 아니냔 지적이 나온다.
무덤 주인공이 한국인인지 중국인인지 현재로선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중국 매체들은 “고조선 유민이 왜 베이징에 묻혔을까”라며 한민족일 가능성에 무게를 뒀다. 북위(北魏) 태무제 탁발도가 서기 432년 ‘조선민’을 비여(肥如ㆍ중국어 페이루)로 이주시키고 ‘조선현’을 다시 설치했다는 기록이 근거다. 비여는 베이징에서 동쪽으로 250㎞ 정도 떨어진 현재의 친황다오(秦皇島)와 창리(昌黎), 루룽(盧龍), 첸안(遷安)현 일대로 추정된다. 당시 중국으로 유입된 한국인이 이 곳에 살게 됐고 이들은 원적을 ‘낙랑군’으로 계속 유지했을 것이라는 추론이다.
그러나 북위가 ‘조선민’을 강제 이주시킨 시기는 낙랑군이 사라진 지 100여년도 지난 때다. 무덤이 조성된 것은 이로부터 또 다시 100여년이 지난 시기다. ‘조선민’이 강제 이주됐다 해도 그들이 수백년 전 사라진 낙랑군을 굳이 원적지로 썼다는 건 설득력이 약하다. 오히려 1,500년전 우리 선조들이 베이징까지도 활동 무대로 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유적일 수도 있다. ‘낙랑군’이 한반도가 아니라 베이징 부근에 설치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우선 실제 전투에 사용 되었다는 전제의 근거가 중요 하겠구요...
전투에 사용 되었다면 어느 선까지 무장이 되었는지도 중요하겠지요. 그것은 생산성에 대한 이슈 이기도 하고,
권력의 상징성으로써의 비파형 동검이 아니라는 이야기 이기도 합니다.
비파형 동검이 보편화 되었다는 결론에 도달해야 노획이나 물물거래를 통해 특정 지역에 의미있는 양의 유물로
발견 되었다는 해석이 가능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몇년, 몇십년 단위로도 비파형 동검의 디자인 등 양식이 바뀌어 갈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시기에 따라 변형된 모습을 유물을 통해 알수도 있구요...
그것을 문화의 차이라고 보는게 합당할지 모르겠습니다.
현재의 대한민국도 지방문화 라는게 있어서, 지역마다 조금씩 다른 형태를 가지는 물건들이 있지만,
그것을 민족 단위의 문화적 차이라고 보지 않듯이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