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나 = 안라가야 이렇게 보고 있습니다. 임나는 물론 반도 남부에도 있었지만 열도에도 있었습니다. 본문에 나온대로 숭신 65년 기사 임나는 북쪽으로 바다에 막혀있다. 라는 문헌 기록을 보면 임나가 반도에 없었다는 기록으로 볼 수 밖에 없습니다 ( 한반도에서 북쪽이 바다에 막혀있는 곳은 없습니다 ) 그리고 인덕천황이니 응신이니 하는 것은 다 가공인물입니다. 일본서기가 창작한 위사이지요.
왕인 기사의 경우도 실제 중국 정사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수서에는 왜에는 문자가 없었는데 백제에서 불경을 베끼면서 비로소 문자가 생겼다고 나옵니다. 왕인 기록 역시 일본서기가 창작한 위사인데.. 문자와 관련한 기록들.. 국서를 받았다거나 백제가 국서를 빼았았다거나 이런 기록들은 실제 역사를 뒤틀어서 위사를 창작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런 것은 역시 수수께끼의 4세기라는 단어가 표현하듯이 이 시기에 왜는 없었고 단지 백제 신라 계열의 분국들만 존재하던 시기였습니다. 일본서기는 이런 사실을 있는 그대로 직필하기 어렵기 때문에 응신 인덕과 같은 가공 인물들을 창작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백제인을 파견해서 진사왕을 죽이는 왜왕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고 열도 백제와 반도 백제간의 내란으로 봐야 하는 것입니다
일본서기에 가공의 왕들이 많다고 해서 모두를 가짜로 보는 것은 올바른 역사해석 방법이 아닙니다. 확실한 근거를 대고 말씀하셔야죠...
14대 중애왕부터는 가공의 인물이 아닙니다.
15,16대인 응신과 인덕도 가공인물이라고 하면 어느 곳에서도 그 이론은 인정받을 수 없어요...
게다가 일본의 왕들은 응신, 인덕까지 가공의 인물이라고 하면서 10대 숭신왕의 임나기록은 상당히 비중있게 인용을 하시네요...
그리고 숭신 65년의 기록도 제대로 인용을 하셔야죠...
숭신기 65년 7월조
"임나국이 소나갈질지를 보내어 조공하였다. 임나는 축자국(구주의 축전지방)에서 2천여리 떨어져 북쪽으로 가면 바다가 막히는 곳이면서 계림의 서남쪽에 있다..."
일본 규슈에서 2천여리 떨어져 있고 북쪽으로 가면 바다가 막히는 곳이면서 계림(신라)의 서남쪽은 김해 지방입니다. 바다에 막혀있는 것이 아니라 바다가 막히는 곳입니다. 일본이 아니죠...
그리고 더 정확히 파고들어가면 김해가 아니고 대가야를 일컫는 말입니다.
임나에 대한 최초의 기사에는 의부가라국이라는 명칭으로 나오는데, 이는 오오가라국 즉 대가야를 일컫는 말입니다.
모두가 가짜가 맞습니다. 원래 그럴 목적으로 만든 책이니까요.. 중애 이후에 모두 사실이라 .. 송서 왜 5왕을 한번 일본서기 천황에 비정을 해보시지요. 하나도 안 맞을 겁니다. 결국 중국 정사와 일본서기 두 책중에 하나가 터무니 없는 거짓말을 한건데 물론 거짓말을 하는 것은 일본서기지요.. 요즘에는 성덕태자도 가공인물이라고 인정하는 학자들도 나오고 있습니다.숭신 65년조 기사는 임나국이 조공을 한 형식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일본서기가 위작을 할 때에는 보통 원래 실제 역사에 덧씌우는 방식으로 합니다. 그것을 위해서 숭신이라는 가공의 천황을 만들었겠지요. 그리고 임나국 위치는 그냥 원문 그대로 해석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합니다. 임나가 북쪽으로 바다에 막혀 있는 지역이지요. 한번 꼬아서 해석해서
대가라로 비정해도 대가라 북쪽 어디를 올라가도 북쪽이 바다에 막혀 있는 곳은 나오지 않습니다. 애초에 한반도에 그런 곳이 없기 때문이지요.. 일본서기라는 위사를 창작한 사람들은 임나에 대한 기록을 접하고 가공의 숭신을 창작한 후에 임나가 존재하지도 않았던 이론 천황에게 조공했다는 위사를 창작했을 것입니다.
일단 임나는 북쪽이 바다로 막혀있다. 여기에서 반도는 제외가 되겠네요. 그렇다고 해서 내가 반도의 임나를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일본서기에서는 반도 이외의 지역에도 임나가 있었다는 기록이 나오는 것인데.. 추가적인 기록은 큐슈에서 2000 여리 떨어진 곳에 있다라는 조건.. 그리고 계림의 서남쪽이라는 조건이 붙겠네요. 여기에서 님이 위치 비정이 안되어서 해석을 비비꼬아 보지만 애초에 반도에 북쪽으로 바다에 막힌 곳이 나올 택이 없고... 무엇이 문제일까요? 결국 계림이 경주에만 있었다고 하는 님의 고정 관념이 문제이겠지요. 계림은 경주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일본 북쪽에도 있었습니다. 홍윤기 교수가 이야기 한 게란을 먹지 않는 열도의 풍습이 있는 곳.. 그곳 역시 열도인들의 시각으로는 계림이 아니었나 싶네요. 그 계림의 서남쪽.. 큐슈에서 2000 여리 떨어진 곳.. 그리고 마지막으로 안라가야의 유물이 출토되는 곳.. 거기가 열도의 임나가 되겠지요.
문맥의 전체를 보셔야지요...임나의 위치를 설명하는 것이지 국토의 상황을 설명하는 게 아니잖아요.
축자에서 2000여리 떨어져 있고, 다음이 북조해면 그 위치가 북으로 가다가 바다가 막힌다고 봐야지요...게다가 계림의 서남쪽이라고 했는데, 계림의 서남쪽은 바다가 아니라 가야이니 더욱 북쪽이 바다로 막힌 게 아니라 북으로 가다 바다가 막히는 게 맞는 겁니다. 마땅히 그 위치는 일본이 아니라 일본 축자에서 북으로 가다 바다가 막히는 신라의 서남쪽인 김해를 말하는 것이고요. 님의 말대로라면 계림의 서남쪽이 아니라 계림 밑에 있는 가야의 서남쪽이라고 했어야지요...
任那國 遺 蘇那曷叱知 令 朝貢也. 任那者 去 筑紫國 二千餘里, 北阻海 以在鷄林之西南.
임나라고 하는 것은 축자국에서 2000여리 간다. 북쪽은 바다로 막혀 있다. 계림의 서남이네요. 북조해의 주어는 임나인데.. 임나 북쪽으로 가면 바다가 없죠. 님이 상상하는 대로 한다면 남조해가 맞겠지요? 님 생각에는 문맥에 맞는 해석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는데.. 주어를 바꿔치기하는 어법에 맞지 않는 해석이구요. 님이 상상하는 경상도 경주의 서남으로 가면 김해가 안나오고 전라도가 나오네요. 김해는 경상도 경주의 서남쪽이 아니라 정 남방이 맞구요. 아마 혼란스러우실꺼에요. 그건 님이 임나가 반도안에만 있었다는 고정 관념 때문에 그런건데요. 저 글에서 안라 유물의 분포도 나오죠 ?
그림에 안라 가야의 유물 분포도를 보면 경남 김해에 한정되어 있지 않고.. 열도의 기내 지방까지 뻗어있잖아요. 저 지역은 큐슈에서 2000여리 떨어져 있고 북쪽으로 바다로 막혀 있는 것도 맞고.. 계림의 서남이라고 했는데 역으로 저 지역에서 동북쪽으로 가면 이즈모 지역.. 고대 신라와 관련한 지역들이 나오죠. 저기 역시 계림이었던거에요. 모든 것을 반도 중심으로 생각하는 님의 고정관념이 문제가 아닐까요 이 경우는..
그리고 이즈모, 출운국이 계림이라고요?
이즈모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신사는 스사노오미코토, 즉 소전명존, 우두천황과 관련된 신삽니다.
그 지역에 전해지는 신화나 전설도 대부분 우두천황과 관련된 것이고요...
고대 대가야가 우두천황과 관련된 지역인 거 모르나요?
일본과 동해안을 사이에 두고 있는 지역이라 그렇게 생각하는 모양인데
정말 단순한 발상이네요...
일본 신화는 단순한 신화가 아니라 백제의 일본 정벌과정을 신화형식으로 설명해 놓은 거에요...
스사노오미코토가 하늘나라에서 쫓겨나서 지상에 내려오니 신라땅이라고 되어 있어요...자신은 이땅에 살기 싫다면서 찰흙으로 배를 만들어 동해안을 건너간다고 되어 있습니다.그곳이 이즈모, 출운국이에요...
쫓겨나서 도착한 곳이 신라이니 하늘나라는 가야나 백제가 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제대로 공부합시다.
왕인 또한 일본서기가 창작했다고 하니 정말 어처구니가 없네요...
일본서기 뿐만 아니라 여러 풍토기에도 왕인의 행적이 나오고 있습니다. 또한 그의 후손들에 대한 기사도 이어지는데, 참 많이도 창작했네요...
그리고 당시에 백제, 신라 계열의 분국들만 존재했다고 하는데 그 근거가 어디 있나요? 누가 세운 어느어느 분국을 일컫는지 말씀해 보세요...
일본엔 웬만하면 신사로 남든 그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심지어 연오랑(천일창)으로 추정되는 인물의 신사들도 남아 있어요...뒤에 다른 인물을 내세우면서 연오랑을 지우기는 했지만요...
그렇게 남아 있는 분국들의 흔적을 말씀해 보시죠...
수서에 기록은 이렇습니다 " 왜에는 문자가 없어서 나무에 세기거나 매듭을 묶거나 했는데 백제로부터 불경을 얻어쓰면서 비로소 문자가 생겼다 " 중국 정사 기록과 일본서기가 틀리면 일본서기 기록을 의심하는 것이 맞습니다. 왕인이란 가공 인물을 창작한 배경에는 실제 열도를 기록하려면 근구수왕을 직필하기 어려울 때에 학문의 스승이라는 형태로 위작하면 편하기 때문입니다. 네 많이 창작한 것 맞습니다. 단순히 일본서기만 조작한게 아니라 관련된 풍토기나 성씨록 등에도 위작이 가해졌습니다. 하지만 간헐적으로 진실이 드러나기도 하지요. 일본 황족들은 왕인의 노래를 " 아버지의 노래" 라고 지칭한다든지 그런것들이요.
원래 여씨였지만 일본으로 건너가면서 왕씨를 쓴 것인데,
백제 패망후, 의자왕의 후손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여씨 대신 '백제왕'이라는 성씨를 쓴 것과 같은 경우입니다.
속일본기 칸무천왕 9년 7월 (790년)
백제왕인정, 백제왕원신, 배제왕충신, 진련고도 등이 표를 올린 내용에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진도 등의 본계는 백제국 귀수왕에서 나왔습니다......귀수왕의 손자인 진손왕으로 하여금 사신을 따라 입조하게 했고....태자의 스승으로 삼았습니다...인덕은 진손왕의 장자인 대아낭왕을 근시로 삼고, 대아낭왕의 아들 해양군과 그의 아들 오정군....이들의 후손이 직책에 따라 성씨를 지었는데 갈정, 선, 진련이 그것입니다."
신찬성씨록 하내국제번 강원련 조에
"출자는 백제국이다. 진사왕의 아들 지종이다(지종=진손왕)..."
이라고 기록되어 속일본기의 기록과 같습니다.
그리고 왕인의 후손들에 대한 기록들도 계속 이어지는데, 왕도 아닌 인물의 후손들까지 모두 가공해서 적은 이유가 무엇일까요? 님이 가공인물이라고 하려면 그 근거를 대 보세요...
결국 용어의 차이가 아닌가 싶기도 하네요. 왕인이 문자를 전해주었네 하는 것은 결국 위사이고 저는 수서의 기록을 더 신용합니다. 어째서 님이 수서보다 일본서기 기록을 더 믿는지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아닐까 합니다. 물론 왕인이라고 하는 가공 인물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은 아니고 이런 가공 인물을 창작하기 위한 실사가 있어야겠지요. 그것이 근구수왕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근구수왕이 신라계 왜를 지배했다는 직필은 어렵고 근구수왕 대신에 왕인을 창작하여 스승이 되었다. 라는 식으로 완곡하게 표현하였다는 것이 맞습니다. 일본 황족들이 왕인을 아버지라고 표현한 것은 역시 신찬성씨록에 나온대로 일본 천황가가 백제 왕족에 그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지요. 님이 제시한 자료야 말로 왕인이 결국 백제 왕족을 모티브로 창작된 가공 인물이라고 하는 것을 알기 쉽게 나타내 주네요
님은 일본서기의 기록을 가짜라며 신봉하지 않는다지만 유물이 발견되면 될 수록
일본서기의 내용은 가히 틀리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윤색은 했겠지만 님의 말처럼 거의 대부분이 허구라고 할 수는 없는 겁니다.
신공기에 나오는 칠지도가 100여년 전에 발견되었고, 무녕왕의 지석에서 일본 왕과의 관계도 나옵니다. 또한 무령왕의 이름이 사마라는 것도 일본서기에 어떻게 해서 그런 이름이 지어지게 되었는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적혀 있는데 실제 무령왕릉의 지석에도 이름이 사마라고 나옵니다. 인덕능에서 무녕왕릉에서 나온 동경과 거의 유사한 동경이 발굴되는 등, 유물이 발견되면 될 수록 일본서기의 기록이 허구만은 아니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반면 중국의 사서에는 기록이 그다지 풍부하지 않습니다.
님의 말한 임나가라에 대한 기록도 송서와 한원 두 군데 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 또한 임나가라라는 한 나라가 아니라 임나와 가라를 뜻하는 겁니다. 한원에 앞에서는 가라임나라고 했다가 뒤에 임나가라라고 나오니까요...이는 임나와 가라를 따로 표기한 것입니다.
님이 올리신 북사의 기록도 님이 부연 설명을 해 놨지만 그것이 신라의 분국이라는 내용이 아닙니다.
분국의 존재를 주장하려면 그에 걸맞는 근거를 제시하셔야지요.
물론 일본서기라고 하는 위사를 만든 사람들은 실제 역사를 모두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완벽하게 속이기 위해서 진실을 섞는 방식이죠. 님도 지금 알기쉽게 속아넘어가고 있네요. 유물이 발굴되면 발굴될수록 님이 지금 이해 못하고 있는 저 북사의 열도 신라 기록이 사실로 드러나네요. 그런데 왜 일본은 천황의 사유재산이란 명목으로 유물 발굴을 안할까요? 저렇게 땅 속에 방치하는 것이야 말로 국가 재손의 훼손 같은데 말이지요
열도 신라와 반도 신라의 관계? 어느 쪽이 본국 분국.. 이렇게 나누기는 어려울지도요. 다만 연오랑 세오녀 설화 이즈모 풍토기.. 그리고 아라사등 설화에서 반도 신라가 비단을 빼았아 갔다..라고 하는 절규까지.. 어떤 동족 의식이 있었던 것은 확실하네요. 하지만 후대로 가면서 사라졌겠죠. 그것이 연오랑 세오녀에서는 열도에서 비단을 주었다로 나오고 아라사등에서는 반도 신라가 빼았아 갔다로 나오는거죠. 신화는 신화적으로 해석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