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토 정권은 가야계와 백제계가 일본 열도로 건너가 수립한 정권이다. 서기 4세기 무렵에는 가야계 유물이 주로 출토되고 5세기 무렵에는 백제계 유물이 주로 출토되는 사실로도 이를 알 수 있다. 그러나 김현구 씨는 거꾸로 백제 국왕들이 일왕의 후손들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백제왕이 비다쯔(민달)천황의 손자라면 백제왕들이 일본천황의 자손이라는 이야기는 되지만 일본 천황가가 백제인이라는 논리는 성립되지 않는다. 사실 여부를 떠나 이 문면(文面)만으로는 천황가가 백제인이라는 결론을 끌어낼 수 없는 것이다. 오히려 반대이다. 더욱 우려스러운 점은 이 프로그램을 본 시청자들이 ‘일본 천황가는 백제인들이었던 모양’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이었다(김현구, 백제는 일본의 기원인가, 26쪽)”
김현구 씨는 시청자들이 일본 천황가를 백제인들이라고 인식하는 것이 우려스러운 일이었다. 일왕가에 대한 이런 맹목적 추종은 대한제국을 점령하고 전 세계를 전쟁으로 몰고 간 일왕에 대한 전쟁 책임 면죄로 이어지고 있다.
“결국 미국은 한 일본 연구가의 연구를 바탕으로 천황을 이용하여 700만 일본군을 저항 없이 항복시킨 것이다. 그리고 공산혁명을 막고 일본으로 하여금 극동(極東)의 반공 보루로서의 역할을 성실하게 수행하게 만들었다(김현구, 백제는 일본의 기원인가, 127쪽)”
일왕 히로히도의 역할 때문에 700만 일본군이 저항 없이 항복했다는 것이다. 일본 본토까지 수시로 공습 당하는 일본은 이미 저항할 기력을 상실한 것이다. 여기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투하를 계기로 자신도 죽을 것이 두려워서 항복한 것을 가지고 마치 평화의 사도처럼 그려놓았다. 김현구 씨는 이봉창 의사라는 이름을 들어봤는지조차 궁금하다.
이봉창 의사는 1932년 1월 김현구가 평화의 사도처럼 묘사한 일왕 히로히도가 관병식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폭탄을 던졌다가 히로히도가 다치지도 않았음에도 그해 10월 10일 사형당했다. 이봉창 의사는 상해의 안중근 의사의 동생인 안공근의 집에서 “나는 적성(赤誠)으로서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적국의 수괴를 도륙하기로 맹세하나이다. 선서인 이봉창”이라고 쓰고 일본으로 가서 적국의 수괴에게 폭탄을 던졌다가 사형당했다. 그런 히로히도가 김현구에게는 적국의 수괴가 아니라 700만 일본군을 저항 없이 항복하게 한 평화의 사도인양 그리는 것이다. 일본 극우파의 시각 그대로이다.
- 서부지검과 서울 고검의 상반된 처사
김현구 씨는 필자의 [우리 안의 식민사관]을 가지고 형법상 ‘출판문에 의한 명예훼손’으로 고소했다. 이에 대해 서울 서부지방검찰청(검사 이지윤)은 “피의자(이덕일)은 증거 불충분 하여 혐의 없다”고 불기소를 결정했다. 다음은 불기소 이유 중의 하나이다.
“학자의 연구결과 및 견해를 다른 학자의 입장에서 재해석하여 나름대로 견해를 표명하는 것에 대해서는 명예훼손죄로 처벌함에 있어 학문의 자유 및 표현의 자유 보장이라는 차원에서 신중하여야 할 필요가 있고, 피의자(이덕일)의 주장은 고소인의 주장에 대한 자신의 분석 견해 및 재해석 결과를 표명한 것으로서 구체적 사실을 적시하여 명예를 훼손한 것으로 보기 어렵다(불기소결정서)”
서울서부지검의 불기소결정은 ‘학문의 자유 및 표현의 자유 보장’이라는 차원에서 지극히 타당한 것으로서 대한민국의 평범한 국민들의 법 감정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앞에서 언급한 김현구 씨의 역사관은 유럽 같으면 형사 처벌당했을 일이다. 결국 히틀러는 스스로 xx을 선택함으로써 수백만 명의 독일군을 저항없이 항복하게 했다는 말과 무엇이 다른가.
그러나 김현구 씨가 서울 고검에 항고하자 서울 고검(부장 검사 임무영)은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으로 필자를 기소했다. 서울고검에서 필자를 불러 조사한 것은 7월 1일인데 그 이전인 6월 26일에 이미 기소명령을 내려놓은 상태였다. 그래서 앞으로 필자는 재판을 받아야 한다. 고검의 공소장에는 “(김현구 씨가)일본서기의 기술을 믿는다 하더라도 역사적으로 임나일본부라는 명칭 자체가 존재할 수가 없고”라고 김현구 씨가 임나일본부를 부정했다고 적었다. 과연 김현구 씨가 임나일본부를 부정했는지 김현구 씨의 글로 살펴보자.
“따라서 한국 학계에서 사용하고 있는 ‘임나일본부’라는 용어보다는 한반도 남부지배라는 본질을 담고 있는 일본 학계의 이른바 ‘남선(南鮮)경영론’이 더 타당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러나 ‘남선경영론’은 ‘남조선경영론’을 줄인 말로 현재 한국에서 사용하는 용어와는 거리가 멀다. 따라서 ‘남조선경영론’을 현재 한국에서 사용하는 용어로 바꾼다면 ‘한반도 남부경영론’ 정도가 타당하다고 생각한다.(김현구, 임나일본부설은 허구인가, 21~22쪽)”
‘임나일본부’라는 용어보다 일본 학계에서 사용하는 ‘남선경영론’이 더 타당하지만 현재 한국에서 남조선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한반도 남부경영론’으로 부르겠다는 것이 김현구 씨의 논리다. 그런데 고검의 공소장은 김현구 씨가 ‘임나일본부라는 명칭 자체가 존재할 수가 없고’라고 주장했다면서 필자를 형사 처벌하겠다는 것이다. 또한 서울고검에서 작성한 공소장에는 김현구 씨가 “백제의 왕자가 현 천황가의 시조가 되는 등”이라고 썼다고 했는데, 이는 김현구 씨의 논리와 정 반대의 이야기를 검사가 자의로 써 놓은 것이다. 김현구 씨는 “(백제의) 왕녀와 왕족 파견의 효시라고 할 있는 (백제) 왕자 전지의 파견(397)(김현구, 백제는 일본의 기원인가, 24쪽)”이라고 백제 왕족이 일본에 파견된 것은 서기 397년이라고 썼다. 김현구 씨는 그 후 “일본은 백제 왕족들을 귀국시키면서 일본의 황녀들과 결혼시켰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김현구, [백제는 일본의 기원인가], 21쪽)”라면서 백제가 왕자와 왕녀들을 야마토에 인질로 보낸 것을 계기로 두 왕실의 피가 섞이게 되었다고 썼지 ‘백제의 왕자가 현 천황가의 시조가 된다’는 글은 전혀 쓰지 않았다. 김현구 씨는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백제왕이 비다쯔(민달)천황의 손자라면 백제왕들이 일본천황의 자손이라는 이야기는 되지만 일본 천황가가 백제인이라는 논리는 성립되지 않는다.”고 그 반대의 논리를 제기했다. 이는 고검 검사가 자의적으로 김현구 씨에게 유리하게 하기 위해서 창작한 내용이지 김현구 씨의 역사관이나 실제 서술과는 전혀 배치되는 내용이다.
민사도 아닌 형사사건의 공소장을 저렇게 써도 되는가라는 생각이 절로 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검찰은 이런 논리로 김현구 씨 역사관이 정당한 것이고, 필자가 그런 역사관을 비판한 것은 대한민국에서 형사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재판에서 주장해야 한다. 필자는 20여년 가까이 수많은 시간과 사재를 털어가면서 일제 식민사관에 맞섰다는 이유로 조선총독부도 아닌 대한민국 법정의 피고석에 서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어찌 광복 70주년을 맞은 대한민국의 정상적인 모습이겠는가?
평생을 일제 식민사관의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과 맞서 싸웠던 구순의 최재석 고려대 명예교수는 ‘우리 안의 식민사관’ 출판금지 가처분 신청에 대한 견해에서 “김현구의 학위논문은 고대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였다는 것이 핵심내용입니다”라면서 이렇게 말했다.
“김현구의 학위논문 지도교수인 미즈노는 실존인물도 아닌 일본의 신공황후가 한국을 점령했고, 서기 1세기부터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였다는 역사왜곡을 한 인물입니다. 김현구의 논문은 이런 미즈노의 왜곡된 역사관을 옮긴데 불과합니다. 물론 그는 이러한 사실을 교묘하게 은폐하고, 예리한 비판이 제기되면 갖은 수단을 써서 이를 덮어왔습니다. 이는 김현구 개인의 문제이지만 황국사관의 속성에서 배태된 행태이기도 합니다(최재석, ‘우리 안의 식민사관’ 출판금지 가처분 신청에 대한 견해)”
서울 고검 또한 대한민국의 국가기구이고, 대한민국의 평범한 국민들의 법 감정에 충실했다면 김현구 씨의 역사관을 처벌하지는 못할망정 최소한 서부지검처럼 ‘학문과 표현의 자유’라는 잣대로 이 사건을 바라보았어야 할 것이다. 이는 광복 70년을 맞은 대한민국의 갈 길이 얼마나 멀며 얼마나 많은 개혁과제들을 갖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