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가 언제부터를 뜻하는지는 모르지만
발해까진 우리민족(?) 영토
그 이후에는 그 자리에 터잡은 타민족의 영토입니다. 발해 멸망 이후 물길.숙신 여진 읍루...뭐 그렇게 불립니다.
재야사학(?)이라 자칭하는 사이비들은 고려때도 우리영토라고 하기도 하는데...근거없는 얘기고.
적어도 조선때는 만주가 조선영토가 아니었음은 명확합니다.
조선왕조실록에 아~~~~~~~~주 명확하게 두만강과 압록강이 조선의 국경이라고 나옵니다.
당연히 그 건너편인 만주는 우리땅이 될수가 없고.
백두산의 경우 백두산이 동네 뒷산도 아니고 결코 범위가 작지않기때문에 일부는 조선 일부는 청나라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백두산 정계비의 위치가 천지 동남쪽이었던 것으로 볼때 천지를 포함한 많은 부분이 청나라의 영토였을것이라 봅니다.
주장과 근거가 따로노시네요.
여진족들이 스스로 고려에 속하기를 간청한것과 고려가 그곳에 주.군을 설치했으니
여진족이 한민족이됩니까? 대한민국에도 미국 주가 되고싶어하는 애들 있었죠. 걔들은 앵글로색슨족이 되고싶었나봅니다.
여진족 사는데다 고려가 주군을 설치했으니 만주도 우리땅이다? 설마 이런 논리는 아니시겠죠. 한민족이 살던 경상도를 일본이 점령하면 한반도가 일본땅되는거 아니죠.
고려가 만주땅을 먹었으면 고려지도가 달랐겠죠.
재야사학은 숨겨진 진실이 아니라 멍청이들 헛소리에요. 그런거 그만 믿으세요.
만주가 조선땅 아니라는 근거가 쏟아져나오니까 이젠 "그,그래도 청나라 영토도 아니었다! 중간지대다!"
백두산 정계비 내용은 수도없이 봤으면서 왜 자꾸 그 내용은 모른척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동위압록 서위토문.
정말 만주가 어느나라의 영토도 아닌 중간지대였으면 왜 압록두만을 국경으로 정했겠습니까? (토문이 두만강이 아니라는 얼토당토않은 논쟁은 사양합니다.)북한과 남한의 국경은 휴전선이지 dmz이남 남측 경계가 아니죠?
조선왕조실록
고종 19권, 19년(1882 임오 / 청 광서(光緖) 8년) 8월 7일(경신) 3번째기사
의정부에서 길림과 훈춘에 공문을 보내는 문제에 관하여 아뢰다
“함경 감사(咸鏡監司) 김유연(金有淵)이 경원 부사(慶源府使) 이희영(李熙榮)의 치보(馳報)를 낱낱이 들어 말하기를, ‘훈춘(琿春) 사람이 공문(公文)을 가지고 왔기에 뜯어보니, 우리나라의 빈민(貧民)들로서 국경을 넘어가 땅을 차지하고 개간한 자에 대해 본국(本國)의 공문을 받아서 세금을 수납하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
넘어간 조선인들에 대해 청나라에서 세금걷겠다는 내용입니다.
누구땅도 아닌 중간지대면 청나라가 왜 세금을 걷을까요.
서양선교사들 그린 지도도 정말 수도없이 봤는데
애초에 서양선교사들이 조선청나라 국경에 대해서 김정호나 정약용 등등 이땅에서 나고자란 조상님들보다 더 잘 알리도 없을뿐더러 걔네가 그린건 교구지도지 국경지도가 아닙니다. 대동여지도 꺼져!인가요?
첫번째 댓글에서 여진족이 고려에 속하기를 간청하고 고려가 주.군을 설치했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죠?
그런데 두번째 댓글에선 '만주'의 여진족이 고려에 속하기를 간청하고 '만주'에 고려가 주.군을 설치했다라고 말을 바꾸시고 제가 그런 말에 동의한것처럼 몰아가시네요.
둘은 전혀 다른 얘기입니다.
경상도를 일본이 점령하고 일본식 행정구역을 설치한다면 경상도는 일본땅이 됩니다.
그럼 경상도만 일본땅이 된것이지 한반도 전체가 일본땅인것은 아니지요. 그렇죠?
여진족일부가 고려에 속하기를 간청하고 고려가 그곳에 주.군을 설치했다고 해서
여진족 전체가 고려에 속하게 된것도 아니고 여진족의 영토가 전부 고려땅이 되는게 아닙니다. 너무도 당연해서 설명도 필요없는 얘기고 이건 논리의 영역이지 역사의 영역조차 아닙니다.
여진족은 발해 멸망 뒤 등장하여 만주와 한반도 북부를 장악한 민족입니다
그런데 여진족은 그 이전까지는 등장한 적이 없던 민족입니다
이 여진족은 누구일까요? 이민족? 한민족?
당시 만주에는 누가 있었던 것을 알면 알 수 있을 겁니다
당시 발해의 인구는 고구려의 인구정도와 비슷한 것을 감안하면 발해인들은 약 500~700만은 될겁니다
즉, 멸망하면 사라져 버리는 타 유목민들과는 다르게 발해의 경우는 5경 체제와 같은 도시 문명을 이루고 살았던 나라이기 때문에
백성들의 수도 많고 생활 기반들이 있어서 멸망한 뒤에도 자신들만의 세력권이 존재했죠
즉, 발해가 멸망한 뒤에도 수백만의 발해 유민들이 여전히 만주와 한반도 북부에 살고 있었다는 거죠
여진족이 어디서 이주해온 민족이던 간에 여진족의 대부분은 발해 유민이었을 겁니다
(2)여진족의 지배층과 정체성은 무엇인가
여진족의 초대 황제는 아골타입니다
그런데 이 아골타는 신라인 김함보(김행)의 후손으로, 자신을 신라인이라고 밝힌 바 있습니다
실제로 고려사나 송나라의 송막기문과 자신들이 서술한 금사, 흠정만주원류고 등 여러 기록에도 김함보의 행적이 등장하고 금나라 황실이 신라인이라는 구절들이 등장합니다
또한 여진족의 이름을 살펴보면 여진은 '아이신'을 한자로 표기한 것인데, 이 아이신은 '금'을 의미합니다
결국 국호조차 '금'나라로 정했죠
이게 바로 자신들의 성씨이자 정체성인 '김'씨를 뜻합니다
이제 한 번 봅시다..
국호, 부족명은 김씨이고
황실가의 혈통은 신라인이며
금사, 흠정만주원류고에서 자신들의 뿌리를 신라에서 찾고 있습니다
즉, 여진족의 지배층은 신라인이었고, 정체성이 신라였다는 거죠
또한 위에서 말씀드렸듯이 주변국들도 모두 여진족의 추장이 신라인이라는 기록을 남기는 등 여진의 근원을 신라에서 찾고 있습니다
애초 왕가가 신라족보라는 것도 의심스럽지만
왕가의 족보가 민족의 족보를 갈음하는 것이 아니죠.
청나라 왕실족보는 여진족 족보지만 청나라국민 절대다수는 한족이었습니다.
한족이 여진족이 되는건가요?
금나라가 고려에 후하게 대했다는것도 이상합니다.
국사시간에 금나라가 초기 형제관계(금나라가 형)를요구하다가
나중엔 군신관계(금나라가 왕)를 요구했던 것.
고려가 금나라의 침입에 대비해 천리장성을 쌓았던 것을 배웠을겁니다.
그리고...
王乃遣使如金(왕내견사여금) : 왕이 사신을 금 나라에 보내어
請曰(청왈) : 청하기를,
本吾舊地(본오구지) : 원래 우리나라 옛땅이니
願以見還(원이견환) : 돌려보내기를 원한다."고 하자,
金主(금주) : 금 나라 임금이
謂使者曰(위사자왈) : 사신에게 이르기를,
爾其自取之(이기자취지) : “너희가 스스로 빼앗으라."고 하였다.
정사를 보았다. 임금이 여러 신하들에게 이르기 를, “고려의 윤관(尹瓘)은 17만 군사를 거느리고 여 진(女眞)을 소탕하여 주진(州鎭)을 개척해 두었 으므로, 여진이 지금까지 모두 우리 나라의 위 엄을 칭찬하니, 그 공이 진실로 적지 아니하다. 관이 주(州)를 설치할 적에 길주(吉州)가 있었는 데, 지금 길주가 예전 길주와 같은가. 고황제(高 皇帝)가 조선 지도(地圖)를 보고 조서(詔書)하기 를, ‘공험진 (公險鎭 ) 이남은 조선의 경계라. ’고 하였으니, 경들이 참고하여 아뢰라.”
공험진에 대해 잠시 위치를 살펴보면 『세종실록』 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 의 기록에 의하면, 공험진에는 내·외방어소(內 外防禦所)가 있었는데, 내방어소는 경원도호부( 慶源都護府) 자리에, 외방어소는 두만강북쪽700리에 있는공험진에두었던것으로보고있다. 그곳까지의 노정은 조선 초기의 경원도호부 동 림성(東林城)을 출발해 북쪽 5리쯤에 소다로영 터〔所多老營基〕, 그 북쪽 30리에 어두하현(於 豆下峴), 그 북쪽 60리에 동건리(童巾里), 그 북 쪽 3리쯤에 두만강탄(豆滿江灘), 그 북쪽 90리에 오동사오리참(吾東沙吾里站), 그 북쪽 60리에 하이두은(河伊豆隱), 그 북쪽 100리에 영가사오 리참(英哥沙吾里站), 그 북쪽 소하강(蘇下江) 강 변에 공험진이 있다고 하였다
글로된 위치 말고 지도상 위치를 물었잖아요?
왜 한번 말하면 못알아듣지?
알아들으면 바로 발릴까봐 그러세요?
제시하신 "세종15년"의 사료를 보면
"고황제(高 皇帝)가 조선 지도(地圖)를 보고 조서(詔書)하기 를, ‘공험진 (公險鎭 ) 이남은 조선의 경계라. ’고 하였으니, 경들이 참고하여 아뢰라.”
라고 되어있는데
세종대왕이 4군 6진중 6진을 개척하여 종성진을 만든것이 세종16년이고
온성군을 만든것이 세종 22년입니다. 이들은 다 두만강 이남에 있습니다.
세종15년 시점에선 아직 함경도 동북쪽도 다 점령못한판에 그 너머에 있을(님 주장에 따른다면 말입니다) 공험진타령을 한걸 보니
세종15년에 공험진 드립을 한것은
1. 공험진이 두만강 이남에 있거나
2. '공험진'이 현재 조선의 영토가 아닌 상태에서 세종대왕또한 공험진이 어딘지 제대로 몰랐던거죠.
세종21년
함길도 도절제사 김종서(金宗瑞)에게 전지하기를,
“동북 지경은 공험진(公嶮鎭)으로 경계를 삼았다는 것은 말을 전하여 온 지가 오래다. 그러나 정확하게 어느 곳에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외
세종 73권, 18년(1436 병진 / 명 정통(正統) 1년) 윤6월 18일(계미) 2번째기사
4품 이상이 올린 외구(外寇)의 제어책을 평안도 도절제사에게 보내다
또 압록강(鴨綠江)은 하늘이 만든 경계로서
세종 62권, 15년(1433 계축 / 명 선덕(宣德) 8년) 11월 21일(경자) 1번째기사
영북진·경원진의 재 배치 문제와 관련하여 병조의 의견을 묻다
또 우리 나라는 북쪽으로 두만강을 경계(境界)로 하였으니,
세종 75권, 18년(1436 병진 / 명 정통(正統) 1년) 10월 3일(을축) 2번째기사
올적합의 군사 3천을 물리쳤음을 함길도 도절제사가 알려 오다
적을 뒤따라 두만강에 이르러 서로 싸웠는데, 적이 강을 건너가고 해가 이미 저물었으므로 우리 군사가 추격하지 못하고 되돌아 왔습니다.”
세종 77권, 19년(1437 정사 / 명 정통(正統) 2년) 5월 20일(기유) 4번째기사
야인 토벌의 계책을 세우도록 김종서에게 명하다
함길도 절제사에게 전지하기를,
“신설한 네 읍은 우리 조종께서 처음 기초를 정하신 땅으로 두만강으로 경계를 삼은 것이었다., 두만강은 하늘이 저들과 우리와의 한계를 만들어 준 것이었다
정조 21권, 10년(1786 병오 / 청 건륭(乾隆) 51년) 1월 22일(정묘) 21번째기사
북관의 방어, 금군, 능에 거둥할 때 백성들의 구경 금지 등을 논의하다
두만강이 얼어붙은 뒤에는 저쪽의 육지와 연결되므로 애당초 조그만 경계도 없습니다. 지금은 번호(藩胡)가 작란하는 우환은 없으나, 강변에 파수를 세워서 불의의 우환을 대비하는 것은
. 공험진이 두만강 이남에 있거나
2. '공험진'이 현재 조선의 영토가 아닌 상태에서 세종대왕또한 공험진이 어딘지 제대로 몰랐던거죠.>??ㅋㅋ
세종이 공험진을 몰랐다고 조선이 공험진을 몰랐다?? ㅋㅋ(뭔 세종은
전지전능이여야 함?? ㅋ 울나라 박근혜가 혹여 최남단 섬 이름 모른다고
그곳은 우리 섬 아님?) ㅋ
단종 시기에 완성된
<세종실록 지리지 공험진 원문>은 그럼 어떻게 해서 기록을
남겼을것 같음? ㅋㅋ
지리지 / 함길도 / 길주목 / 경원 도호부
◎ 경원 도호부(慶源都護府)
사(使)가 1인이니, 길주도 우익 병마(吉州道右翼兵馬)를 겸한다.
옛 공주(孔州)로서 혹은 광주(匡州)라고도 칭하는데, 오랫동안 호인(胡人)에게 점거(占據)되었었다. 고려의 대장(大將) 윤관(尹瓘)이 호인(胡人)을 몰아내고 공험진 방어사(公險鎭防禦使)를 두었다. 본조 태조(太祖) 7년 무인에 덕릉(德陵)과 안릉(安陵)이 있다고 하여 경원 도호부로 승격시키고, 성(城)을 수축하기 위하여 땅을 파다가 인신(印信) 1개를 얻었는데, 그 새긴 글에 ‘광주 방어지인(匡州防禦之印)’이라고 되어 있었다. 태종(太宗) 9년 기축【영락(永樂) 7년.】에 목책(木柵)을 소다로(所多老)의 영기(營基)에 설치하고 부(府)를 옮겼고, 10년 경인에 야인(野人)의 난리로 인하여 경성군(鏡城郡)에 합쳤다가, 17년 정유【영락 15년.】에 경성(鏡城)의 두롱이현(豆籠耳峴) 이북의 땅을 떼어서 다시 도호부로 삼고, 부가참(富家站)에다 목책(木柵)을 세우고 치소(治所)로 삼았다.
복호봉(伏胡峯)【부의 동쪽에 있는데, 본부 사람들이 진산(鎭山)으로 삼는다. 】대천(大川)은 두만강(豆滿江)과【부(府)의 동북쪽에 있다. 그 근원이 백두산(白頭山)에서 나오는데, 동쪽으로 흘러서 동량북(東良北)으로부터 사지(舍知)·오음회(吾音會)·수주(愁州)·동건(童巾)·다온(多溫)·미전(迷錢) 등지를 지나 회질가(會叱家)에 이르고, 남쪽으로 흘러서 소다로(所多老)·동림(東林)·오롱초(吾弄草)·아오지(阿吾知) 등지를 거쳐 공주(孔州)를 지나고, 동쪽으로 23리를 흘러서 사차마도(沙次亇島)에 이르러 갈라져 5리 정도쯤 흘러서 바다로 들어간다. 】수빈강(愁濱江)이다.【두만강 북쪽에 있다. 그 근원은 백두산 아래에서 나오는데, 북쪽으로 흘러서 소하강(蘇下江)이 되어 공험진(公險鎭)·선춘령(先春嶺)을 지나 거양성(巨陽城)에 이르고, 동쪽으로 1백 20리를 흘러서 수빈강이 되어 아민(阿敏)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사방 경계[四境]는 동쪽으로 바다에 이르기 20리, 서쪽으로 경성(鏡城) 두롱이현(豆籠耳峴)에 이르기 40리, 남쪽으로 연해(連海) 굴포(堀浦)에 이르기 12리, 북쪽으로 공험진에 이르기 7백 리, 동북쪽으로 선춘현(先春峴)에 이르기 7백여 리, 서북쪽으로 오음회(吾音會)의 석성기(石城基)에 이르기 1백 50리이다.
호수가 2백 91호요, 인구가 3천 2백 33명이다. 군정은 익속군(翼屬軍)이 3백 1명, 수성군(守城軍)이 58명이다.
땅이 기름지다. 간전(墾田)이 52삭(朔) 13일(日) 3조(朝) 반조(半朝)【이것이 바로 본부(本府)의 전지(田地)이다. 본래 타량(打量)함이 없으므로, 곧 일경(日耕)으로써 근거(根據)를 삼았다. 】2천 1백 82결이다.【논은 겨우 50결인데, 이것도 경성(鏡城)에서 떼어 내어 내속(來屬)시킨 것이다. 】토의(土宜)는 피·콩·조·메밀이다. 토공(土貢)은 표범가죽·곰가죽·사슴가죽·삵가죽·여우가죽·잘[獺皮]이요, 약재는 녹용·당귀(當歸)·인삼·망초뿌리[秦]·방풍(防風)·택칠(澤漆)·속새[木賊]·삿갓나물[蚤休]·바디나물뿌리[前胡]이요, 토산(土産)은 범의 가죽·연어·문어·상어·방어·대구·황어(黃魚)·송어·굴·미역·곤포(昆布)·다시마이다. 염분(鹽盆)이 15개이다.
읍 목책(邑木柵)【둘레가 7백 38보(步)이다. 】고랑기 목책(高郞岐木柵)이 부의 동북쪽에 있고,【둘레가 1백 66보이다. 】청암 목책(靑巖木柵)이 부의 서쪽에 있고,【둘레가 3백 보(步)이다. 】부리하 목책(夫里下木柵)이 부의 서쪽에 있고,【둘레가 2백 1보(步)이다. 】용성 목책(龍城木柵)이 부의 서쪽에 있다.【둘레가 2백 75보(步)이다. 】동림성(東林城)【동쪽으로 두만강을 끼고 있다. 안에 큰 우물이 있는데, 둘레가 21보(步)나 되며, 그 깊이는 헤아릴 수 없다. 태종 원년 신사에 그 성을 수축하여 경원부(慶源府)의 산성(山城)으로 삼았다. 】아오지 고성(阿吾知古城)이 동림성(東林城) 남쪽에 있고,【옛 경원부(慶源府) 때에 군사를 주둔시켜 수어(守禦)하던 곳이다. 】공주성(孔州城)이 아오지성 남쪽 두만강 가에 있다.【옛 경원부(慶源府) 때에는 읍성(邑城)을 삼았었다. 】공주성(孔州城) 남쪽 5리쯤 되는 평야(平野) 가운데에 두 개의 둥근 봉우리가 있는데, 남쪽에 덕릉(德陵)을 모셨고, 북쪽에 안릉(安陵)을 모시었다. 태종 10년 경인에 함흥부(咸興府)로 옮겨 모시었다.
동림성(東林城)에서 북쪽으로 5리쯤 가면 소다로(所多老)의 영기(營基)가 있고, 그 북쪽으로 30리에 회질가탄(會叱家灘)이 있으니, 바로 두만강의 하류이다. 강을 건너 10리 되는 넓은 들 가운데에 큰 성이 있으니, 곧 현성(縣城)이다. 안에 6개의 우물이 있다. 그 북쪽으로 90리 되는 곳의 산상(山上)에 옛 석성(石城)이 있으니, 이름이 ‘어라손참(於羅孫站)’이다. 그 북쪽으로 30리에 허을손참(虛乙孫站)이 있고, 그 북쪽으로 60리에 유선참(留善站)이 있으며, 그 동북쪽으로 70리에 토성기(土城基)가 있으니, 곧 거양성(巨陽城)이다. 안에 돌기둥 둘이 있으니, 예전에 종(鍾)을 달던 곳이다. 종의 높이가 3척, 지름이 4척이 넘었었다. 일찍이 경원(慶源) 사람인 유성(庾誠)이란 자가 그 성(城)에 가서 그 종을 부수어서 말 9마리에 싣고 왔는데, 겨우 10분의 1에 지나지 않았었고, 따라갔던 사람 30여 명이 모두 죽었다. 그 나머지 쇠붙이는 풀숲 가운데 버려져 있었으나, 누가 감히 가져가지 못하고 있다. 그 성은 본래 고려 대장(大將) 윤관(尹瓘)이 쌓은 것이다. 거양에서 서쪽으로 60리를 가면 선춘현(先春峴)이니, 곧 윤관이 비(碑)를 세운 곳이다. 그 비의 4면에 글이 새겨져 있었으나, 호인(胡人)이 그 글자를 깎아 버렸는데, 뒤에 사람들이 그 밑을 팠더니, ‘고려지경(高麗之境)’이라는 4자가 있었다. 선춘현(先春峴)에서 수빈강(愁濱江)을 건너면 옛 성터[城基]가 있고, 소다로(所多老)에서 북쪽으로 30리를 가면 어두하현(於豆下峴)이 있으며, 그 북쪽으로 60리에 동건리(童巾里)가 있고, 그 북쪽으로 3리쯤의 두만강탄(豆滿江灘)을 건너서 북쪽으로 90리를 가면 오동 사오리참(吾童沙吾里站)이 있으며, 그 북쪽으로 60리에 하이두은(河伊豆隱)이 있고, 그 북쪽으로 1백 리에 영가 사오리참(英哥沙吾里站)이 있으며, 그 북쪽으로 소하강(蘇下江) 가에 공험진(公險鎭)이 있으니, 곧 윤관(尹瓘)이 설치한 진(鎭)이다. 남쪽으로 패주(貝州)·탐주(探州)와 인접(隣接)하였고, 북쪽으로 견주(堅州)와 접(接)해 있다. 영가 사오리(英哥沙吾里)에서 서쪽으로 60리를 가면 백두산(白頭山)이 있는데, 산이 대개 3층으로 되었다. 꼭대기에 큰 못이 있으니, 동쪽으로 흘러 두만강(豆滿江)이 되고, 북쪽으로 흘러 소하강(蘇下江)이 되고, 남쪽으로 흘러 압록(鴨綠)이 되고, 서쪽으로 흘러 흑룡강(黑龍江)이 된다. 그 산에 사는 새와 짐승은 모두 흰빛이며, 산허리 이상은 모두 속돌[水泡石]로 되어 있다. 부(府)의 서쪽으로 80리에 오음회현(吾音會峴)이 있고, 25리에 대령(大嶺)이 있으니, 이름이 ‘청산(靑山)’이며, 그 서쪽으로 10리에 큰 산이 있으니, 이름이 ‘다갈산(多曷山)’이다. 부의 남쪽으로 35리에 굴포(堀浦)가 있고, 동쪽으로 5리쯤에 창기(倉基)가 있는데, 속설에 전하기를, “ 고려[前朝]에서 북벌(北伐)을 할 때 조전(漕轉)하여 위수(委輸)5241) 하던 곳이라.” 한다. 부(府)의 남쪽으로 20리 바닷가에 순지(蓴池)와 웅구참리(雄丘站里)가 있고, 동쪽으로 장포(長浦)가 있으며, 그 동쪽으로 50리에 큰 못이 있는데, 바다와 통한다. 속설에 전하기를, “용(龍)이 있는 곳이라.” 한다. 진주(眞珠)와 명패(明貝)가 난다.
온천(溫泉)이 1이요,【부의 서북쪽 10리 되는 부회환(釜回換)에 있는데, 호인(胡人)이 왕래(往來)하기 때문에 정천(井泉)을 열지 아니한다. 】참(站)이 1이니, 회수(懷綏)이다.【옛 이름은 부거(富居)이다. 예전에는 시원(時原)·웅구(雄丘)·강양(江陽) 등 3참이 있었으나, 호적(胡賊)의 해(害)를 입어 이산(離散)되었다. 태종 10년 경인에 합속(合屬)시켰다. 】봉화가 2곳이니, 남산(南山)【남쪽으로 여배자개(餘背者介)에 응한다. 】·여배자개(餘背者介)이요,【남쪽으로 경성(鏡城) 청암(靑巖)에 응한다. 】해도(海島)가 5이니, 초도(草島)【부의 동쪽에 있다. 예전에 호인(胡人)이 목마(牧馬)하던 곳인데, 속설에 전하기를, “좋은 말[良馬]이 난다.”고 한다. 그 옆에 소초도(小草島)가 있다. 】·적도(赤島)【부의 동쪽에 있는데, 육지와의 거리가 1리이다. 닭[鷄子]을 기른다. 】·난도(卵島)【적도(赤島) 남쪽에 있는데, 뭇 새들이 알을 낳아 기른다. 】·후라두도(厚羅豆島)【난도(卵島) 동쪽에 있는 데, 육지와의 거리가 30리이다. 역시 뭇 새들이 알을 낳아 기른다. 】·시반두대도(時反豆大島)【후라두도(厚羅豆島) 동쪽에 있는데, 육지와의 거리가 1리이고, 그 동쪽으로 3백 40리쯤이 수빈강(愁濱江)이다. 동쪽으로 바다 가운데에 섬들이 있으니, 대개 1백 개나 되며, 그 모양이 바둑[碁]을 벌여 놓은 것 같다. 새와 짐승들이 많으므로, 야인(野人)들이 간혹 사냥을 행한다. 】이다.
【영인본】 5책 697면
【태백산사고본】 59책 155권 10장 B면
왜 말을 정확하게 못합니까?
제가 무슨 말을하는지도 모르고...그러니 제말을 어떻게 반박해야할지도 모르고...
그러니까 결국 지도상의 위치는 모르신단 말씀이죠?
처음부터 지도상 위치는 아시냐고 물어봤는데 계속 쓰잘데없는 자료만 갖다붙이시네요.
그것도 똑같은걸.
님이 링크한 자료에 나오는 공험진 방어사를 둔 윤관이라는 양반이 조선인이 아니라 고려인인건 아세요?
세종대왕이 공험진 위치를 잘 알았을거라고주장하시는데
조선왕조 실록에 세종대왕이 자기입으로 모른다고 말합니다.
“동북 지경은 공험진(公嶮鎭)으로 경계를 삼았다는 것은 말을 전하여 온 지가 오래다. 그러나 정확하게 어느 곳에 있는지 알지 못한다"
세종21년기록입니다.
박근혜가 최남단 섬이름을 모릅니다. 대통령이 이름 몰라도 다른 자료로 확인가능하며
추후에 그 위치가 정확히 짚어지면 국경이 될수 있죠.
그런데 공험진의 위치가 정확히 나왔습니까? 지금도 공험진 위치 정확히 몰라서 우왕좌왕대고 있어요.
1. 어딘지 정확히 비정되지도 않은 공험진이 국경이라고 주장한다.
2. 조선왕조실록에 수십번은 더 등장하며 온갖 조선지도들이 증명하는 국경인 압록-두만을 국경으로한다.
정상적인 상식을 가진 인간이라면 2번을 고릅니다.
최소한 조선왕조실록에서 압록-두만강을 조선의 국경으로한다고 명시한것은 인정을 하시나요? 수십번 나온 내용인데도 그건 죽어도 인정 못하시죠?ㅋ
그리고...
심양왕따위로 고려가 만주를 다스렸다는 근거를 대십니까?
야...그 몽골에 복속되어 민족역사상 유례없는 치욕의 역사를 찬란한 역사로 바꾸시다니
정안국은 좀 낫네요. 흥요국? 흥요국 몇년짜리에요? 그건 아세요?
진짜 한심한게...
1. 공험진은 어딘지 모름 ㅋ 세종대왕도 모름 ㅋ
2. 압록두만은 실록에 조선의 국경이라도 수도없이 나옴
그러나 1번만 믿는다능.
진짜 한심하죠. 왜그러세요 정말? ㅋ
실록 내용에서 1번 2번이 충돌하면 1번을 따를래요 2번을 따를래요?
제정신이면 1번 선택 안합니다.
왜. 다른 기록과 죄다 충돌하거든요.
아니 그전에 공험진이라고 어렴풋이 생각은 하지만 현실적으로 압록-두만으로 경계를 삼았따는 매끄러운 해석까지 가능할 정돕니다.
그런데 1번을 고집하면 정말 답없는 사람이죠.
반박은 좀 반박답게 합시다..
사이비나 재야사학이라는 놈들은 꼭 수많은 반대증거는 다 무시하면서
유리한거 한개에만 죽어라 매달려
과거의 국경은 오늘날과 좀 다른 개념입니다.
과거의 국경은 면의 개념이고, 현재는 선의 개념이죠.
우리랑 만주족이랑 발원부터 역사적 공간까지 중첩되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어느 한쪽만의 것이라고 하기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만주란 영역도 그렇습니다. 만주는 상당히 큰 공간입니다. 지금 러샤에 떼먹힌 연해주지방도
넓은 의미로는 만주영역이죠. 만주에는 다양한 민족들이 예나 지금이나 삽니다.
우리가 남만주 일대에선 영향력을 가지고, 실제로 고려, 조선시대까지도 많이 살기도 했으나, 북만주까지 우리꺼라고 하기엔 어렵죠. 고구려? 발해?때 우리꺼라고 해도, 그때도 거긴 고구려와 발해내부의 소수민족들이 살던 공간이였고..
지금도 거긴 퉁구스계통의 오로촌이나 다우르족 같은 애들이 사는 동네임..
만주족이란 개념도 17세기에 생긴 개념이고, 그이전 여진이나 말갈과 친연관계가 있으나,
완전히 같다고 할수는 없습니다. 워낙 부족별로 나눠져 살던 애들이라..
제가 알고 있기론, 압록강 이남은 조선이고, 건너면 청이고 딱 나누어지는게 개념이 아니라, 그 사이에 중간지가 있었습니다. 열하일기에 보면, 요동의 책문을 지나야 청나라 땅이라고 하고, 거기가 본격적인 국경출입문이였습니다.
사실, 청은 중원으로 입관뒤에 만주를 봉금해 놓은 상태였고, 따라서 지들 고향이고 발원지라서 신성하게 여겼으나 현실적으론 관리가 잘 안 되었습니다. 대국의 입장에서, 윗분 말씀대로 백두산 정계비때 조선에게
갑질을 했다곤 하나, 실질적으로 정계비가 있어도 유명무실했고, 조선인들이 그거 무서워서 코앞에 있는 백두산 못 간것도 아니였죠.
고려시대 통틀어 함경도를 채 영토로 먹지 못했고..
윤관이 17만을 이끌로 여진의 영토로 쳐들어가 성을 쌓은 곳도 함경도고..
바로 수십년뒤 여진이 금나라를 세워 송을 밀어내고 중원에서 떵떵거리고 살았으니,
심양왕 하나 가지고 만주는 고려꺼 하기가 참 머하죠.
영토문제라기 보다는,
고려인을 많이 중앙에 불러다 쓴 원이 여진을 견제하려고 여진과 사이 안 좋은
고려를 끌여들였다고 봐야죠. 이이제이라고나 할까요.
충선왕은 원 황실 후계문제까지 개입했고, 기황후를 보더라도 고려인들이
원나라 중앙에서 있다보니, 심양왕이라는 타이틀을 붙여준 것이지.
실제로 여진을 통치할 군권을 쥐어준 것도 아닌 명예직일뿐..
현실은 쪼그만 땅댕이에서 고려의 북방영토도 원나라에 뺏긴 상황에서,
심양왕으로 만주는 고려꺼 하긴 거리감이 많네요.
(원풍5년,1083) '선조 시기에는 여진이 항상 등주에 와서 말을 팔았는데 뒤에 마행도가 고려에 속하게 되어 막혀서 끊겨 여진족이 오래도록 오지 않았다고 들었다.지금 조정이 고려와 더불어 왕래를 하는데 고려왕에게 조서를 내려 여진이 만일 중국에 말을 팔고자 하면 마땅히 길을 빌리도록 허락하겠다'라는 조서를 내렸다.그러나 여진의 사신은 끝내 오지 않았다.
갑자일에 거란에서 어원판관 야율골타를 파견하여 동북여진으로 가는 길을 빌려달라고 청했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고려사> 현종 세가, 17년 윤5월
문종 27년(1073) 4월 동여진 15주 족장들이 무리를 이끌고 잇달아 찾아와 군, 현을 설치해 달라고 애걸하였다. 5월에는 서연진 족장 만두불(漫豆弗) 등이 동여진에게 했듯이 자신들의 지역에도 주, 군을 설치해 달라고 요청했다. 6월에 동북면병마사가 '여진족 1238호가 와서 우리 국적을 갖기를 원하니 주의 이름을 말하여 정하게 해달라'고 아뢰었다.
심양왕이라는 타이틀을 붙여준 것이지.
실제로 여진을 통치할 군권을 쥐어준 것도 아닌 명예직일뿐.. >?? ㅋㅋ
여진이 나라의 기원을 '고구려'에 두고 있는 점은 기특한 점이고..
금태조가 신라계이고, 청황실 성이 애신각라로, 역시 신라계임을 스스로 증명해보이긴 하지만..
만주는 고구려 멸망이후 여진민족의 것이었다고 봐야 되고..
대고구려 전쟁에 쌀배달 한 것 밖에 없던 신라가 포기했던 북방의 영토를,
그나마 고려가 북진정책으로 서희때 의주지역을 회복하고, 윤관때 함경도를 찔꺽거려,
김종서가 함경도를 정식 영토로 흡수한 점은 이 나라를 잘한 것이나..
고구려 멸망이후로, 우리는 요동에 한번 간 것 밖에 없습니다. 이성계는 압록강도 건너지 않았으니까요..
1,4000년간 여진이 금과 후금을 세워 중원을 호령해,
이 여진이 우리 고려-조선이 아닌 이상, 만주 전체를 우리꺼라 할 수 없는 것이죠.
그러나, 우리는 만주는 우리꺼 주장은 해야죠. 그래야 간도문제나 조선-청 국경문제로
차후 후손들이 만주의 일부라도 차지할 수 있는 근거를 만든 것이죠.
마치 윤관의 동북지방 정벌처럼..
당장 실효적 영토로 들어오지 않더라도, 터닫기를 해놔야되고..
일본의 독도 주장도 전부 이런 목적이라..
공험진 얘기도 나오는데..
윤관이 비록 함경도 위로 치고 갔다고 해도..
성 하나 짓지를 못하고 잠깐 갔다 온 상황에서 그것으로 그 지역이 우리꺼다 라고 하기엔
명분이 부족한 것이죠.
백두산은 원래 조선의 것입니다.
여진도 백두산을 중시여겨서, 청 강희제때 백두산에 조사관을 파견했는데..
이 조사관을 조선사람이 살해해서 난리가 났는데..
이 과정에서 청 강희제도 백두산이 조선의 것임을 인정했고,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조선과 중국과 국경이 압록강이 아니라,
압록강에서 수십킬로 윗 지역이라 당연히 백두산 전체가 조선의 것인 것입니다.
이 지역을 조선이 주민을 정착시키지 않은 것은 분쟁을 우려한 완충지대 성격이었기 때문에,
통일과정에서 중국과 영토분쟁도 이걸 우리가 정식으로 문제삼아야 합니다.
태종 7권, 4년(1404 갑신 / 명 영락(永樂) 2년) 5월 19일(기미) 4번째기사
계품사 김첨이 여진 지역을 조선에서 관할하기를 청하는 주본과 지도를 가지고 명에 가다
계품사(計稟使)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 김첨(金瞻)을 보내어 경사(京師)에 가게 하였는데, 첨(瞻)이 왕가인(王可仁)과 함께 갔다. 주본(奏本)은 이러하였다.
“조사해 보건대, 본국의 동북 지방(東北地方)은 공험진(公嶮鎭)으로부터 공주(孔州)·길주(吉州)·단주(端州)·영주(英州)·웅주(雄州)·함주(咸州) 등 고을이 모두 본국의 땅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요(遼)나라 건통(乾統) 7년(1107년)에 동여진(東女眞)이 난(亂)을 일으켜서 함주(咸州) 이북의 땅을 빼앗아 웅거하고 있었는데, 고려(高麗)의 예왕(睿王) 왕우(王俁)가 요(遼)에 고(告)하여 토벌할 것을 청하고 군사를 보내어 회복하였고, 원(元)나라 초년(初年) 무오년(戊午年)에 이르러 몽고(蒙古)의 산길보지(散吉普只) 등 관원이 여진(女眞)을 거두어 부속시킬 때에, 본국(本國)의 반민(叛民) 조휘(趙暉)와 탁청(卓靑) 등이 그 땅을 가지고 항복하였으므로, 조휘로 총관(摠管)을 삼고, 탁청으로 천호(千戶)를 삼아 군민(軍民)을 관할하였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여진(女眞)의 인민(人民)이 그 사이에 섞여 살아서, 각각 방언(方言)으로 그들이 사는 곳을 이름지어 길주(吉州)를 ‘해양(海陽)’이라 칭하고, 단주(端州)를 ‘독로올(禿魯兀)’이라 칭하고, 영주(英州)를 ‘삼산(參散)’이라 칭하고, 웅주(雄州)를 ‘홍긍(洪肯)’이라 칭하고, 함주(咸州)를 ‘합란(哈蘭)’이라 칭하였습니다. 지정(至正) 16년(1356년)에 이르러 공민왕(恭愍王) 왕전(王顓)이 원나라 조정에 신달(申達)하여 모두 혁파(革罷)하고, 인하여 공험진(公嶮鎭) 이남을 본국(本國)에 환속(還屬)시키고 관리를 정하여 관할하여 다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