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안국 (938년 ~ 1020년 이상 존재함)
여진이 아닌, 고구려 땅에 살던 발해의 유민이자, 마한의 종자
정안국왕 신 오현명이 아룁니다. (중략) 신은 본래 고구려 땅에 살던 발해 유민으로서 (중략) 근년에 거란이 강포한 힘만 믿고 우리 영토를 침략하여 성채를 함락시키고 백성들을 사로잡아 갔으나, 저희 할아버지께서 절개를 지켜 항복하지 않고
定安國本馬韓之種 爲契丹所破 保其西鄙 宋太祖開寶三年 其王烈萬華 因女眞使上表獻 太宗 太平興國六年 又因女眞使上表云 定安國王臣烏玄明言 伏遇聖主 洽天地之恩 撫夷貊之俗 臣玄 明誠喜誠 頓首頓首 臣本以高句麗舊壤 渤海遺黎 保據方隅 涉歷星紀 仰覆露鴻鈞之德 被侵漬 無外之澤 各得其所 以遂本性 而頃歲契丹恃其强暴 入寇境上 攻破城砦 略人民 臣祖考 守節不 降 與衆避地 僅存生聚 以 于今 而又扶餘府 昨背契丹幷歸本國 災禍將至 無大於此 所宜受天 朝之密書 率勝兵而助討 必欲報敵不敢違命 臣玄明 誠懇誠願頓首頓首 元興六年十月日 定安國 王臣玄明 表上聖皇帝前 太宗優詔答之 是時宋欲討契丹故也 端拱二年 其王子因女眞使 獻馬雕 羽鳴鏑 淳化二年 其王子太元 因女眞使上表 其後不至 高麗顯宗九年 定安國人骨須來奔 정안국은 본래 마한의 종자로 거란에게 깨졌는데, 그 서쪽을 지키어 송태조 개보 삼년에 그 왕 열만화가 여진의 사신으로 하여금 표를 올리고 가죽옷을 받쳤다. 태종 태평흥국 육년 또 여진의 사신에게 표를 올려 말하길 정안국왕 신 오현명이 말합니다. 성스런군주께 업드리니 천지의 은혜로 윤택하고 이맥의 풍속을 어루만지시니, 신 현명은 진실로 기뻐하며 머릴 조 아립니다. 신은 본래는 고구려의 옛땅으로 발해의 남은 무리로 한 구석에 의거하여 보존하 고 있습니다. 세월을 보냄에 태평성대을 우러르나, 침략함을 당하여 밖은 윤택하지 못합니 다. 각각 그 본성대로 있는 곳을 얻는 것이데 요즘 거란이 그 강폭함으로 폐하의 지경을 도 둑질 하고 성채를 공격하여 깨뜨려 백성을 사로잡습니다. 신이 조상대를 생각하니 절도를지 키어 항복하지 말하하여 무리와 함께 이땅에 피하여 겨우 모여 살고 있음이 이와 같습니다. 또한 부여부에서 앞서 거란이 배반하여 본국을 아우르니 재화가 장차 이에 이르니 큰 것이 아닌데도 이와 같습니다. 이에 마땅히 천조의 밀서를 받으니, 승병을 거느리고 토벌함을 도 우니, 반드니 복수를 하고 명을 배신하지 않겠습니다. 신 현명 정성으로 원하며 머릴 조아 립니다. 원흥육년 시월에 정안국왕 신현명이 표를 성황제앞에 올리니 태종이 조서로 이에 답하니, 이제 송이 거란을 치고자 한다. 단공 이년 그 왕의 아들이 여진의 사신으로 하여금 말과 독수리 깃털, 우는 화살을 받쳤다. 순화 이년 그 왕자 태원이 여진의 사신으로 하여금 표를 올린후에는 오지 않았다. 고려 현종 9년 정안국사람 골수가 달아나 왔다.
渤海考 終 고려 현종 9년 =1018년
정안국 : 938년 ~ 1020년 이상 존재함
강동8주: 원래 강동8주라 사서에는 적혀있는데, 2개가 한반도에서 발견되지 않는다하여,
강동6주가 칭함
8주 명칭: 장흥진, 귀화진, 곽주, 귀주(994년), 안의진, 흥화진(995년)
선주, 맹주(996년)---고려서, 동사강목에 기록되어 있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