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발제 핵심을 모르고서 헛다리 짚는 게시글과 댓글이 일부 유저의 도발로 여럿 달리는군요
어지간한 정보와 논의는
동아게에서 검색을 해보면 다 나옵니다
동아게에서 지난 수년 동안 많이 다뤘습니다
제 발제의 핵심은
전한과 후한-조위(-서진)을 구분해서
서북한 문제를 봐야 한다
서북한의 중국계 물질문화는
지배적이지 않을뿐더러
후한-조위(-서진) 시대의 것이 대부분이다
전한은 그 말기에 장성 밖 수비를 오환 등에게 맡겼는데
신(왕망)을 거쳐 후한 초기가 되면
오환이 지금의 산서성과 하북성 일대까지 차지하고 설쳤다
후한 말기 조조의 오환 답돈 정벌 기사를 보면
장성 밖으로 나가는 길이 이미 수백 년 유실된 상태로 방치된 정황 기사가 나온다
고구려 대무신왕 대인 서기 1세기
후한의 낙랑 접수는
고구려를 견제하고자 하는 서북한 집단의 자구적 노력으로
후한에 정치ㆍ군사ㆍ경제적으로 스스로 의탁한 사실의 반영으로 봐야 하며
서북한 지역은 오늘날 조차지와 비슷한 성격으로서
후한-조위(-서진)과 중개무역을 하며
이득을 취했고
고구려는 이를 실리적 추구로 방치했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위략-삼국지-후한서 등은 이를 과장한 것으로 봐야 한다
왜냐 하면
만약 그곳이 낙랑군이었다면
낙랑군으로서의 거명과 거론이 있어야 하는데 극히 적고
지배적이었다 하는데 그 적은 기술도 추상적이며
당시 한반도 상황에 맞지가 않다
서북한 지역에서는 이미 서기 1~3세기 고구려계 물질문화가 관찰되며
고구려계로서 차차 백제적 특성을 띠게 되는
백제계 무덤과 성이 서기전 1세기부터 서기 4세기까지
황해도부터 강원도, 경기도, 충청남북도에 광범위하고
지배적 양상으로 나타난다
후한에 비해서 조위는
고구려를 제압하면서 친중국계의 기미 방식의 교류지역에 불과한 서북한 지역에 대한 직접지배, 또는 강한 복속상태 구축을 시도했으며 그것이 기리영전투라는 기사에 투영된 것으로 보인다
조위 관구검과 왕기의 고구려 침략 당시
군사활동 전개지에는 서북한이 전혀 등장하지 않으며
조위의 침략군은 군량을 서북한이 아닌 현도에서 1천 리 떨어진 부여에 직접 가서 지원 받았다
즉 서북한은 조위에 복속된 행정지가 아니었고
영향관계를 주고 받았으나 전혀 강한 지배력이나 우위성을 획득하지 못 한 관계였음을 시사한다
만약 서북한이 낙랑군이었다 한다면
군량문제뿐만 아니라
군사작전에 있어서도 양쪽에서 고구려를 공격할 수 있었음에도 전혀 그러지 않았으며
도주하는 고구려군이 남하했다가 북상하였음에도 이를 막지 못 했고 오직 왕기의 군대만이 그 뒤를 쫓아갔다가 헛탕을 쳤다
서기 1~3 세기 고구려의 활동반경을 보면
이미 현 요녕성 서부는 물론 하북성, 산서성까지 나타난다
위략-삼국지-후한서-삼국사기 등을 보면
두 곳의 낙랑이 존재하였다
신라본기에는 대무신왕의 낙랑정벌 이후
낙랑기사가 나오지 않고 대신 백제가 등장한다
미천왕 기사에서 고구려는 낙랑을 빼앗은 것이 아니라
약탈한 것으로 그 어디에도 빼앗았다 하는 기술이 없다
사서 기록은 일관성을 띠는데
빼앗았으면 빼앗았다고 쓰고
약탈했으면 약탈했다고 쓰지
빼앗은 것을 약탈했다고 쓰지 않는다
장통의 낙랑 1000여 호 어쩌구는
모용선비의 장수 장통이 고구려를 침입해 주민 1천여 호를 약탈한 사실을 윤색한 것이다
당시 서북한이 낙랑군이었고
장통의 낙랑 1천여 호 귀순이 사실이라 한다면
여기서 1천여 호(7천~1만 명)를 데리고 대체뭔 수로 아무런 갈등 없이 현 요동반도를 거쳐서 현 요서를 지나 가나?
고구려가 현 서북한 지역을 직접 지배지로 전환한 시기는
사학계 통설 미천왕 310년대가 아니라
백제와 첫 교전한 369년을 기점으로 한 4세기 후반으로 봐야 한다
후한-조위-서진의 서기 1~3 세기에
중국계가 칠로도산 동쪽 현 요서지역을 실질 지배한 때는
조위 시절 잠시뿐이었다
당시의 상황은 교치된 구 한사군과 기존 구 한사군이
병립해 있었다
이는 모용선비에 국가가 파괴된 부여가
서진에 국가재건을 요청한 기사에서 잘 나타난다
당시 부여 사신은 서진의 요동군을 방문해 재건을 요청하였는데 서진의 요동태수는 군사를 이끌고 모용선비 지역을 거쳐서 부여사신을 호위하였다
즉
서진은 이미 당빈이 장성을 쌓을 시기인 3세기 말에 요동군, 낙랑군 등을 모두 현 당산시-진황도시 일원에 교치한 상황이었고 이를 기준으로 평주를 새롭게 구획한 것이다 이 서진 평주는 한 우북평 영역에 상당했다
이것이 태강 지리지와 진서 지리지에서의 진장성과 갈석산 삽입의 곡절이다
이러한 구 한사군의 병립은
후한 시대부터 그러했을 것으로 판단되며
기존 낙랑군은
최초의 위치는 확언하기 어려우나
대체로 후한 시대부터
북연이 망할 때까지 현 대릉하 유역에 있었다
이상의 내용은 필자 본인이 동아게에서
지난 수년 동안 무수히 논의하고 설명하고 주장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