牟頭婁
신라 법흥왕 牟卽智
신라가 고구려 백제의 부여계승권을 놓고 치고 받을때 얌전합니다.
왜? 족보가 있는 가문이긴 했지만 족보가 낮았어요, 이에 반해서 고구려 백제는 계승권이 서로 상충했구요.
즉 신라에서 왕권을 얻고 세력강화를 위해서는 족보좀 높여야 했겠죠?
신라에 비슷한 의미의 사건이 있는데 바로 예왕지인의 등장입니다. 소중히 간직했다고 하죠.
즉 남해차차웅때에도 예왕지인이 의미를 갖었다면 역시 개국때부터 북부여와 유관성을 생각해 봐야 합니다.
더 의미있는건 모두루 가문은 고구려에서 북부여에 대대로 세습가문였어요.
모두 삼국사기 이전 금석문 기록들이구요.
거기다 결정적으로 광개토대왕때 신라 때린애들 패러 5만대군 몰고 내려옵니다.
이 시기직후에 남겨진게 모두루 묘지명입니다.
소호금천이니 김일제니 여러분 가정에 혹시 갖고 계신 족보나, 용비어천가나 다 유사한 것들이에요,
중국애들도 똑같습니다. 수많은 위변조를 가차없이 행하죠.
현대에 보면 유치하지만 당시에 고구려나 백제에 대하여 상대적으로 왕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선
어찌 보면 그시대에 필수적인 작업였을 것이죠.
결론을 낸다면 고구려 모두루처럼 그 일파였을 가능성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모용선비와 연관은 무리한 설정이죠,
모용선비 일파였으면 고구려에게 초반에 박살났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