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는 전성기에 서울이 17만 8,936호였고, 1,360방, 55리, 35개의 금입택이 있었다.
제 49대 헌강대왕 대에는 서울로부터 바다 어귀에 이르기까지 집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고,
담장이 서로 맞닿았는데, 초가집은 한 채도 없었다.
절들은 별처럼 늘어서 있고, 탑들은 기러기처럼 줄을 서 있었다.
불법을 숭상하며 그 폐단을 알지 못하였고, 심지어는 여염 마을에까지 탑과 절을
즐비하게 세웠다.
-삼국유사-
왕이 좌우의 신하들과 함께 월상루(月上樓)에 올라가 사방을 둘러보았는데, 서울 백성의 집들이 서로 이어져 있고 노래와 음악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왕이 시중 민공(敏恭)을 돌아보고 말하였다. “내가 듣건대 지금 민간에서는 기와로 지붕을 덮고 짚으로 잇지 않으며, 숯으로 밥을 짓고 나무를 쓰지 않는다고 하니 사실인가?” 민공이 “신(臣)도 역시 일찍이 그와 같이 들었습니다.” 하고는 아뢰었다. “임금께서 즉위하신 이래 음양(陰陽)이 조화롭고 비와 바람이 순조로와 해마다 풍년이 들어, 백성들은 먹을 것이 넉넉하고 변경은 평온하여 민간에서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거룩하신 덕의 소치입니다.” 왕이 기뻐하며 말하였다. “이는 경들이 도와준 결과이지 짐(朕)이 무슨 덕이 있겠는가?”
우리나라 조선시대 사극에서 보여주는 지푸라기 집에 대한 인식은 버려야 할 듯요. 예전부터, 중국만큼 기와집도 많았고, 건축기술도 좋았는데, 중국보다 좋지 않다는 편견은 버리셔야 할 듯~~ 조선시대만 보아도 기와집이 엄청났는데, 무슨 논리로 지푸라기집을 죄다 만들어 놓았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