텐메이 대기근 당시 사람의 고기를 구워먹는 왜인들의 그림.
에도시대 농민의 반란 횟수가 3200여건에 이름
아래 무슨 17세기 조선을 휩쓴 대기근만을 보고 정작 조선이
이런 세계적 기후 변동의 악조건을 얼마나 슬기롭게 극복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던 그 시대 선조들의
열정과 역사성에 대한 고찰도 없이 조선 문명은 뭔 아작났니
어쩌고 식의 웃긴 소리나 해서 한 글 간단히 올립니다.
어느 나라고 정작 그나라의 저력과 선진적 모습은
한때 잘나갈때가 아니라 도리어 악조건 상황속에서 얼마나 혁신을 통해서
환골탈태하는지, 자체적, 내재적 역량을 통해서 더욱 그 사회와 국가 그리고
국민의 저력과 선진적 시대상을 재조명 할 수 있을 것입니다.
1592년부터 왜의 대규모 기습전으로 시작된 임진왜란은 1598년까지 7년간
이어지면서 그동안 대조선으로 동북아의 독자적 황제적 질서를 구축하고
있던 조선의 사회전반을 뒤흔들었고 그기에 전세계적으로 소빙기시대가 17
세기 본격화 되면서 유럽과 아시아 지역도 이런 이상기온과
흉작 그에 따른 사회 전반적 동요와 피폐들이 여기 저기 일어나게 됩니다.
임진왜란이라는 전란의 후유증을 제대로 씻어내기도 전에 이런 소빙기를
맞이 하면서 상당히 힘든 시기를 겪게 되지만
그 후유증을 다른 나라보다 더 억제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조선는 더욱 발전적 사회상으로 시스템과 제도를 혁신하면서
새롭게 재정비 구축을 통해 근대화된 국가로
나아가는 계기를 마련하게 됩니다.
백성들의 피해를 막기 위해
우선 주거환경에서 고유의 전통 온돌 보급 장려부터
목화재배를 확대해서 의복의 방한성을 높이고
굶어죽는 아사자를 예방하기 위해 전국 구휼제도를 정비하고 이동을
원활히 하기 위해 수로의 확대와 바닷가에 곡창 비축소를 설치해서 자비곡이라
는 진휼용 환곡을 신속히 나르기 위한 사회 안전망 구축과 함께 농법에서도
이런 냉해에 대비해 조생종을 국가에서 개발 보급하고 내한성이 강한 산벼와
한전적 수전농법이 장려 및 전국 수리시설을 맡아 보는 제언사까지
설치하면서 개혁을 단행했고,
대동법 같은 혁신적 근현대적 개념의 세제 개법을 통해 오늘날 부자 누진세
같은 호당이 아닌 결당으로 부자 증세와 가난한 이들의 세금을 감세하는 효
과와 소작농에게도 전기 절반을 내는 반수제에서 3분1만 내는 도조법으로 유
리하게 적용( 왜의 대다수 백성들과 농민들은 혼토모노나리라 불리는 조세
를 쌀로 납부했는데 수확량의 5~7할에 이르는 막중한 세금을 바쳤음)및 빈
민 구제를 위해서 재정 마련을 위해 더욱 활성화 되었던게 17세기에
활발히 주조된 상평통보같은 화폐유통과 이에 따른 상품 화폐경제로의 전환임.
물론 이에 따른 조선의 신분제도 점차 와해되면서 근대적 사회로 전진하고
있었고.그외 세계최초의 공중 보건 의학서인 동의보감을 편찬해서
서민 지식층의 증대와 더불어 오늘날 현대 의학 분업처럼 그리고 특정
계층만의 의료 전유물이 아닌 근대적 사회 보건사회로 나아가고 있었단
말이죠.)
옆 왜국만해도 지리적으로 우리보다 적도에 가까운 나라임에도 1642년 간
에이 대기근, 1732년 교호대기근, 덴메이 대기근(1782~1788년)에 무려
1833년부터 39년이나 지속된 덴포 대기근이고 몇십년 단위마다
대기근과 전염병으로 죽어나간 나라이고 시기임. 무엇보다 이 에도시대는
왜국 인구의 7%를 차지하던 죠닌 계층은 이런 대다수 농민들울
쳐 빨아서 풍족히 살았지만 대다수 농민들은 5,7할의 막대한 세금에 더구나
이런 대기근이 와도(왜의 대기근은 조선처럼 전국적으로 한방에 크게 휩쓴것
도 아니고 지역마다 국지전 양상이였음에도) 조선처럼 제대로된 구휼제도도
없다보니 굶주림에 지친 백성들은
도시로 몰려와서 미곡을 약탈하거나 항의하는 등 반란들이 계속해서 생겨나
면서 왜국에서 찬란한 에도시대 어쩌고의 실상과는 달리 이런 농민
반란이 3200여회에 달할 정도였단 말이죠.
그기에 에도 시대 자체가 후진적 도시구조와 주거환경이라서
대다수 백성들은 대도시조자도 밀집 허술한 가옥에 따른 대화재 빈번과 불결
한 환경에 전염병으로 신음하며 살던 나라였고.(애초 도시 구조 자체가 조선
처럼 그리고 근현대적 백성 애민 최소한의 백성을 위한 사회 안전망 개념은
나 등졌고 유럽은 마녀사냥이 극에 달해서 수십만의 죄없는 무고한 이들이
화형당해 죽거나 어떤 곳은 군사적 공포정치들이 행해졌든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프랑스 혁명도 이런 흉흉한 민심이 도화선이 되었다고 보는 시각도 있죠.)
사람들이 무슨 유럽의 산업혁명 어쩌고만 보면서 마치 유럽 사회전반이
앞선 사회시대이거나 일반인들의 풍족한 생활상 어쩌고식으로
떠올릴지 모르겠지만 17,8세기고 유럽 사회와 사람들의 수준은 자연재해를
마녀사냥식으로 몰 정도로 여전히 전근대적 풍토였음( 산업화의 선두라는
영국의 19세기 모습역시 마르크스는 임금 노예로 표현하면서
그 열악한 근로, 생활, 교육, 의료 환경에 탄식을 했더라는.)
그에 비해 조선은 이미 일찍히 이런 정밀한 천문 관측과 더불어
세계최초의 측우기등 강우량을 정밀히 계측하면서 과학적 농법과 왕 역시도
애민적 사고로 오늘날 같은 사회 안전망을 재정비하고 혁신을
통해 백성을 구휼하기 위해 노력했던 나라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