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조선이 명에 조공을 많이 하려한 이유
조선은 조공을 많이 하고자 하고 명나라는 적게 받고자 한 것은, 조공이 일방적인 헌납이 아니라 쌍방적인 물물교환이었기 때문이다. 조공을 받는 황제국은 회사(回賜)라는 답례를 해야 했다.
황제국은 조공 받은 것보다 훨씬 더 많은 회사를 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일반적으로 동아시아 황제국들은 무역적자를 보면서 패권을 유지했다. 이것은 돈을 많이 쓰는 쪽이 주도권을 잡는 세상사의 이치를 반영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신하국 입장에서는 조공을 자주 하는 것이 이익이고, 황제국 입장에서는 조공을 적게 받는 것이 이익이었다.
또 신하국 사신이 중국을 방문하게 되면, 사신이 지나는 지방 관청에서는 신하국 사신에게 숙식과 선물을 제공해야 했다. 그래서 신하국 사신이 자주 방문하면 명나라의 재정적자가 증대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조선은 매년 세 차례 조공을 하고자 하고, 명나라는 3년에 한 차례만 받고자 했던 것이다.
3년에 한 차례만으로도 조공 횟수는 많은 편이었다. 명나라의 행정법전인 <대명회전>에 기록된 국가별 조공 횟수에 따르면, 유구(오키나와)는 2년에 1회, 섬라(태국) 및 안남(베트남)은 3년에 1회, 일본은 10년에 1회였다.
유구·섬라·안남은 다른 나라에 비해 조공을 많이 하는 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의 조공을 3년에 1회로 제한한 명나라의 조치는 조선에 대한 차별 대우가 아니었다. 하지만, 조선은 1년에 세 번은 조공을 해야겠다고 우겼다.
1년에 3회면, 3년이면 9회다. 명나라는 3년에 1회만 하라고 한 데 반해, 조선은 3년에 9회를 하겠다고 했다. 따라서 조선의 주장은, 명나라에 대한 무역흑자를 아홉 배로 늘리겠다는 협박과 마찬가지였다.
정도전은 요동정벌을 통해 고구려 고토 수복, 사병혁파 등의 여러가지 의미를 두었지만 그 중 한가지가 명에 군사적 압박으로 무역흑자를 늘리겠다는 의도도 있었다.
정도전이 죽고 태종 이방원 때 부터 명나라에서는 무역문제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이 나왔다. 조선에 대해서만큼은 과감한 무역특혜를 주자는 목소리가 나온 것이다.
명나라는 정도전이 제거된 지 2년 뒤인 1400년에 과감한 무역특혜를 조선에 제공했다. 조선에 대해서만큼은 이례적으로 1년에 3회의 조공을 인정한 것이다. 태종 이방원이 반 명나라 자주파를 제거해 줘 명나라의 안보를 강화해 준 것에 대한 명나라 황실의 답례로 무역적자를 감내한 것이다.
이로 인해 조선은 명나라와의 무역에서 최대의 무역흑자를 거두는 나라가 되었다. 조선의 조공 사절단은 매년 세 차례 명나라에 조공을 하고 그만큼의 무역흑자를 안고 돌아왔다.
조선의 흑자폭은 중종 때인 1534년부터는 한층 더 확대되었다. 이때부터 명나라는 조선에 1년에 네 차례의 조공을 허용했다. 이런 무역특혜는 명나라가 무너진 1644년 이전까지 계속 유지됐다.
2. 명나라의 실익
명나라도 조선 못지않은 실익을 얻어냈다. 명나라는 무역특혜를 제공하는 대신, 여진족과의 전쟁에 조선군을 동원했다. 명나라는 툭하면 파병을 요청했고 그때마다 조선은 군대를 보내야 했다.
여진족은 왜구와 더불어 명나라의 안보를 가장 많이 위협하는 세력이었다. 명나라는 조선군의 지원에 힘입어 여진족의 위협을 상당부분 감소시킬 수 있었다. 조선이 얻은 무역흑자는 결국 조선군 파병으로 상쇄된 셈이다. 명나라는 무역적자를 보는 대신 조선군을 공짜로 이용한 셈이다.
명나라의 요구에 휘말려 툭하면 파병을 하는 과정에서 조선이 잃은 것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가장 중요한 손실은, 조선의 주적이 아닌 명나라의 주적(여진족)을 막기 위해 조선군이 힘을 소모하다 보니, 일본군이나 왜구의 침략에 대한 준비를 소홀히 하게 됐다는 점이다.
명나라의 요구에 따라 여진족과의 전쟁에 휘말리다 보니, 조선군은 여진족 기마병을 상대하는 데만 익숙한 군대가 되었다. 임진왜란 초기에 조선군이 일본군에 연전연패한 것은, 일본군 같은 보병 위주의 군대에 대한 훈련을 게을리 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조선은 명나라 덕분에 무역흑자를 얻었지만, 명나라 때문에 임진왜란을 당한 측면이 있었다.
조선은 정도전을 잃고 명나라에 무역흑자를 얻어 냈다면 자주국방에서는 손해를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