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외에도 증거가 수십가지가 있긴합니다.
그런데도 조선이 한반도에 국한됬다고 생각하시는것은
단순한 고정관념에 불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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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경복(河敬復)·황형(黃衡)·최윤덕(崔潤德)·어유소(魚有沼) 같은 사람들을 보면 제사드린 고기를 받고서 길을 떠나 멀리 사막 지방에 출전하여 한해(瀚海)를 건너기도 하면서 중국으로부터 상을 받기까지 하였다.
국역조선왕조실록 > 정조 19년 을묘(1795,건륭 60) > 8월18일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 >
간양도 비홍홍(기러기가 난다?)은 조선 경성부 남쪽 90리에 있다. 중간에 섬이 있어 간양도라고 한다. 초목이 없고 모래가 넓게 펼쳐져 있고 북해를 가까스로 막고 있다.
소무전에는 흉노족이 북해위로 이동했다. 호인들이 말하기를 안서라고 한다. 섬은 양을 기르기떄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사마씨의 훈족전에는 훈족은 동으로 예맥조선과 접한다고 하는데 지금 조선 관북이 옛 흉노족경계이다. 요동지에는 목랑고라고했는데 모두 같은 곳이다.
신지록에는 소무가 양을 기른곳이 섬서성 진번위지역이라고 한다. 그래서 소무산이 있다. 왕소군묘는 산서성 대동부에 있다. 서쪽에는 풀이 많다. 섬서는 북해와 아득히 먼데 한서에는 북해라고 했다.
아아! 군사가 이미 나가는데 명분(名分)이 있고 군대가 마땅히 정직하매 웅장(雄壯)하게 된다. 죄인(罪人)을 잡아 신문하고 오랑캐를 잡는 것이 목적이니, 내 한사람이 어찌 이오로(伊吾盧)에 분심(憤心)을 풀려고 하겠는가? 말을 쉬게 하고 전쟁을 그치게 하여 변방 백성을 북방 들에서 편안하게 하고자 한다.”
신이 삼가 살펴보건대, 고려는 진후(晉侯)가 나라를 세운 때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8백여 년이 되었는데, 비로소 삼성(三姓)을 바꾸었다. 당나라 이전에는 소위 고려(高麗 고구려를 가리킴)라고 하는 나라는 삼국 가운데 한나라에 지나지 않았으며, 오대(五代) 이후에는 삼한과 백제를 병합하여 하나로 통일하였으나, 승국(勝國 원나라를 가리킴) 때에는 오히려 탐라(耽羅)가 독립된 나라로 있었다. 지금은 탐라 역시 차지하여서 국토의 넓이가 수나라나 당나라가 정벌하러 갔을 때 비해 이미 몇 배는 된다. 그러나 그 나라는 자못 예의를 숭상하고 분수를 잘 지킨다. 이에 명나라에 들어와서부터는 중국 조정을 공손하게 섬겨, 철마다 조공을 바치면서 신하로서의 예절을 폐하지 않고 있다. 《대학연의보(大學衍義補)》
그런데 우리 태조(太祖)가 명을 받고 이두란(李豆蘭)을 시켜서 야인(野人)의 추장들을 무마하여 귀부(歸附)하게 하였던바, 드디어 이란두만(移蘭豆滿)에 이르기까지 다들 내복(來服)하겠다고 패검(佩劍)하고 입위(入衛)하게 되었으니, 이를테면 여진(女眞)의 간타두만(幹朶豆漫), 협온맹가(夾溫孟哥) 티무르[帖木兒] 등과 올량합(兀良哈)의 토문념아(土門拈兒), 아호아(牙戶兒), 일혐진(逸嫌眞) 등과 올적합(兀狄哈)의 속평강남(速平江南), 돌아라합(突阿刺哈), 백안활아간(伯顔濶兒看) 등이 이들이었다.
임하필기 제13권 북쪽 폐사군(廢四郡)의 고사(故事)
양성지(조선 성종때 대신)
우리 동방은 요순과 같이 일어났는데 폭과 둘레가 만리이다.
우리 나라는 요수(遼水)의 동쪽 장백산(長白山)의 남쪽에 있어서 3면이 바다와 접하고 한쪽만이 육지에 연달아 있으며 지역의 넓이가 만리(萬里)나 됩니다
성종실록 12년 신축(1481)
신은 그윽이 생각하건대, 본국은 안팎이 산과 강으로 되어 있어 넓이가 몇만 리(里)이고, 호수(戶數)가 1백 만이고, 군사가 1백 만으로,요동(遼東)의 동쪽 1백 80리는 연산(連山)을 경계로 하여 파절(把截)을 삼았으니, 성인(聖人)께서 만리를 헤아려 밝게 보시는데 어찌 토지가 비옥하여 가축을 기르거나 사냥하는 데 편리하다는 것을 모르고서 수백 리의 땅을 버려 그 곳을 비게 하였겠습니까본국 평안도(平安道)의 백성 가운데 부역(賦役)에서 도망한 자가 저곳에 흘러 들어갔으니, 동쪽으로는 개주(開州)로부터 서쪽으로는 요하(遼河)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바다에 이르러, 대개 고을의 취락(聚落)이 서로 바라보이는데, 몇천만 명이나 되는지 알지 못합니다.
예종실록 6권, 1년(1469 기축 / 명 성화(成化) 5년) 6월 29일(신사) 2번째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