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삼국사기 제46권 열전 제6(三國史記 卷第四十六 列傳 第六) 최치원전
“ 엎드려 듣건대 동해 밖에 삼국이 있었으니 그 이름이 마한(馬韓), 변한(卞韓), 진한(辰韓)입니다. 마한은 고구려요, 변한은 백제요, 진한은 신라입니다. 고구려와 백제의 전성기에는 강한 군사가 백만 명이나 되어 남으로 오(吳), 월(越)을 침범하고, 북으로 유(幽), 연(燕), 제(齊), 노(魯)를 뒤흔들어 중국의 커다란 고민거리가 되었으며, 수(隋) 황제가 세력을 잃은 것도 요동 정벌에 말미암은 것입니다. (하략) ”
伏聞 東海之外有三國 其名馬韓卞韓辰韓 馬韓則高麗 卞韓則百濟 辰韓則新羅也 高麗百濟 全盛之時 强兵百萬 南侵吳越 北撓幽燕齊魯 爲中國巨蠹 隋皇失馭 由於征遼
2.
삼국사기 제26권 백제본기 제4(三國史記 卷第二十六 百濟本紀 第四) 동성왕
10년(서기 488), 위(魏)나라가 병사를 보내 쳐들어왔으나 우리에게 패하였다.
十年 魏遣兵來伐 爲我所敗
3.
(1)
동성왕 재위 기간
479 ~ 501
(2)
남제南齊
소도성(蕭道成:427∼482)이 창건한 중국의 왕조(479∼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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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남제서 만동남이열전 백제국
고구려국 조의 뒷 부분과 백제국조의 앞 부분이 고의로 삭제돼 있다
그러나 남아있는 기록만을 보더라도
그 내용과 묘사가 매우 구체적이고 직접적이어서
단순히 북조(북위)의 사서에 그 내용이 없다고 하여 무시하거나 간과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
위와 백제의 전쟁 관련 기록은 백제의 표문과 남제 황제의 조서로 이루어져 있는데
백제가 이미 정한 직책을 인정해달라는 것,
위와 백제의 전쟁의 묘사,
백제의 요구에 그대로 허락한다는 내용으로 구성돼 있다
삼국사기 동성왕 기록에는 488 년 전쟁만 짤막하게 적혀 있는데 남제서의 기록에는 490 년을 비롯한 여러 차례의 전투와 전쟁이 있었음을 정황상 짐작하게 한다
또 중요한 사실은 백제 측이 요구하고 남제 측이 인정한 태수 작위 지역이 최치원의 표문에서 언급한 유ㆍ연ㆍ제ㆍ노ㆍ오ㆍ월 등의 지역과 거의 일치한다는 사실이다
전쟁을 묘사한 기록만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1)
488 년 전쟁을 이르는 것으로 보이는 남제 측의 기록
이 해에 위(魏)의 오랑캐[虜]들이 또다시 기병 수십만을 보내 백제를 쳤는데, 그 지경[界]에 들어서자 모대가 장수 사법명(沙法名)·찬수류(贊首流)·해례곤(解禮昆)·목간나(木干那)를 파견하니, 무리를 이끌고 오랑캐의 군사를 습격하여 이를 크게 무찔렀다.
是歲, 魏虜又發騎數十萬攻百濟, 入其界, 牟大遣將沙法名·贊首流·解禮昆·木干那率衆襲擊虜軍, 大破之.
(2)
490 년 전쟁을 이르는 것으로 보이는, 백제가 올린 표문 상의 기록
건무(建武) 2년(495)에 모대가 사신을 보내 표를 올려 말하였다. "신(臣)이 이전에 책봉을 받았으니, 세세토록 조정[朝]의 영예로움을 입게 되어 감히 절월(節鉞)6을 지니고 열벽(列辟)을 무찔렀습니다. 지난번에는 저근(姐瑾) 등이 나란히 빛나는 벼슬을 받았으니, 신서(臣庶, 신하와 서민들)가 크게 평안하였습니다. 지난 경오년(庚午年, 490?)에 험윤(獫狁)이 뉘우치지 않고 거병하여 깊이 쳐들어왔습니다. 신(臣)은 사법명(沙法名) 등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역습(逆討)케 하였는데, 밤에 습격하여 천둥처럼 내려치니, 흉리(匈梨)가 크게 당황하여 바닷물에 씻겨내려가듯이 무너졌습니다. 기세를 타서 달려나가 쫓아서 베어넘기니, 쓰러진 시신이 들판을 붉게 물들였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그 날카로운 기세를 꺾으니, 고래처럼 사납던 적들이 흉악함을 감추었습니다.
建武二年, 牟大遣使上表曰: 「臣自昔受封, 世被朝榮, 忝荷節鉞, 剋攘列辟. 往姐瑾等竝蒙光除, 臣庶咸泰. 去庚午年, 獫狁弗悛, 擧兵深逼. 臣遣沙法名等領軍逆討, 宵襲霆擊, 匈梨張惶, 崩若海蕩. 乘奔追斬, 僵尸丹野. 由是摧其銳氣, 鯨暴韜凶. 今邦宇謐靜, 實名等之略, 尋其功勳, 宜在襃顯. 今假沙法名行征虜將軍·邁羅王, 贊首流爲行安國將軍·辟中王, 解禮昆爲行武威將軍·弗中侯, 木干那前有軍功, 又拔臺舫, 爲行廣威將軍·面中侯. 伏願天恩特愍聽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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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1)
남제서의 기록에 대한 강단주류사학계의 입장
ㅡ 고려시대(특히 태조 왕건 시기)에 호족과 황족 등에게 제수한 작위를 보면 낙랑, 대방, 조선 등 남제서에 백제 장군과 왕족들에게 제수한 작위와 일부 일치하거나 유사한 것이 있으니
ㅡ 이는 근초고왕 이후 영산강 유역을 비롯한 한반도 서남부 지역과 가야 일부 지역에 대한 백제의 지배력이 강화되면서 백제 전체에 대한 지배구조를 재편, 개편하는 과정의 산물이다
ㅡ 또 삼국사기의 위와 백제의 전쟁 기록은 위가 아니라 고구려거나 위와 고구려의 연합군일 가능성이 높다
(2)
이에 대한 나의 재반론
ㅡ 그런데 씨부랄 왜 요즘으로 치면 군수, 시장, 도지사 임명하는 것까지 좆도 아닌 남제에게 허락을 받냐?
ㅡ 이런 것까지 허락을 받는다는 것은 백제가 이 시기 쥐좆만한 남제의 종속국이었다는 말이냐?
ㅡ 또 남제서를 보면 전쟁의 상황, 요구, 허락 등이 아주 구체적으로 적혀있는데 이를 단순히 남제 측의 왜곡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ㅡ 또 위와 고구려는 한자가 다른데 사서 편찬자들이 문맹이란 말인가?
ㅡ 그리고 그게 동시대 남제서에 버젓이 적혀 있는 것은 무엇인가? 남제는 위와 남북으로 대치한 나라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