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의 강대한 국력(國力)을 익히 알고 있던 황제국 거란과 고려는
만주(滿州)에서의 강력한 통일된 정치체의 출현을 막기 위해 수시로
흥료국, 후발해, 정안국, 그리고 완안부를 공격하였다.
그때 흥료국과 후발해는 곧 멸망하였고 정안국은 열만화에 의해 간신히
버티고 있었으나 완안부에서는 강력한 영가라는 정치지도자의 출현으로
강성한 부족군장국가로 성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독자적 세력화를
하기에는 그 힘이 약했기에 거란과 고려에 조공을 하기도 하고 전쟁을
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고려 조정에서는 더 이상 백두산 동북지방의 강력한
부족군장국가를 좌시할 수 없어 고려군을 보내 전쟁을 하였으나 완안부의
기마병에 의해 전투의 전과가 지지부진했다. 그래서 고려의 낭가사상
(郎家思想)의 거두인 윤관의 건의를 받아들여 별무반(別武班)을 편성하였다.
20만 대병의 윤관의 별무반의 완안부 침공은 완안부에게 있어서 견디기
어려운 고려의 토벌전이었다. 즉 한반도 화랑과 만주 백두산 화랑들의 대결
이었다. 그 결과 윤관은 동북에 9성을 쌓았으나 백두산 화산폭발의 피해에서
벗어난 만주의 힘이 영가의 군사적 모집 사발통문으로 결집되자 윤관의
별무반도 고려조정자체도 오랜 전쟁을 견디기 어려웠다.
때마침 오랜 전쟁에 피로함을 느낀 고려의 왕과 조정대신 그리고 고려의
백성이 주전파와 주화파로 갈려 국론이 분열되고 고려왕의 정치마저 사치와
문란함 그리고 방만함으로 빠지자 윤관의 별무반 군대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다.
그에 따라 고려와 완안부는 전쟁협상을 통해 고려는 동북 9성을 완안부에 돌려
주었고 완안부는 고려에 대한 남하를 멈추었다.
하지만 완안부의 피해 또한 막대한 것이었다. 이 전쟁 이후 영가가 죽고
완안부자체가 분열의 위기에 놓였으나 영가의 뒤를 이은 우야소에 의해 다시
완안부의 체제를 정비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정안국이 거란의 침공으로 멸망하였다.
이에 따라 완안부는 거란과 직접 국경을 마주하게 되었고 완안부는 불가피하게
거란과의 전쟁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글쓴이 : 석가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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