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 생각이지만.. 비난간사람들은 대부분일거고 다른 지역으로.. 피난 못간 사람들은 노예로 잡혀서 노역을했거나 죽임을 당했을거 같습니다. 일반적으로 세수를 바치고 그러지는 않았을듯. 그리고 걔들이 성을 축조하고 거기서 살았지 부산전지역을 점령하고 지배했던게 아닙니다. 님말씀되면 된다면 그건 한반도내 또다른 일본정부 즉 국가가 탄생한거죠. 지배계층은 일본이고 피지배계층은 조선인이고 조선인의 생활권을 보장하고 그들에게서 세금을받고 그런일은 국가의 모습이죠. 역사적으로 왜구의 전형적인 형태는 약탈하고 도망치는거지 지배하는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아마도 그런걸로 유추하면 부산에 있던 조선인들은 전쟁때 피난을 많이 갔을거고 남은 사람들은 노예로 쓰이거나 일본본국으로 압송되어 노예살이를 했을거라고 봅니다. 임진왜란때 끌려간 조선인수가 몇십만명이라잔아요. 그 인구가 어디서 나왔을까요. 다 전쟁 포로이자 자신들이 있던 지역 주민들 잡아서 보낸거겠죠.
토요토미가 각 지방 영주들을 조선으로 보내면서 임의로 약속을 하죠. 전후 어느지역으로 어느영주에게 할당한다.... 등등. 그걸로 영주들의 반발을 잠재우고 전쟁참여의지를 고추시켰죠. 근데 전쟁이 장기화되고 고착화되자 왜군들은 전리품 챙기기에 혈안이 됩니다. 어차피 진격은 힘들고 그동안 싸우면서 자기네 많은 군사를 잃었고 이대로 본국으로 돌아가면 농사지을 병사들과 놈민들이 부족하게 됩니다. 그러자 닥치는대로 노예를 잡아들여 본국으로 압송하게 이르르죠. 그리고 일할 능력이 안되는 노인과 아이들은 죽여서 코와 귀를 잘라 조선군을 죽인 것처럼 숫자를 채우기도하죠. 본국으로 가면 그 숫자가 자신들의 업적이 되니까요. 부산지역은 전조선지역에서 잡아들인 조선인과 예술품 곡식 등을 일본으로 가져가는 창구였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7년동안 많은 인명피해를 남겼기에 농사지을 사람이 부족했지 땅이 부족했던게 아니었습니다. 경남이남지역은 농사를 주로 하는 곡창지대도 아니었구요. 왜군이 곡식이 필요했다면 그냥 사람 잡아다가 본국으로 보내 본국에서 농사지을 노예로 쓰면 그게 더 현명한 일이었겠죠. 굳이 언제 빼앗길지도 모를 부산이남지역에 자치권을 주고 농사를 장려해서 세를 받고 그런일을 할리가...
임난 초기에 송상현이 항전했던 전투에서 일반 백성들도 많이 학살한 걸로 압니다. 그리고 2차 진주성 전투에서는 진주성의 개돼지까지 싹 다 학살했다고 나오지요.
다만 전반적인 조선 백성들은 학살과 통치를 당하는 두 가지 경우였습니다. 일단 조선 통치에서 가토와 히데요시(이시다미쓰나리) 간의 편지에 의하면, 기본적으로 조선 백성들에게 손을 대지 말라는 얘기가나옵니다. 그러나 전쟁이 길어지면서 이는 지켜지지 않았고요.
또한, 전공을 위해 많은 학살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귀무덤, 코무덤의 예에서 보듯이 많은 위해는 있었을 것이 확실하죠. 전공을 위해 조선 백성들을 위해하는 건 명나라도 마찬가지 였고요.
7년 전쟁동안 어마어마한 조선 백성들이 죽었는데, 전투에서 죽은 병력보다 일반적인 학살이 많았을 겁니다.
어디에서 듣기로는, 임진왜란 당시에는 저항이 심하였던 일부 성과 지역에서 학살이 몇 차례 대규모로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학살이 흔한 분위기는 아니었다고 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후 정유재란에는 이런저런 이유때문인지 왜군의 만행이 심해지고 학살도 빈번하게 벌여지는 지옥도가 곧장 펼쳐졌다고 한 것 같습니다.
초반 점령때는 학살은 저항지역만.. 물론 그렇다고 민간에 피해나 살인이 없었다는 것은 아님. 약탈할때 재물과 여자를 약탈하는데 저항하면 죽임. 저항하지 않으면 살긴하죠. 어쨋든 살려두면 다 자기들이 가질 한국내 영지의 호구가 될거라서 반항안하면 굳이 죽이지 않았어요.
근데 이후 정유재란즈음엔 한국의 점령을 사실상 포기했기에 나중에 반격할 여력을 없앨 목적으로 되는대로 학살을 펼쳤죠.
대략 3단계 였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1단계 > 선조를 빠르게 잡아 조선을 병합 후 조선인은 농노로 사용한다, 당시 일본전국시대 식이죠.
그러니 일반 백성을 학살해서는 안됩니다. 머리만 잡고, 죽이면 된다고 생각했을테니까요.
2단계 > 전쟁이 길어지고 병참의 보급이 원활하지 않은 상태에서 후방에 살려둔 조선백성들이 의병이라는
이름으로 게릴라전을 벌인다. 몇몇 전투에서 초기와 달리 심각하게 패전하는 경우가 생기고, 조총에
대한 공포가 사라진다 > 포로 학살 및 점령지 백성학살로 공포심과 의병의 싹을 제거하는 방법을 씀
3단계 > 정유재란 이 후, 전쟁의 양상이 장기전이 되고 일부 왜장들이 경상도 지역에 왜성을 축조하고 버티기에
들어간다 > 당연히도 일반 조선백성들은 생산자가 됩니다. 병참만으로는 한계가 있죠. 백성에 대한
학살은 2단계에 비해서는 줄었을 겁니다만, 공포정치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일정수준의 살인은 유지가
되었을 겁니다. 더불어서 일반병의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서도요(이게 정말 최악)
왜란 7년 중 실제 전쟁 기간은 2년이죠. 나머지 5년은 협상하느라 시간 보내고. 1차 때는 그냥 왕만 죽이면 되는 줄 알고 쭉쭉 올라오느라 조선백성들에겐 별 신경도 안썼을 겁니다. 물론 초반 부산 백성들이야 저항도 심했고 학살도 했겠죠.
그러나 1차 원정에 실패하며 남부 해안가에 왜성 쌓고 짱 박힙니다. 그리고 실패 원인 중 하나로 경상도쪽 의병을 들죠. 근데 이 의병이 활성화된 이유 중 하나가 조세를 너무 많이 겉은것도 있다네요. 조선이 10%라면 왜는 본토에서 처럼 50%이상?.
이걸로 봤을때 처음엔 저항하지 않으면 죽이지 않고 경작지 일구고 조세 즉 쌀같은거 겉었겠죠. 그럼에도 경상도가 경작지로 별로고 태워버리고 의병들이 들고 일어나다보니 왜군 사정이 많이 안좋았던 듯 합니다. 의병 중엔 귀화한 왜군도 많았죠. 최소 1만명 이상. 엄청난 숫자죠. 그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이 왜군에서 참모급 장수였고 홍의 장군 밑으로 들어간 사야가 김충선이고 이런 고급인력도 탈영하다 보니 왜군 진영에선 적 침입 방지가 아닌 탈영 방지목적으로도 방책까지 세웁니다.
이렇게 패착이 의병으로 되면서 2차 정유재란 때는 백성들도 많이 죽입니다. 마치 왜정때 독립군 지원한다고 조선인들 죽인것 처럼요. 그러나 식량사정이 너무 안좋다 보니 학살보단 굶주려 죽은 숫자가 대부분이라고.
부산에 살던 사람들은 3명만 남고 다 죽었습니다. 그 3명도 처벌이 두려워서 숨어 살았기 때문에 부산에 남은 사람들은 없었던거죠. 모조리 죽었다보니 부산전투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어서 당시 조정은 정발이 왜군에 항복한걸로 알고 배신자로 취급하죠. 나중 인조때 3명중 한명이 나타나서 정발의 최후에 대해 증언하면서 다시 공신으로 바뀝니다.
제가 언제 ㅋㅋㅋ 했나요?
반박을 할 이유가 없잖아요?
규모에 대한 인식은 사람마다 다른 겁니다.
상대의 의중을 파악 못하고 내가 이렇게 도발하면 상대가 발끈하겠지 라고 생각하는 모습.
한심합니다. 토의의 기본이 아닙니다. 예절부터 배우세요.
아래 있는 블루투스 님과 착각하신거면 사과하시길 바랍니다.
작죠. 부산의 본래 명칭은 동래입니다. 물론 위에 말했듯 부산진이니 부산이니 하는 명칭이 있긴 하지만 동래의 일부였고 현재 부산이 동래를 포함하니 동래와 부산이란 명칭이 스위칭 한것이라고 봐야 합니다. 거기다 현재의 부산의 위성도시인 김해가 과거엔 더 거대한 지역이었죠. 김해가 고려시대엔 금주라고 칭해졌다고 들었습니다. 당연한 것이 과거의 지방인구는 결국 농업생산력에 좌우됨이 컸을텐데 김해평야를 가진 김해가 더 크지 산악지대인 현재의 부산이 더 큰 곳일수 없는 겁니다.
이런 동래가 유일하게 의미있는게 있다면 왜인들이 있는 왜관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