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리저리 구글링하다가 우연히 어떤 블로그같은데서 일뽕이 하도 황당한 소리해서.... 욱해서 반박했거든요. 그런데 제가 역사전공자도 아니고 이리저리 백과사전하고 검색해서 야매?로 한거라 제대로 반박이 된건지 모르겠네요.;;
1.가야가 철과 철기 생산지였기에 일본에서 철이 언제 생산됐든 상관없음
가야를 당시 왜가 거점으로 삼았다는게 임나일본부설의 핵심임
울나라에서 반일감정으로 일본서기가 평가절하 되는감이 없지 않음
물론 연대의 오류나 일부 내용이 상식적으로 과장됐음은 인정
하지만 환단고기같은 위서도 아니고 엄연히 정식 사서임
일본서기에 의하면 4세기 이후 왜는 가야를 거점으로 백제와 신라에 대해 우위에 있었음
즉, 왜가 신라 백제 가야에 대해 우위에 있었고 신라만 후기에 갈수록 대립했으며, 삼국통일 후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
-> 나의 반론
왜가 신라,백제,가야에 우위에 있는데 남조에게 조공을 하고 백제보다 낮은 직위를 받음??
백제는 안동대장군으로 왜의 진동대장군보다 두단계 더 상위의 관직 -> 고구려는 이보다 더욱더 높은 정동대장군<국제 정세로 보면 백제는 일본보다 상위 포지션>
일뽕인 니가 들이대는 일본서기에 곳곳에 백제의 학문과 기술,경제력등을 찬양하는 기록도 있으며
일본에 백제궁을 짓고 일본인들이 백제인들과 더불어 백제옷을 입고 축하했다와 같은 내용도 있음
대표적으로 일본서기에 보면 조메이 왜왕 10년에 백제천 옆에 백제궁과 백제대사를 짓고
13년 10월엔 백제궁에서 죽어서, 북쪽 빈궁을 설치했는데 이를 백제대빈이라고 했다는 기록이 있음
일뽕의 단편적인 해석을 근거로 들이대면 고대 일본은 백제의 속국이라는 증거 자료가 될수 있음
상식적으로 일본이 상국인데 어떻게 그나라 실권자의 거처인 궁궐에 백제를 붙였을까??
오히려 백제에서 왜궁이라고 짓고, 왜풍 옷을 입어야 하지 않았을까?
2.중국 남조의 송서에 따르면 송나라 황제로부터
도독,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6국 제군사 안동대장군 왜왕의 칭호를
받았다라고 기록이 되어있음
-> 나의 반론
일본이 요청했고 중국남조가 수용한 관직명인 "사지절도독 왜, 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 6국제군사"라는 관직에서 진한과 모한이 나오는데, 모한은 마한의 후손, 진한은 당시에 이미 없어진 나라
시기상 맞지 않는 국가의 이름이 나온것으로 보아 허울뿐인 작위
일본서기에 따르면 임나=가야? 그런데 왜 관직명에는 임나와 가야가 서로 다른 나라로 나옴???
3.전방후원분중 니토쿠덴노릉은 축구장 20배 크기로 세계적으로 큰 왕릉( 피라미드보다 면적이 더 큼)
이 정도의 규모라면 결코 작고 약한나라라고 할수 없음
-> 나의 반론
전방후원분은 일본 역사학계가 초창기 주장했던 근거
<주구묘-> 전방후원분 -> 남한 지방에 전파 = 임나일본부설> 이라는 연결고리
그런데 1996년 이후 마한 지방인 전라남도 영광, 충남 보령에서 일본보다 최소 1세기 이상 앞선 시대의 주구묘가 대량으로 발견 더욱이 전라도에서 기원전 3세기경의 대형 주구묘들이 발굴
또한 왕릉이 크다고 강대국이라는 근거는 터무니없음
4.광개통왕릉비 신묘년 기사
신묘년에 왜가 바다를 건너서 백제와 ()()와 신라를 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
또한 백제가 왜와 화통을 하였으며, 왜인이 신라의 국경에 차서 성지를 부수고 있다
고구려군 5만이 신라에 가서 왜적을 쫓아내고 임나가라 종발성까지 추격하여 귀복시키고 몇몇 성을 더 함락시킨 후 순라병을 두어 지키게 했다. 이말은 왜가 신라수도인 경주까지 위협해서 신라가 고구려한테 부탁할정도로 왜는 허접한 존재가 아니였고 군사강국이였음
-> 나의반론
광개토대왕릉비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쟁이 있지만
해석에 따라서 백제와 신라 일찍이 속민으로 조공을 하여 왔으나. 왜는 속민이 아니고 따라서 조공을 바치지 아니하였는데. 고구려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 왜를 격파하여, 그 때부터(신묘년 아래로) 백제와 왜, 신라가 모두 신민이 되었다. 명확한 정설은 없지만 오히려 고구려가 왜를 신민으로 삼았다는 근거도 될수 있음
그리고 상식적으로 고구려와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찬양하는 왕릉비에 왜 뜬금없이 일본 왜구를 찬양하겠음?
또한 신묘년이라면 임나일본부설에 모순점인 부분이 생김 .... 임나 지역이 오래전부터 왜의 지배를 받았다면, 신묘년에 임나를 백제및 신라와 나란히 신민으로 삼았다라는 기록이 과연 시간 순서상 맞는걸까? 라는 모순점 발생함
더욱이 일본서기 본문에 가야를 정벌해 임나일본부를 세운 세력은 철저하게 백제의 장군 목라근자와 백제의 군사들로 기록됨
임나일본부를 통제했다면 무엇을 임나에 요구할 경우 그쪽에 직접 명령하면 될건데
뭐가 아쉬워서 죄다 백제왕한테 먼저 요구해서 간접적으로 얻어냄? 왜 직접 요구를 전혀 못함??
더욱이 왜는 고구려의 팽창에 밀려난 백제유민들이 본격적으로 이주하던 5~6세기즈음에 철을 생산했음
또 이시기 말도 들여왔고, 당시 군사력으로 직결되는 철도 생산을 못해서 철을 수입하고 몸으로 용병 대준 나라가 어떻게 백제,신라,가야등을 점령하고 지배함;
5.전지왕이 태자이던 시절, 왜에 인질로 갔었던 건 맞지 않음?
인질을 볼모로 군사력을 요구했었음?
- 이부분은 제가 아는게 없어서 반박을 못한것 같네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