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에서 기고한 바와 같이 명백히 금나라는 우리의 북방민족역사에 속한다. 그런데 우리는 중국인들의 세뇌와 일제의 간악한 식민사관으로 금나라가 우리와 전혀 다른 이 민족이 세운 나라로 보고있다. 금나라의 건국시조는 신라인 김함보의 6대 손이라고 금사에 적혀있고 건국세력은 모두 발해의 독립운동세력 즉 발해의 지배세력이었다.
금사에도 나오듯이 금의 황제들이 모두 신라김씨이고 황후들은 모두 발해왕족 대씨이며 금의 주요 정치 세력을 형성하였다. 윤관의 고려의 북방 만주지역 영토 개척이 급속히 진척된 이유 역시 발해인들이 협조했기 때문이다.
고려사 윤관 전에 보더라도 여진인은 옛 고구려 백성들이다라고 나오고 있다. 중국인들의 사서에 등장하는 미개한 말갈인들은 결코 현 중국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대금국을 건설할 수가 없다. 금나라는 당시 지구상에서 가장 전투력이 강한 요나라를 멸망시키고 중국 지역까지 진출 송나라를 양자강 이남 조그만 구석으로 몰아내고 대부분의 중국영토를 차지하였다. 한번도 국가 통치 능력이 없는 민족이, 특히 미개 민족이라고 불리워진 말갈인이 국가라는 관료 조직을 형성하고 통치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 배달민족의 부흥을 두려워한 중국사관들의 의도적인 역사왜곡인 것이다. 금의 건국에는 국가 통치 경험이 있던 발해인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 증거로 금나라의 통치 기간 동안 발해 유민의 광복활동이 전무하다는 것이다.
요나라 시절 끊임없이 반요의 독립 투쟁을 주도하던 발해인들이 금이 건국한 후 더 이상 광복 운동이 일어나지 않는다. 시대상으로 금의 건국이 발해 멸망 후 200여년이 지났지만, 당시 요동에서는 고조선과 고구려 그리고 발해의 계승권을 주장하는 대발해국이 건국하여 요나라와 전쟁을 하고 있었다.
이런 발해인들이 금나라 건국 후 반금 운동이 전무했던 이유는 바로 금나라가 우리와 다른 민족이 세운 국가가 아닌, 발해를 계승한 같은 민족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오늘날 발굴되는 발해와 금나라의 주거문화 형태를 보면 우리와 똑같다. 금나라 시대에 들어와서 온돌이 보편화되었다.
민속학 주거문화 연구자인 한규철 교수님은 주거의 보수성이 각 민족의 전통성을 보여준다고 하였다. 온돌은 우리 민족의 고유한 주거 문화 형태이다. 그런데 금나라 사람들이 온돌을 썼다는 것은 곧, 우리 민족과 같은 민족이라는 이야기이다.
고구려 계승 국가는 발해이며, 발해를 계승한 국가는 금인데 어떻게 발해사만 한국사에 포함되고, 금사는 중국사가 되었는지 깊이 생각해야 한다. 역사를 잃어버린 민족은 갱생할 수 없다. 금사의 민족사 복원은 바로 우리민족의 잃어버린 정신의 한 부분을 되찾고 과거 조상들의 원한을 풀어주는 해원(解寃)의 의미를 갖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