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기스칸 치세의 바투와 수부타이가 지휘하던 몽골군 병력이 대략 2만 내외정도이니......
강화도와 도서지역을 제외한 고려의 육지지역은 어느정도 초토화 되었을 듯 합니다.
실제 역사에서는 칭기스칸 치세 당시 몽골과 고려가 직접적으로 충돌한 적은 없습니다.
다만 거란족 유민들이 고려를 침범했을때, 고려가 이를 완전히 제압하지 못하고, 몽골장수 합진찰나의
1만군대의 도움으로 거란족을 완전 소탕한 일은 있습니다.
당시 몽골군의 주력은 금나라를 어느정도 제압한 후, 서방의 호라즘원정에 대부분이 동원되었기 때문에
고려에 온 몽골군은 호라즘에 친정한 칭기스칸을 대리하여 금나라지역을 관장하던 무칼리 휘하의 일부병력이었습니다.
이후 오고타이칸 시기부터 몽골과 고려는 적대관계에 접어들게 되는데, 30년 가까운 기간에 1~6차까지
침범해온 몽골군 병력규모는 1회당 대략 3만 정도 규모였습니다.
계속된 몽골의 침입으로 고려가 그로기상태에 빠졌던 5~6차 침입 당시에는 몽골군 규모가 불과 5천 정도임에도 불구하고 20만의 포로와 그 이상의 전상자가 발생할 정도였으니.....
5~6차 침입시기정도 되면 이미 고려내부에서 고려를 이탈해 몽골군에 귀부하는 세력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몽골군이 제 아무리 신출귀몰하다고 하더라도 고려인들의 협력없이 불과 5천병력으로 20만 포로를 잡아
끌고 간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내가볼땐 일본은 고대에도 강국이었고 백제 신라는 일본에 왕자를 인질로 바치면서 저자세로 대했다 일본은 고대에도 중국과 대등하다는 의식을 갖춘나라였다 그런나라가 무슨 백제의 번국 ㅋㅋ 말같지도않은 판타지지 수양제에 그런 국서를 보낸자체가 이미 중국과 대등하다는 의식을 가진 강력한 국가였다는 뜻이다.'
님의 주장이였죠. 인질을 보냈다는 것 자체가 저자세 즉 속국이라는 말이라고도 주장하셨는데? 임나일본부설과 동일한 주장입니다. ㅉㅉ
파이터본능 16-04-12 16:57 답변
고려현종때의 강감찬장군 양규장군 강민첨장군등 기강이 바로선 고려전성기라해도 몽골군에게 발렸을겁니다.
----------------------------------------------
이 못배운놈이 말하는 수준이 항상 이런거임 ㅋㅋㅋ
주장의 근거? 그딴거 필요없음 ㅋㅋㅋ
이렇게 근거 없는 망상 글 싸지르고 상대가 지칠때까지 똑같은 말만 반복함 ㅋㅋㅋ
사람을 이상하게 몰아가네 비겁한 인간들이 ㅋㅋ 정말 이상한 사람들이군 한국측 사서에 백제 신라가 왜에 왕자 태자를 인질로 보냈다고 되어있는데 왜가 백제의 속국 번국이라고 하질않나 속국 번국에 어떻게 왕자 태자를 인질로 보내겠는가 속국일리가 없다고 말했다고 사람 이상하게 만들어버리네 한국사람들이 정말 편협하다는 뜻이겠지
당연히 황위계승 경쟁중이던 황자 쿠빌라이에 줄을 잘선것이 생존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죠 스코티쉬님 뭘 좀 알고 말씀하세요 북한의 최룡해가 후계자경쟁중이던 김정일의 줄에서서 지지해서 나중에 초고속으로 탄탄대로를 걸었는데 역사를 정말 모르시는분같아요 할줄아는건 상대방 인신공격만 할줄아시나보죠?
신기하네요. 대단한 강국 일본이 그런 쩌리의 속국이였을줄은....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제대로 된 교류가 끊긴 통일신라와 일본.
『삼국사기』를 보면, 일본은 통일 신라의 실정을 파악하기 위해 서기 698년, 사신을 파견한다.
효소왕(孝昭王) 7년,
3월에 일본국 사신이 이르렀으므로, 왕이 숭례전(崇禮殿)에 불러 접견하였다. (三月, 日本國使至, 王引見於崇禮殿.)
- 방문 이후, 통일신라의 선진문화와 발전상에 경악한 일본은 이를 배우기 위하여 서기 703년 대규모 사절단 파견을 결심-실행에 옮기는데...
성덕왕(聖德王) 2년,
일본국 사신이 이르렀는데, 모두 204명이었다. (日本國使至, 摠二百四人)
- 그러나… 통일신라의 수준을 견신라사(遣新羅使) 파견만으로 따라잡기에는 너무나 선진적임을 깨달은 일본. 결국 서기 731년 신라 침공을 통해 강제로 뺏으려고 하는데...
성덕왕(聖德王) 30년,
일본국 병선 300척이 바다를 건너 우리의 동쪽 변경을 습격하였는데, 왕이 장수를 시켜 군사를 내어 이를 크게 깨뜨렸다. (日本國兵船三百?, 越海襲我東邊, 王命將出兵, 大破之.)
- 제대로 상륙도 하지 못하고 박살난 일본, 결국 용서를 빌기 위해 서기 742년에 사신을 파견하지만‥
경덕왕(景德王) 원년,
겨울 10월에 일본국(日本國) 사신이 이르렀으나 받아 들이지 않았다. (元年冬十月, 日本國使至, 不納. )
- 완전히 무시당한 일본, 그러나 자존심은 있어서 허세를 부리면서 다시 사과하려고 하지만..
경덕왕(景德王) 12년,
가을 8월에 일본국 사신이 이르렀는데, 오만하고 예의가 없었으므로 왕이 그들을 접견하지 않자 마침내 돌아갔다. (十二年秋八月, 日本國使至, 慢而無禮, 王不見之, 乃廻.)
- 재차 무시당한 불쌍한 일본. 결국 서기 804년, 통일신라의 속국이 되기로 결심, 조공을 바친다.
애장왕(哀莊王)
5년 여름 5월에 일본국이 사신을 보내와 황금 300량을 바쳤다. (五年夏五月, 日本國遣使, 進黃金三百兩.)
- 이를 기특하게 여긴 통일신라는 드디어 일본을 용서하고 속국으로서 인정한다. 서기 806년 속국에게 하교하는 신라.
애장왕(哀莊王) 7년,
봄 3월에 일본국 사신이 왔으므로 조원전(朝元殿)에 불러 접견하였다. 교서를 내려 말하였다. 『절을 새로 짓는 것을 금하되, 다만 수리하는 것은 허락한다. 또 수놓은 비단을 불교 행사에 사용하는 것과 금과 은으로 만든 그릇의 사용을 금한다. 마땅히 담당 관청으로 하여금 이를 널리 알려 시행하도록 하라.』(七年春三月, 日本國使至, 引見朝元殿. 下敎禁新創佛寺, 唯許修葺. 又禁以錦繡爲佛事, 金銀爲器用, 宜令所司, 普告施行.)
- 사찰을 수리하는 것조차 '종주국' 신라의 허락이 없으면 감히 하지 못했던 일본. 이후 '속국' 일본에 대한 종주국 신라의 사랑은 계속되고… 신라의 어버이와 같은 사랑에 감동한 일본은 서기 882년, 보답한다.
헌강왕(憲康王) 8년,
여름 4월에 일본국 왕이 사신을 보내 황금 300량과 야광주[明珠] 10개를 바쳤다. (八年夏四月, 日本國王遣使, 進黃金三百兩·明珠一十箇.)
- 이후 한반도의 정세는 후삼국 시대로 접어들어, 통일신라가 무너지고 왕건의 고려가 건국된다. 애석하게도 고려와 일본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는 자료는 대단히 적어서, 제 3자의 자료에 의존하는 수 밖에 없다. 이를 확인할 수 있는 중국측의 자료를 보자.
倭國乃日本國也. 本名倭旣恥其名. 又自以在極東因號日本也. 今則臣屬高麗也 - 郭若虛.『圖畵見聞志』 卷6. 高麗國
왜국은 일본국이다. 倭라는 원래 이름을 부끄러워했는데, 극동에 있다고 해서 스스로가 일본이라고 부른다. 고려의 속국이다.
네네 친일매국 + 한국 개신교의 콜라보 님아
고려가 뒤를 방해하지 않을 정도 선이었으면 그 병력도 필요없이 조약으로도 충분히 가능했을겁니다 그런데 구지 쳐들어와서 농성한건 설명이 안되는데요??
본인의 근거가 설득력이 부족하다라는걸 인지를 못하는건지 인정을 못하는건지 ㅋㅋㅋㅋㅋ
정말 상식적으로 생각해봅니다. 일정 병력이 고려에서 머물면서 강화도에서 대치상황이 벌어졌을때 고려 본토를 맘대로 유린하고 다녔다? 이건 정말 생각없는 짓인데요? 남송정벌이 성공해서 망정이지 실패했다면 아마도 남송과 고려의 역풍을 그대로 맞아야할 상항인데 이걸 자초했다고 하면 아무 생각이 없는건데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예 이해를 못하시네 ㅋㅋㅋㅋㅋ 아예 고려에 보낼 병력도 아끼면서 조약으로 잘 마무리 할수있는일인데 구지 군을 파견했다??? 이거 이상하지 않으신가요??
힘을 쓸필요조차 없었는데 군을 왜 파견한건가요??
성종 1년 경인(1470, 성화 6)
일본 국왕이 보낸 입도 등이 와서 서계와 토산물을 바치다
일본 국왕(日本國王) 회수납정소(懷守納政所) 이세수(伊勢守) 정친(政親)이 보낸 입도(入道) 등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그 서계(書契)에 이르기를,
“정친은 삼가 글을 조선국 의정부(議政府) 합하(閤下)에게 바칩니다. 공손히 바라건대 나라가 크게 평안해서 금상 황제(今上皇帝)의 어위(御位)가 오래도록 가소서! 폐하(陛下)께서는 공손히 덕(德)이 건곤(乾坤)과 일치하여 당우(唐虞)의 어질고 장수하는 지역(地域)을 보전하고, 현성(賢聖)을 신하로 모아서 이주(伊周)의 순수하고 소박한 기풍을 회복하도록 원하며, 성의를 다하여 축복합니다. 그런데 부상(扶桑) 전하의 높은 명령에 응하여 같은 날에 서계를 봉하여 조선(朝鮮)과 유구(琉球)의 두 나라에 사선(使船)을 보냅니다. 이는 나의 개인적인 의사가 아니니, 이와 같은 간절한 뜻을 폐하에게 주달(奏達)하여서 허락하여 주시면 오직 다행으로 생각하겠습니다.
귀국의 남은 힘을 입고자 하는데, 바라는 물건은 면주(綿紬) 3천 필, 면포(綿布) 5천 필, 백저포(白苧布) 1천 필, 쌀 5천 석이니, 자비로 살피소서. 오직 우리 나라의 태평을 거두고 더 나아가 번신(藩臣)으로서의 충성된 공훈을 세우기를 빕니다. 보잘것 없는 토산물을 별폭(別幅)에 갖추었습니다. 바야흐로 새 눈이 온 산을 뒤덮었으니 풍년이 들 길조(吉兆)입니다. 이만 그칩니다. 별폭은, 금(金) 2원(員) 21냥쭝[兩], 주(朱) 4포(包) 40냥쭝, 대도(大刀) 15파(把), 단자(段子) 1필, 수자(?子) 1필, 부채[扇子] 50본(本)입니다. 받아주시면 다행하겠습니다.”
뭔소리십니까 한국역사서에(삼국사기) 백제 신라가 왜에 왕자 태자를 인질로 보냈다고 기록하고있는데 왜가 백제의 속국 번국이나 다름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억지를 부리고있는거죠 상식적으로 속국 번국취급하는 쩌리나라에 왕자 태자를 인질로 왜 보냅니까? 나는 그걸 지적하면서 왜가 속국 번국일리가 없다고 주장한겁니다.
파이터본능/
다른 사람이 무슨 말을 하면서 근거를 대면 그게 왜 그런가 생각해 보는 척이라도 하면서 대화를 하세요.
아주 친절하게 많이도 써 주셨네요. 이해 하기도 쉽게.
다른 사람들은 모두 파이터본능님이 말하는 걸 이해하면서 그에 대한 반박을 하는데
님은 다른 사람들의 글을 전혀 이해 못한 채 자기말만 계속 반복하고 있어요.
이런 사람이 실제로 내 옆에 있다고 가정하면 정말 싸대기 한 대 쳐주고 싶을 거에요. 정신차리라고.
근거(사료)의 비중, 근거의 적용은.. 근거의 앞 뒤 연관성, 역사 흐름의 연계성, 일반적 특수적 상황의 이해, 당시 정황을 통한 역사적 감정이입, 사료의 검증 등등 이런 걸 모두 종합해서 어떤 역사적 결론(사실)이란 걸 내는 거에요. 표면적으로 드러난 몇글자로 결론(사실) 내는게 아니고.
정말 완고하다 완고해 상식이 안통한다. 한국측 사서에 백제와 신라가 왜에 왕자 태자를 인질로 보냈다고 하고있는데 왜가 백제의 번국 속국이라 하고있으니 속국 번국취급하는 쩌리국가에 다음보위를 이을 태자를 인질로 왜 보내나? 상식적인 의문을 통해 왜가 백제의 번국 속국일리가 없다고 한것을 이상하게 몰아가네 눈닫고 귀닫는게 누구인데
정말 완고한건 파이터본능님이죠. 님의 주장이 왜 틀렸는지를 설명한 댓글들이 널려 있으니까 좀 읽어보는척이라도 하세요.
근거(사료)의 비중, 근거의 적용은.. 근거의 앞 뒤 연관성, 역사 흐름의 연계성, 일반적 특수적 상황의 이해, 당시 정황을 통한 역사적 감정이입, 사료의 검증 등등 이런 걸 모두 종합해서 어떤 역사적 결론(사실)이란 걸 내는 거에요. 표면적으로 드러난 몇글자로 결론(사실) 내는게 아니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파이터본능님이 말하는 걸 이해하면서 그에 대한 반박을 하는데
님은 다른 사람들의 글을 전혀 이해 못한 채 자기말만 계속 반복하고 있어요.
이런 사람이 실제로 내 옆에 있다고 가정하면 정말 싸대기 한 대 쳐주고 싶을 거에요. 정신차리라고.
근거(사료)의 비중, 근거의 적용은.. 근거의 앞 뒤 연관적 사실, 역사 흐름의 연계성, 일반적 특수적 상황의 이해, 당시 정황을 통한 역사적 감정이입, 사료의 검증(사료가 진짜인가 가짜인가) 등등 이런 걸 모두 종합해서 어떤 역사적 결론(사실)이란 걸 내는 거에요. 표면적으로 드러난 몇글자로 결론(사실) 내는게 아니고.
왜 그런지는 다른 분들이 수없이 댓글로 달아 주셨고..
왜 그런지는 다른 분들이 수없이 댓글로 달아 주셨고..
왜 그런지는 다른 분들이 수없이 댓글로 달아 주셨고..
왜 그런지는 다른 분들이 수없이 댓글로 달아 주셨고..
왜 그런지는 다른 분들이 수없이 댓글로 달아 주셨고..
왜 그런지는 다른 분들이 수없이 댓글로 달아 주셨고..
왜 그런지는 다른 분들이 수없이 댓글로 달아 주셨고..
말이 안통하네 인질로 보낸다는 자체가 왜가 무시할수없는 세력이었다는 반증인데 의문자체를 할줄 모르네 역사에서 강한쪽이 약한쪽에 다음보위를 이을 태자를 인질로 보낸경우는 없었고 있을수도 없는일 이 간단한 상식을 바탕으로 기본적인 의문도 가지질 못하고 귀막고 눈막고 있구나 할수없지뭐
고려와 몽골은 화친을 한거지 고려가 몽골에 항복을 했다고요. 그럼 고려왕실도 없어지는 것 입니다.
6.25 때 북한이 남한을 침공했습니다. 그리고 이 시도는 실패 했고요. 그럼 한국이 북한을 물리친것 이기에 625는 한국이 승리 한 것 입니다. 그리고 한국과 북한이 지금 휴전하고 있고 때로는 서로 왕래하고 거래하고 있는데 그럼 한국이 북한에게 항복 한 것 입니까?
베트남 전쟁을 볼까요? 베트남은 통일을 했으니 베트남은 승리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베트남과 미국은 어느정도 교류를 하고 수교를 맺었나? 그건 잘 모르겠지만 상당한 수준의 교류는 합니다. 그럼 베트남은 미국에 항복 한 것 입니까?
그래서 몽골은 고려와의 화친을 위한 전쟁이라 하는 것 입니다. 이건 상당히 몽골을 편들어서 하는 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누구의 주장처럼 고려를 정복하기 위해 한 전쟁이라면 몽골이 진 전쟁이지요. 이게 어떻게 정신승리 입니까? 그래서 고려가 망해서 몽골에게 점령당했나요? 상당한 피해를 입었지만 건재 했습니다.
왜 그렇게 한국역사를 폄하하려고 합니까? 상식선에서 몽골은 고려와의 전쟁에서 진 것 입니다 만일 몽골이 고려를 정복하려 했다 하면요. 그렇지 않고 입조나 화친이라면 성공한것 이고요. 그런데 몽골이 고려말고 화친한 예가 있습니까? 그렇다고 몽골의 본거지에서 멀기라도 이해 하건만... 바로 코 앞입니다. 빈집털이의 공포가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아시나요?
마이미키님께서 위에서 사례를 들어주셨지만, 임진왜란과는 다르게 대몽전쟁 말기에 이르면, 고려 왕실이 강화도에 틀어박혀 국토에 대한 지배력 상실, 민심이반 현상이 보이므로 고려 왕실로서는 화친을 맺을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더 이상 전쟁을 지속할수도 의미도 없는 상황에서의 화친)
예로 들어주신 한국전쟁이나 베트남 전쟁은 대몽전쟁과는 성격이 다르지 않을까요? 오히려 그것들은 임진왜란과 성격이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본국이 심각한 피해를 입었어도 전후 나라의 자주성을 잃지 않고 전쟁 상대국의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로왔지만 대몽전쟁은 전후 결과가 다르지요.
물론 고려가 몽골로부터 부마국의 지위를 얻고 여타 다른 나라들과는 다른 대접을 받았으나, 몽골에 의한 고려 왕위 교체, 원치 않던 일본 원정, 경제적 수탈등등을 고려한다면 몽골이 패했거나 고려가 이긴 전쟁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저 아랫나라의 무조건 항복과와는 차이가 있고, 고려도 받은 부분이 있습니다만).
한국전이나 베트남전 이후에 한국이 북한의 영향력안에, 베트남이 미국의 영향력안에 들어가진 않았으므로 대몽전과는 성격이 아예 다르지 않나 합니다.
대몽전에서 승패를 떠나 고려인들의 끈질긴 항쟁에 대한 자부심, 지배층의 이기적이고 비겁한 행위에 대한 반성...
이 두가지 모두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나 합니다.
여기가 전쟁터네 ㅋㅋ
뻘글이지만 역사의 묘미는 IF아니겠습니까?
제 생각에는 15만 이상의 정벌군이 들어온다면 1차침공에 항복했을 것 같네요.
그리고 그 정도 정벌군이면 아예 속주화 시켰을 것 같습니다.
실제 역사에 몽골이 입조를 계속 요구한 이유도 당시의 정벌군의 규모로는 고려를 정벌할 수 없다는 걸
인식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수차례 침공이 몽골의 후방 안정을 위한 침공일 수도 있으나 그노스님의
의견대로 정규군은 강화에 틀어박혀서 뻘짓 하고 있을동안 가족과 고장을 지키기 위한 민중들의 끈질긴 항쟁에 큰 의미를 두고 싶네요.
몽골군이 엄청난 강군인 것은 맞지만,
실제 전사와 전과를 보면 공성전에서 그렇게 뛰어난 성과를 보이진 못했습니다.
물론 그 부족한 부분을 대포를 포함한 화약무기를 적극적으로 도입하는 모습으로 일부 보완하기는 했지만,
생각보다는 공성 성공율이 낮고,
적대적인 방어를 펼친 성에 대한 잔혹한 행위로 인해서 자진해서 방어를 포기한 경우가 훨씬 많았습니다.
고려가 고구려의 산성기술과 방성 전략을 제대로 이어받았다는 전제(이전 거란과의 전투로 예상)한다면
결국 누가 오래 버티냐는 싸움이겠지요.
몽골군이 보급 문제를 자체로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있지만,
그것이 장기 보급을 해결해주지는 않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