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을 세시대로 구분할때 단군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으로 나눕니다. 이중 기자조선은 현재 대한민국(북한포함)에서 인정되고 있지 않습니다. 이유는 기자가 조선으로 왔다는 기록이 전에는 전혀 없다가 한나라이후 등장해서 점차 정교해지는 형태를 보이기 때문입니다. 한나라 이전의 기록으로는 기자가 주나라의 지배를 거부하고 은둔했다고 나와있을 뿐입니다. 고고학적 유물도 발견된 적이 없고..
고려이후 유학자들이 기자를 특별히 숭상하게 되는데, 이건 우리는 중국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은 나라라는 소중화주의를 위해서라고 보여집니다.
기자동래설이 왜 후대의 창작설일 가능성이 높냐는 윗분들의 설명에 약간 첨언을 하자면, 기자동래설을 최초로 언급한 기록이 상서대전과 사기인데.. 이 시기 한 무제가 고조선을 멸망시키면서, 한나라로서는 조선을 복속해야 하는 정당성, 명분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과거의 인물인 은 시대의 기자를 끄집어내어, 기자가 조선을 다스렸다고 주장합니다. 즉, 원래 중국인이 가서 세운 나라니까, 한나라가 다시 복속시킨것 뿐이라는 주장을 하고 싶었던 것이죠. 그러면 한나라가 덥석 조선을 점령한 것에 정당한 명분이 서니까요. 둘째는 최초 기자동래설을 지지했던 최치원은 중국 유학파이며, 중국 사상, 문화에 경도된 인물이었는데, 조선을 중국과 엮는데에 하등 거부감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주장을 인용해서 받아들인 후대의 고려 성리학자들, 조선의 유학자들에 의해 계속 이어졌다는 것이죠. 즉, 중국도 고조선을 자신의 지배에 복속시키기 위한 명분으로 주장한 거고, 후대 조선의 유학자들도 그들이 숭상하는 중화권의 역사에 편입되는 것을 오히려 원했기 때문에, 그것이 지지를 받은 것이다.. 이렇게 보는 것이 맞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