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게에서 이관련 이야기가 있어 한 글 올립니다.
정규전투병만 113만 3800명 그기에 따른 보급부대가 2배로 300만에 이르렀
다는 건 학계의 고구려 전문가분이나 저 역시도 이에 실제 무게를 두는 입장
입니다.
왜 그럴까?
우선 어떤분은 애초에 300만이 동원되었으면 300만 대군이라고 기록하지
그것을 누락한채 113만이라고 쓰진 않겠지요라는 이야기를 합니다만 수서
원문의 내용을 정확히 보지 않은 듯 하군요.
<隋書卷四 帝紀第四 煬帝下>
總一百一十三萬三千八百,號二百萬,其餽運者倍之
수서 양제하편에 보면 마지막 구절에서 '기궤운자배지'라는 문구는
이 113만대군 그기에 두배에 이르는 운반 보급부대를 말하는 것임. 즉 이
113만은 따로 보급부대가 섞인 숫자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호이백만
이라고 113만을 과장해서 200만까지 그기에 보급부대의 숫자까지
합쳐 과장해서 400만 과장하지 않고 300만이라고 서두에서부터 못을 박고
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이 숫자가 너무 커니 혹자는 선입견으로 믿지를 않다보니
수나라가 서토를 통일하기전 남조 정벌시의 반쪽짜리 북조 군사력에 대한
이야기를 가져 오면서 나름의 설득력을 가미하는 식의
반론들이 나옵니다.물론 이 내용만을 보면 나름 일리가 없지 않는 주장이긴
합니다.
騎兵四十隊. 隊百人置一纛. 十隊為團,團有偏將一人.
기병은 40대다. 1대는 백명으로 1개의 깃발을 둔다. 10대는 1단으로 삼는데, 단에는 편장 1명이 있다.(4000명)
又步卒八十隊,分為四團. 團有偏將一人.
또 보졸은 80대를 두고 4단으로 나눈다. 단에는 편장 1명이 있다.
물론 이런 편제방식은 2차 고수전쟁에서도 나름 다르지 않습니다.
그기에 보졸 숫자는 앞선 기병에서 1대대를 백명으로 말했기에 생략했다는
식으로 주장을 합니다만 <실제 2차 고수전쟁에서 이런 주장이 설득력을 뒷
바침하기에는 요동성등 요동일대 강력한 고구려 성곽을 제대로 뚫지 못한
수나라가 30만 5천명을 통해 오골성을 지나 바로
평양성으로 진격하게 한 별동대의 실제 병력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점
임.>
우선 사료에서는 보병부대에 대한 정확한 숫자가 나오지 않는 점. 그기에 수
양제가 친정하면서 24군 외의 6군은 글자 그대로 황제를 가장 최일선에서
보호해야하는 부대로 일반적 편제 병력수와 동일하게 볼 수 없는 부분에 실
제 기록상에도 정확한 기록이 없습니다.(즉 보병과 황제측근부대의 정확한
기록은없어 편제 방식과는 별도로 이에 따라 얼마든지 병력의 증감 여지를
보여주는)
그렇기에
왜 30만 5천의 기록에 주목해야 하는가하면 실제 이들은 따로 보급부대가
없는 글자 그대로 평양를 치기 위한 순수 정예전투 별동대 병력이라는게 학
계의 중론입니다.
그렇기에 빠른 진격을 위해 따로 보급부대를 두지 않고 각 병사들에게
100일치의 식량을 주었고 평양일대에서 내호하 수군를 통해 추가 보급지원
을 받을 계획이였음.
그럼 이들을 보면 실제 고수 전쟁 당시의 윗 편제에 따른 1개군의 실제 병력
수를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은 우중문,우문술이 이끈 9개군으로써 총 30만 5천병력을 이끌었고 결
국 1개군당 대략 3만 3800명에 이르렀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이 병력은 실
제 수서 본기에 해당하는 양제편 선두에서 밝힌 전투병력만 113만에
해당하는 병력수에도 상당한 일치를 보입니다.(3만 3800x 30개군 =101만4
천명 여기에 앞서 말한 황제 보호의 측근 6개군은 일반 편제의 병력 동원수
로 동일하게 보지 않으면서 나머지 113만에서의 10만 정도 병력차는 이들
황제쪽에 좀더 붙어 있었을 가능성을 열어 두어 실제 이 계산치에도 편차는
거의 나지 않는다는 점임)
그리고 통일왕조 수나라때의 경제력은 엄청났습니다. 그기에 징병제에
따른 물자 및 인력 동원도 무자비할 정도로 막대했고(이때문에 산둥일대고
자신의 손을 자르고 산으로 들어가거나 요동에 가면 죽는다는니 그 막강한
경제력을 보이든 수나라 왕조는 무리한 고구려원정의 대실패로 왕조가
결국 붕괴되었던게 실제 역사. 이때문에 당나라 초기는 돌궐의 군사력도
제대로 막지 못해서 굴욕적 조공까지 했었음.)
또한, 고대의 병력 차출은 지금같은 20세 이후 단기가 아니라 20세이전부
터 60세 이하까지 웬만한 나이때의 장정들이 병력으로 차출을 했던 시기였
고 굳이 수나라시절뿐 아니라 통일왕조 송나라때도 정규군만 125만에 예비
군 100만을 둘 정도로 수나라 시절 저 병력수가 딱히 환타지 숫자가 아니라
는 점이죠.
그외 당시 통일왕조 수나라는 돌궐 앞에서도 100만명이 갑옷을 입고 도렬해
서 그 군세만으로 그 호전적 전투 북방 유목민족이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깨
깽 지지칠 정도였음(물론 이후 고구려에 망하고 혼란기의 당나라초기에는
돌궐이 이를 틈타 서토에 군사적 우위를 보이기도 함) 특히나 수양제는
과시욕이 강했고 앞선 1차 고수전쟁에서 30만 대군도 고구려에 제대로 싸우
지도 못할 만큼 대패를 했던 선례가 있어 2차 시기는 다른 기록을 봐도 알겠
지만 전혀 저 기록이 과장되지 않게 탁군으로 몰려드는 군사와 물자가 어마
어마할 정도에 상당히 착실하게 보급과 군사준비를 진행했습니다.
(특히나 황제가 직접 나선 전쟁이였기에 더욱)
다시 정리하자면 수서 초기의 정규 전투병력 113만은 단순히 선입견과
이전 남북조시절의 병력수로 동일선상에서 볼 여지보다는 사서에
정확히 기록한 그대로 볼 여지가 앞선 명확한 기록부터 30만 별동대의
병력수등을 봤을때 신뢰가 가능하다는 점을 밝힙니다.(그리고 4개단의 치
중,융거,산병부대를 따로 두었다는 기록도 보이는데 이말은 이들도 딱히 단
순 보급부대들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치웅의 경우는 옷이나 무기류등을 수송하던 부대로 보급성격이 높지만
융거는 수레에 3명이 조를 이루는 선두 전투부대이고 산병 역시도 선두와
측면에서 보조하는 병력들이라는 말이죠. 즉 기마, 보병 빼고는 다 보급부대
원 어쩌고도 정확한 해석이 아님.)
隋書 卷四 帝紀 第四 煬帝 下
總一百一十三萬三千八百, 號二百萬, 其餽運者倍之. 癸未, 第一軍發, 終四十日, 引師乃盡, 旌旗亘千里. 近古出師之盛, 未之有也.
隋書 卷八 志 第三 禮儀 三
大業七年(611), 征遼東, 煬帝遣諸將, 於薊城南桑乾河上, 築社稷二壇, 設方壝, 行宜社禮. 帝齋於臨朔宮 懷荒殿, 預告官及侍從, 各齋于其所. 十二衛士並齋. 帝袞冕玉輅, 備法駕. 禮畢, 御金輅, 服通天冠, 還宮. 又於宮南類上帝, 積柴於燎壇, 設高祖位於東方. 帝服大裘以冕, 乘玉輅, 祭奠玉帛, 並如宜社. 諸軍受胙畢, 帝就位, 觀燎, 乃出. 又於薊城北設壇, 祭馬祖於其上, 亦有燎. 又於其日, 使有司幷祭先牧及馬步, 無鍾鼓之樂.
衆軍將發, 帝御臨朔宮, 親授節度. 每軍, 大將亞將各一人. 騎兵四十隊. 隊百人置一纛. 十隊爲團, 團有偏將一人. 第一團, 皆靑絲連明光甲鐵具裝靑纓拂, 建狻猊旗. 第二團, 絳絲連朱犀甲獸文具裝赤纓拂, 建貔貅旗. 第三團, 白絲連明光甲鐵具裝素纓拂, 建辟邪旗. 第四團, 烏絲連玄犀甲獸文具裝建纓拂, 建纓拂 對照其他各團所用器物的顔色, 第四團用烏絲連玄犀甲, 疑此處 「建纓拂」 當作 「緇纓拂」. 建六駁旗. 前部鼓吹一部, 大鼓小鼓及鼙長鳴中鳴等各十八具, 掆鼓金鉦各二具. 後部鐃吹一部, 鐃二面, 歌簫及笳各四具, 節鼓一面, 吳吹篳篥橫笛各四具, 大角十八具. 又步卒八十隊, 分爲四團. 團有偏將一人. 第一團, 每隊給靑隼盪幡一. 第二團, 每隊黃隼盪幡一. 第三團, 每隊白隼盪幡一. 第四團, 每隊蒼隼盪幡一. 長槊楯弩及甲毦等, 各稱兵數. 受降使者一人, 給二馬軺車一乘, 白獸幡及節各一, 騎吏三人, 車輻白從十二人. 承詔慰撫, 不受大將制. 戰陣則爲監軍.
軍將發, 候大角一通, 步卒第一團出營東門, 東向陣. 第二團出營南門, 南向陣. 第三團出營西門, 西向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