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골산이 금강산인가
그러니 지금 가는 금강산 유람으로는 내금강을 못 볼 뿐만 아니라 마의태자 유적도 볼 수 없다. 비로봉 밑에 있다는 전설의 태자릉(太子陵)도 못 볼 것이다. 아무튼 사람들은 태자릉을 마의태자의 무덤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삼국사기’를 들여다보자.
“왕자는 통곡하며 왕을 사별(辭別)하고 곧 개골산(금강산)으로 들어가 바위에 의지하여 집을 짓고 마의를 입고 초식하다가 일생을 마쳤다.”
‘삼국사기’는 이렇게 마의태자의 최후를 적고 있다. 지금까지 이 기록을 믿고, 마의태자가 비관한 끝에 금강산에 들어가 굶어죽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또 실제로 금강산에 들어간다는 것은 곧 죽으러 가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동국여지승람’은 “금강산은 그 봉우리가 모두 1만2000봉이나 되는데 비로봉이 제일 높다고 하며 골짜기마다 108개나 되는 불사가 산재한다”고 전한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금강산에는 민가가 한 채도 없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이곳에 경작지가 전혀 없어 외부의 식량지원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산은 바위 봉우리가 벽처럼 서 있어 이르는 곳마다 천길 만길이라 몸을 의지할 만한 암자도 움집도 없었으며 채소나 과일을 심어서 먹을 만한 흙 한 줌도 없었으니 여기에 산다는 것은, 구멍에 숨거나 나무 위에 둥지를 짓고 사는 새나 짐승과 같이 거처하지 않는 한 하루도 머무를 수 없을 것이다.”
금강산은 최남선의 말처럼 커다란 바윗 덩어리요, 온갖 기묘한 변화를 나타낸 하나의 화강암 덩어리에 지나지 않은 것이요, 금강 없는 금강산인 것이다.
그러니 이런 산속으로 태자 일행이 들어갔다는 것은 죽으러 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금강산에 가보면 마의태자 유적지가 남아 있다. 이것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먼저 금강산의 이름부터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지금 남아 있는 ‘삼국사기’는 고려시대의 원본이 아니라 조선시대에 중간(重刊)된 것이다. 그래서 개골산에 괄호를 하고 금강산이라 주석을 단 부분은 고려 때 나온 ‘삼국사기’ 원본에 있었다 하더라도, 삼국시대 당시에는 개골산은 물론 금강산이란 이름도 없었다.
즉 마의태자가 갔다고 하는 개골산을 삼국시대에는 상악(霜岳) 또는 설악(雪岳)이라 불렀다. ‘삼국사기’ 권32 제사(祭祀)조에 보면 강원도 고성군의 상악과 역시 강원도 수성군(지금의 간성군)의 설악에서 소사(小祀), 즉 산신제를 지냈다고 기록돼 있다. 개골산이나 금강산이란 지명이 ‘삼국사기’에는 나타나지 않고 상악이라고만 나오는 것이다. ‘삼국유사’도 마찬가지다. 도대체 삼국시대에는 개골산이니 금강산이니 하는 지명조차 없었던 것이다.
개골산과 금강산이란 지명이 기록에 나타나는 것은 ‘고려사’부터다. 그러나 ‘고려사’에는 주로 금강산으로 나오지 개골산은 드물다. 또 금강산은 중앙에서 모반죄 같은 큰 죄를 지은 정치범의 유배지로 등장한다. 고려시대에는 금강산에 유배되면 살아서 돌아오기 어려운 곳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http://www.donga.com/docs/magazine/new_donga/200005/nd200005084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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