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지역에 백마총이 있는데 / 白馬塚在日域
왜인들이 대를 이어 그 무덤을 손질하며 하는 말이 / 倭人世世勤封築
옛날에 신라 왕이 쳐들어 올 때 / 謂昔羅王憤侵軼
수만 명 정병이 바다에 떠 밀려오니 / 精兵數萬浮海伐
물귀신도 뒤로 주춤 해신(海神)도 길을 비켜 / 馮夷淪易海若奔
큰 바다 동쪽에는 거칠 것이 없었다네 / 大海以東無涯藩
용 깃발을 휘날리고 타고를 울리면서 / 揚龍旆擊鼉鼓
선발대가 곧바로 명석포를 공격하니 / 前茅直擣明石浦
왜왕이 겁에 질려 화친을 청하고는 / 倭王失色事和親
짐승 잡아 맹세 쓰고 신명께 고하였네 / 刑牲載書告明神
그 후로는 오랜 기간 바다가 조용했고 / 從此鯨波久不涌
천고의 유적으로 저 무덤이 남았다네 / 千古勝蹟留遺塚
그 옛날 진터가 절영도에도 있는데 / 絶影又有古壘寨
이것이 태종대라고 뒷사람들 말을 하지 / 後人說是太宗臺
총알만한 신라 땅 한쪽에 있었으면서 / 彈丸羅地在一隅
장하여라 병력이 어찌 그리 강했던가 / 猗歟兵力何壯哉
어쩌다가 후세 들어 옛날과는 정반대로 / 歸來後世事反古
우리 나라 전역이 적의 침략 늘 당하고 / 大東全地受侵侮
지금도 해상에는 허구 많은 공갈배가 / 至今海上多虛喝
제 욕심 채우려고 해마다 손 벌린다네 / 穀帛年年充其欲
생각하면 그리 된 것 까닭이 왜 없겠는가 / 靜思其故豈無因
서생이 부질없이 국경을 안정시킬 계책 짜본다네 / 書生謾有安邊策
5. 이긍익/연려실기술 별집 제18권. 유례왕 倭 정벌기사
변어전고(邊圉典故) /서쪽 변방[西邊]
보충. 일본 신응(神應) 22년[서력 291년]에 신라의 군사가 명석포(明石浦)에 들어가니, 대판(大板)과의 거리가 1백 리라, 일본이 화친하고 군사를 풀어달라고 애걸하며 흰 말을 잡아서 맹서하였다. 호원(胡元)이 크게 군사를 동원하였으나 겨우 일기도(一岐島)에 이르러 마침내 크게 패했으니, 역대로 깊이 쳐들어가 왜인에게 이긴 나라는 오직 신라뿐이었다. 신경준(申景濬)《여암고(旅菴藁)》
6. 이덕무/ 청장관전서 제65권. 유례왕, 진평왕 倭 정벌기사
병전 兵戰 /여몽정벌(麗蒙征伐
응신 22년(291)에 신라의 군사가 대판(大阪 오오사까)에서 1백 리 떨어진 명석포(明石浦 아까시[明石])까지 깊이 들어오니, 일본이 강화하고 적간관(赤間關) 동쪽 땅에서 백마(白馬)를 죽여 맹약(盟約)하였는데, 지금도 그 백마총(白馬塚)이 있다. 흠명(欽命 540~571) 때에 신라가 일본을 치고 임나를 멸망시켰다.
(응신 22년에 신라의 군사가 대판(오사카)에서 1백 리 떨어진 명석포까지 깊이 들어오니, 일본이 강화하고 적간관 동쪽 땅에서 백마를 죽여 맹약하였는데, 지금도 그 백마총이 있다. 흠명 때에 신라가 일본을 치고 임나를 멸망시켰다)
7. 일본서기. 유례왕 왜 정벌기사
"응신 22년[291년], 갑자기 등장한 어우별[御友別] 세력에게 응신왕이 여섯현을 떼어주었다
日本書紀』巻十応神天皇二二年(辛亥二九一)秋九月辛巳朔庚寅《十》
庚寅。亦移居於葉田〈葉田。此云簸娜。〉葦守宮。時御友別參赴之。則以其兄弟子孫。爲膳夫而奉饗焉。天皇。於是看御友別謹惶侍奉之状。而有悦情。因以割吉備國封其子等也。則分川 嶋縣封長子稻速別。是下道臣之始祖也。次以上道縣封中子仲彦。是上道臣。香屋臣之始祖也。次以三野縣封弟彦。是三野臣之始祖也。復以波區藝縣封御友別弟鴨別。是笠臣之祖也。即以苑縣封兄浦凝別。是苑臣之始祖也。即以織部縣賜兄媛。是以其子孫於今在于吉備國。是其縁也。
(응신 22년, 갑자기 등장한 어우별과 그 형제 자손에게 응신왜왕이 여섯 현을 떼어주었다.)
어우별御友別(みともわけ御友別命)이 나타났으므로 신라의 세력이라고 추정하였다.하지만 추정일 뿐이라 정확하진 않다.재야사학자는 이것이 신라의 왜국 정벌에 대한 기사라고 하나 추정일 뿐이다.
반론) 왜냐면 일본 서기에서는 왜국의 정벌이 아닌 완전히 다른 글이 쓰여 있기 때문이다.
일본 서기에서는 御友別 미토모와케(みともわけ御友別命)는 신찬성씨록에서 吉備臣(吉備氏)의 조상이라고 쓰여 있다.왜인(일본인)으로 나와 있으며 일본 서기에 내용에서는 응신 22년 9월 6일 응신 왜왕이 키비의 葉田葦守宮에 나들이를 나갔을때 御友別어우별과 그 兄弟子孫膳夫(궁중요리사)로서 봉사하였다.그 공으로서 吉備国을 나누어 어우별 자손에게 나누어 주었다.
응신천황
8. 일본 덕천막부 초기에 쓰여진 "이창일본傳" – 원문 미확인. 유례왕 倭 정벌기사
"진 원강 원년 신라병이 일본을 공격하매[여], 깊이 명석포에 들어왔다." - 元康원년은 서력 291년, 신라 유례왕 8년, 일본 응신 22년
9. 신경준/旅菴遺稿卷之三/ 序 /送使之日本序
昔百濟臨政太子。乘舟入日本。都周防州。號大內殿。傳四十七世而絶。其從者之裔。代襲其土。都安藝州。卽秀吉驍將輝元之祖也。余竊以臨政爲王子豐。豊甞質於日本。百濟亡。百濟宗室。迎立爲王。豐乞師於日本以拒唐。及敗不知所之。是必與倭俱東也。方蘓烈以十三萬兵。杖鉞而來合新羅。共滅百濟。而豊以覆巢餘卵。嬰孤城而號咷。其亡不日。誰肯與之同其禍乎。然而白江之敗。血戰四合。海水盡赤。倭船焚者。四百餘艘。其不焚而逃者。不知幾艘。其致兵何其多也。其得死心。又何以至此也。百濟六百五十年之間。倭寇史無一見。至其亡救不得。則以王子歸。分土存祀。此不可謂只以利結也。新羅昔于老。儐倭使言曰。早晩以汝王爲塩奴。王妃爲爨婢。此戱耳。而侮之則深也。于老以是爲倭所焚。而于老之妻。又焚殺倭使以復讎。羅人之易倭可知。日本神應之二十二年。新羅兵入明石浦。浦距大阪纔百里。日本人乞和解兵。刑白馬以盟。今赤間關之東。有白馬墳云。日本環以重溟。外兵莫加。胡元大擧。廑至日歧島而卒大敗。歷代能深入取勝者。惟新羅而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