侍さむらい
일본 봉건시대의 계급을 일컫는 말. 그 일컫는 범위와 위상을 생각하자면 유럽의 기사에 해당된다. 그들은 양민들보다 높은 신분으로서 칼을 차고다닐 권리를 가지고 있는 특권 계급을 의미한다.
전쟁에서 활약하는 무사(부시, 모노노후)와 일치하는 개념이 아니다. 문관도 사무라이를 자처하며 도를 차고 다녔다. 그런 면에서 무사(부시 武士)계급과 사무라이(侍)는 구분해야 된다. 무로마치 시대에 무사(부시)는 귀족 계급이었고, 이들 귀족들을 시종드는 일종의 경호원 겸 군인 장교들이 사무라이였다.
전국시대로 접어들면서 이들 무사 귀족 계급이 몰락하고, 하급계층들이 하극상을 일으키면서 다수의 평민 출신들이 무사 계급('센코쿠 다이묘')이 되었지만, 이들 대부분은 평민 출신이었다. 신분 체계가 혼란스러워지면서, 관리들을 칭하는 용어가 사무라이가 되었고, 전쟁을 업으로 삼는 무관들은 모노노후로 불렸다.
사무라이는 문관과 무관의 총칭이 된 것이 전국 시대의 상황이었다. 그리고 에도 시대에 들어서는 전쟁을 업으로 삼는 부시, 모노노후는 의미가 없어지고, 평민을 다스리는 지배계급 사무라이만 남게된다.
이들의 일대기를 다룬 것으로는 추신구라(忠臣藏)와 하가쿠레(葉隱) 이야기가 대내외적으로 특히 유명하다. 일본도와 화려하게 장식된 일본식 갑주 및 뿔 장식이 달린 투구는 사무라이를 상징하는 요소이기도 하다.
닌자와 함께 일본 문화의 상징으로 손꼽히는 존재이기도 하며, 흔히 서양의 관점에서 중국에 쿵푸가 있다면, 일본에는 이 사무라이가 있다고 한다.
일본에서도 전국시대를 그린 역사물이 늘어나고 관심이 증가하면서, 점차 모노노후와 사무라이를 분리해서 받아들이는 이들이 많아졌다.
전국 시대의 모노노후는 칼을 도구로 여기는 실용주의적 모습을 보여주는 반면, 에도시대의 사무라이는 칼을 명예로 여기고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는 형식주의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일본 역사에서 사무라이는 귀족이 왕을 제치고 중앙권력을 장악한 10세기 전후에 등장하였다. 항상 칼을 차고 다니는 이미지가 강하지만 헤이안 시대(794~1185년)만 해도 사무라이는 승마와 활을 중시했다.
전쟁이 나면 말에 올라 활을 쏘았고, 승부가 나지 않을 때에만 칼을 썼다.
사무라이들이 칼 두 자루를 갖고 다닌 것은 전국 다이묘(영주)들이 영토전쟁을 벌이던 센고쿠 시대(15~16세기)다.
불순물이 많은 모래 속 철(사철)을 주원료로 삼은 탓에 부러지기 쉬워서 실전용 칼 외에 비상용으로 한 자루를 더 휴대한 것이다. 평민도 사무라이가 될 수 있었으나 1592년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 집권 이후에는 신분 이동이 제한된다.
이때부터 사무라이는 신분 대물림은 물론, 막대한 특권까지 누린다.
부녀자를 겁탈해도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은 것은 물론, 평민을 멋대로 죽일 수도 있었다.
일반인은 사무라이 비위를 거스르면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다는 두려움에 허리를 연신 굽히며 살아가야 했다.
일본인이 늘 웃으면서 친절을 과도하게 베푸는 습관은 이런 죽음 공포 때문에 생긴 것으로 보인다. 무소불위인 사무라이도 주군인 다이묘에게는 고양이 앞에 선 쥐와 같다.
다이묘가 홧김에 죽으라고 하면 죽는 시늉이라도 하는 게 아니라 실제로 할복을 한다.
이렇게라도 해서 충성심을 입증해야만 하사받은 농지와 사무라이 특권을 자식들에게 물려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전투에서 지거나 주군에게 밉보여 영지를 빼앗기면 가족 전체 밥줄이 끊겨 하루아침에 평민 신세가 된다.
사무라이는 낭인이 돼 굶주리고 헐벗어도 좀처럼 칼을 내려놓지 않는다.
농업이나 상업 등 다른 일자리를 찾지 않고 구걸로 연명하거나 전쟁 용병, 살인청부 등으로 생계를 이어간다. 전쟁터 등을 기웃거리다가 새로운 주군을 만나 공을 세우면 옛 지위를 되찾을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떠돌이 깡패로 살아가는 낭인은 일본 폭력조직 야쿠자의 전신이다. 임진왜란 이후 천하를 통일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에도(도쿄)에 군사정권을 수립한 1603년 이후에는 사무라이 역할이 크게 달라진다. 장기간 평화가 유지되면서 경제가 성장하고 평민 지위가 향상되자 사무라이 위세는 상대적으로 위축된다.
기분 내키는 대로 사람을 살해하는 권리도 박탈당한다. 사무라이는 다이묘 밑에서 특정 지역을 다스리는 공무원 노릇을 한다.
무예는 꾸준히 수련하지만 전쟁할 일이 없어져 칼 솜씨는 크게 둔해진다.
현대인이 기억하는 멋진 사무라이 이미지는 에도 시대에 형성된다.
일본도를 옆구리에 차고 화려하게 장식된 갑옷과 투구를 착용한 모습이다.
군사정권을 무너뜨리고 정치·사회·경제 시스템을 서구식으로 바꾼 메이지 유신(1867년) 체제에서는 사무라이가 사라진다. 총과 대포로 무장한 신식 군대에 맞설 능력이 없는 데다 군과 경찰을 제외한 민간인 칼 소지가 금지됐기 때문이다.
2004년 개봉된 영화 '라스트 사무라이'나 일본 만화 등에서는 사무라이가 국가와 주군을 위해 기꺼이 목숨 바치는 정의의 사도로 묘사된다. 명예를 중시한 나머지 할복도 서슴지 않는 지조 높은 무사로 미화되기도 한다.
그러나 실제 사무라이 모습은 그렇지 않았다. 오직 힘 있고 도움을 주는 사람에게만 의리를 지키고 충성했다. 강한 적을 만나면 목숨 걸고 끝까지 싸우는 게 아니라 일찌감치 투항하거나 주군을 배신하는 사례가 많았다.
맞대결을 선호한 미야모토 무사시(1584~1645년)가 일본 최고 사무라이로 추앙받는 것은 배짱 있는 무사가 그만큼 없었다는 반증이다. 대다수 사무라이는 상대가 방심할 때 기습으로 죽이는 것을 선호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기는 게 중요했기 때문이다.
무릎을 꿇고 앉았다가 비호같이 칼을 빼 들어 찌르거나 베는 동작을 수시로 익히고 손자병법을 공부한 것도 선제공격 능력을 키우기 위해서다. 손 자병법 가운데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는 '지피지기 백전불태' 구절은 행동강령으로 삼았다.
상대를 철저히 파악하고서 승산이 있다고 판단되면 선제공격을 거침없이 감행한 것이다.
명성황후 살해, 청일전쟁, 러일전쟁, 중일전쟁, 진주만 공습, 태평양전쟁 등은 하나같이 비겁한 기습공격이었다.
힘이 약한 곳을 선택해 집중적으로 때리는 것도 사무라이 특징이다.
약자를 떼 지어 괴롭히는 집단 따돌림(이지메)이 일본 사회에 만연한 것도 비열한 사무라이 전통과 무관하지 않다.
사무라이 정신으로 무장한 일본군이 국가와 민족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친다는 선전은 허구였다. 전쟁터에서 구슬처럼 부서진다는 옥쇄작전을 입버릇처럼 외쳤지만 1945년 일왕 항복 이후 자진해서 죽음을 택한 일본군 장교는 독일 나치 장교와 비슷했다고 한다.
소련 강제수용소에서는 비겁한 사무라이 실체가 그대로 드러난다. 포로가 된 일본 관동군 약 60만명은 목숨을 구걸하기 위해 소련에 앞다퉈 충성을 맹세한 것이다.
사무라이는커녕 시정잡배만도 못한 삼류 칼잡이가 그들의 본모습이었다.
가미카제를 강요한 도조 히데키 총리는 살아보겠다고 발버둥 치며 전쟁 책임을 천황 등에게 떠넘기는 추태를 보였다.
동부 헌병 사령관 오타니 게이지로는 가짜 유서를 남기고 자진으로 위장하고서 가족과 함께 지방으로 도주했다가 체포된다.
생체실험을 주도한 이시이 시로 731부대 사령관은 실험자료를 미국에 몽땅 넘겨주고서 처벌을 피하는 추악한 뒷거래를 한다.
일본인이 평소 친절하고 부드럽다가도 일단 국가 권위 아래 뭉치면 야수로 돌변하는 데는 비겁한 칼 문화의 영향이 크다. 아베 총리가 교전권을 부인하는 평화헌법 제9조를 바꾸려고 개헌 분위기를 꾸준히 조성하는 것은 이러한 국민성을 잘 알기 때문이다.
우리는 임진왜란이나 식민지배와 같은 참변을 다시 겪지 않으려면, 분노만으로는 안되고 일본의 숨겨진 웃음 속에 감춰진 섬뜩한 칼을 찾아내야 한다.
지금 중국은 동북공정으로, 일본은 평화헌법을 개정하겠다고 이래저래 동북아 정세를 묘하게 꼬고 있다. 결국 그 와중에 우리의 대외전략은 너무나 중요한 지경에 이르렀는데, 지난 5년을 포함하여, 지금까지도 제대로 된 외교 아젠다 하나 정하지 못하고, 상황에 그저 순간순간 위기에만 대응하는 전략만을 피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