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자치통감 제이백일십사 원기삼십이]
《续资治通鉴 卷二百一十四 元纪三十二》记载:“后亦多畜高丽美人,大臣有权者,辄以此遗之,京师达官贵人,必得高丽女然后为名家。自至正以来,宫中给事使令,大半高丽女,以故四方衣服、靴帽、器物,皆仿高丽,举世若狂。”
"황후도 역시 고려미인으로 삼아, 대신유권자는 곧 이를 귀하게 여겨, 수도 고관귀인은 반드시 고려여자를 얻은 후에야 명가가 된다.
그렇게 된 이래, 궁중급사사령, 대반이 고려여자이며, 이런 이유로 사방의 의복, 신발과 모자, 기물 모든것을 고려를 모방해, 온 세상이 미친 것 같다."
[숙원잡기]의 기록에는,《菽园杂记》::“马尾裙始于朝鲜国,流入京师……于是无贵无贱,服者日盛。至成化末年,朝臣多服之者矣。阁老万公安冬夏不脱……。大臣不服者惟黎吏侍淳一人而已。此服妖也,弘治初始有禁例。”
마미군은 조선국(고려)에서 시작되어, 수도로 유입됬으며......귀천을 가리지 않고 복식이 날로 성했다. 성화말년에 이르러, 조정 신하들도 입게 되었다. 각로만공안이 겨울에도 여름에도 벗지 않았다.....이 복식은 요사하므로, 홍치 초시에 금지되었다.
[만포필기] 《寓圃笔记》:"发裙之制,以马尾编成,系于衬衣之内。体肥者一裙,瘦削者或二三,使外衣之张,俨若一伞。", 치마를 넓히는 제도는, 말꼬리를 옷안에 엮어서 만든다. 몸을 비대하게 만든 하나의 치마로, 마른사람은 혹 두개 세개를 입는다, 옷을 바깥으로 넓게 퍼지게 만드는데 쓰는데, 우산과 같다."
魏書云 乃往二千載 有壇君王儉 立都阿斯達[經云 無葉山 亦云 白岳 在白州地 或云 在開城東 今白岳宮是] 開國號朝鮮 與堯同時
위서>에 이르기를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 단군왕검이 있어 아사달(경에서는 무엽산이라고 하며 혹은 백악이라고 하는데 백주의 땅 혹은 개성 동쪽이라 했으니 지금의 백악궁이 이것이다.)에 수도를 정하고 나라를 열어 조선이라 했는데 요와 더불어 같은 시기이다."
周武王卽位己卯 封箕子於朝鮮 壇君乃移於藏唐京 後還隱於阿斯達爲山神 壽一千九百八歲
주 무왕 즉위 기묘년에 기자를 조선에 봉하자 단군은 이에 장당경으로 옮겼다가 훗날 돌아와 아사달에 숨어 산신이 되었으니 나이가 1908세이다."
중국인들이 한복이 중국 카피라는 말은 짱골라들의 중화사상에서 나온 개구라임..
중국이 한복을 카피했다가 중지시킴..
중국에 한복을 전해준 시기는 원나라 기황후때임..
원나라 말기에 중원은 고려인들이 세력을 장악함..
그래서 원나라 몽골인들의 세력이 약해지면서 나라의 기근과 겹쳐 고려인 세력에 의해서 명나라가 건국됨..
원나라 말기에 남중국은 고려인 다루가치 라마단이 통치함..
홍건적들이 들고 일어설때.. 60만 홍건적을 고려장수 이성계가 2천의 기마병력으로 휩쓸고 다님..
당시 중원에서는 고려인들의 세력이 막강했고..
홍건적들은 고려군을 보면 무조건 도망침..
그래서 주원장은 고려인들의 힘으로 중원을 장악함..
한국의 사서들이나 민요들에서 나오는 주원장은 고려인이라고 말함..
고려인이 한족으로 위장해서 나라를 차지하지 않았나 추측됨..
당시 홍건적들을 벌벌떨게 한 장수가 고려장수 이성계였고..
결국 그 홍건적들이 권력을 잡을수 있게 한것도 이성계와 관련있지 않을까 추측됨..
또 한족의 나라라던 명나라 중후반인 홍치제때 고려풍의 옷을 못입게 금지시킴..
명나라 옷이 조선과 비슷하다고 조선이 한족이네 뭐네 이런 개소리 하는 것은 노예정신에 깃든 사람들의 소리임..
명나라는 원나라시기의 고려풍의 옷을 전수받아서 입고 황궁 대다수가 고려인이었슴..
조선은 복식은 고려를 따랐다고 기록됨..
또 명나라 중후기에 명나라는 고려풍옷을 금지시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