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행 중, 특히 오병감은 본인 스스로가 상업에 대한 감각이 뛰어나서 그런지, 영국의 상인들과 교류하면서 정말 엄청난 이윤을 얻는다. 그는 중국 내륙에 대해서도 다양한 네트워크를 보유했으며, 이를 통해 서양인들이 그토록 원하던 신선한 '차'와 세련된 '도자기'를 공급했으며 서양인으로부터는 온갖 종류의 시계나 액세사리 등을 구입해서, 청나라 조정과 황실에 납품하였다. 하지만 서양인들이 수요가 훨씬 높았으므로, 오병감은 막대한 이득을 챙길 수 있었다. 그는 차와 도자기만 열심히 판매하면 저절로 수익이 나는 구조였다.
전성기 때 그가 당장 보유한 '현금'만 해도 2600만 은원으로, 대청제국의 연간 수입의 절반에 해당하는 막대한 액수였다고 한다. 당시 미국 최고 부자의 재산이 700만 은원이었다고 하는데, 오병감의 부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다.
오병갑은 또한 국제적 정세도 밝은 인물이었는데, a)영국 동인도회사의 최대 채권자였으며, b)미국의 철도건설에 투자하기도 했고, c)구미의 여러 보험회사에 투자하기도 했다. (당대 동아시아의 그 어떤 동양인도 그와 같은 스케일의 투자나 경영을 한 자가 없었고, 사실 서양인도 그 정도의 능력을 갖춘이는 로스차일드 정도였다)
보스턴 출신의 한 미국 상인은 그와 함께 사업을 하다가 7만 달러의 채무를 지게 되어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었는데, 오병감은 그의 딱한 사정을 듣고 그 자리에서 채무증을 찢어버리고 더 이상의 채무는 없다고 선포하는 대인배 기질을 보여준 적도 있었다.
또한 오병감이 아들처럼 아낀 젊은 미국인 사업가가 있었는데, 그는 다름 아닌 포브스 가문의 원조, ‘존 머레이 포브스’ 였다. 그는 오병감 밑에서 장사를 배웠고, 중국 무역에서 큰 돈을 벌었고, 그리고 이 때 번 돈을 가지고 미국으로 돌아와 훗날 "철도왕"이라고 불리게 되는 기반을 쌓을 수 있었다.
그러나 동서양의 동상이몽은 결국 파국으로 치닫고 만다. 청은 광주 13행을 통해 세금을 챙기고, 서구의 진귀한 물건만을 탐할 줄 만 알았지 세계의 정세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다.
오직 황실의 욕망을 채우기 바빴지, 행상의 재산을 보호하여 국내 상업자본을 구축하고, 서구의 기술과 능력을 습득할 의지도, 어느 정도로 발전 했는지는 알려는 노력도 없었다.
사실, 서양 상인에 대한 청조정의 입장은 천조(天朝)에 조공을 바치러 온 사신 정도로 여겼을 뿐이다. 천하와 세계를 구분할 줄 몰랐던 청은, 영국의 무역적자로 인해서, 결국 아편전쟁을 초래하였고, 영국의 대포에 굴복하며 광주 13행도 1843년 막을 내린다.
난징조약으로 광주 13행의 무역독점 권리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사실, 이 행상제도는 앞서 말했듯, 외국과의 무역에서 발생하는 모든 책임을 13행이 대신 지게하기 위해 만든 제도이기에, 난징조약 후, 오병감은 아편전쟁 배상금의 1/3에 달하는 100만 은원을 납부했고, 나머지는 남은 12행이 부담을 했다. 그러고도 무역특권을 보호받기 위해 조정에 또 수많은 기부금(뇌물)도 내었다. 그러나 그가 돈으로 산 정3품의 관직도, 무수한 정치자금도 아무런 소용이 없이 독점 행상제도는 사라져 버리고, 그의 시대도 끝나갔다.
임칙서는 그가 정3품 관료임에도 책임을 지지 않고, 청 조정 보다 서양을 두둔한다 질책을 하였고, 영국은 영국대로 중국의 무역관행의 불만과 아편의 폐기에 대한 댓가를 그에게 요구했다.
오병감은 어떠한 아편무역에도 간여하지 않았지만, 청 조정이 폐기한, 영국의 아편 대금을 그가 부담을 해야 했다. 결국 전 재산을 바치다 싶이 한, 그의 노력으로도, 중국의 행상제도의 폐지를 막지 못했고, 오병감의 독점적 지위도 사라지게 되었다. 또한 그가 쌓은 상업자본은 '뇌물과 배상금'으로 물거품처럼 사라져서, 중국의 근대화에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하였다.
그는 서양인들과도 가깝고, 너무 큰 부자였기에 조정으로부터 불신을 사게 되고, 또 그를 시기하는 사람도 많았기에 결국 국가의 간섭과 경쟁자들의 음모로 몰락하게 된 것 이다.
당시 세계 최대의 부호였고, 세계를 알았던 유일한 중국인 오병감, 미국의 제일 가는 부자보다 훨씬 부유했고 영국, 미국, 인도 등지에서도 다양한 사업파트너를 보유했던 대상인. 19세기 중국이 변화하는 세계정세를 받아들이고, 오병갑의 경영지식과 사업자본을 활용할 기회를 주었다면, 19세기 말 중국의 모습은 지금과는 전혀 달랐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