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나라 성조, 즉 영락제 18년(서기 1420년)에 설치되었다. 동창의 우두머리는 제독 동창이라 부른다. 동창이 설립된 이유는 명나라 특유의 황제독재체제 + 영락제의 쿠데타 집권이 합쳐진 결과였다.
동창을 만든 영락제
원래 명나라 시조인 주원장부터 글좀 읽었다 하는 신하를 신임하지 않은데다가 영락제가 쿠데타를 일으킨 후 장기간의 내전을 거쳐 즉위하자 양심이 좀 있다 싶은 학자들은 거의 협조를 하지 않았으며, 협조를 하는 사람도 일단 의심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이유로 인해 동창은 황제가 신임할 수 있는 환관들로 구성되었다.
동창에서 모으는 정보는 각종 음모, 반란의 조짐은 당연하고 낙뢰 등 날씨에 관한 정보부터 시정의 물가까지 다양했다. 하지만 주요 목적은 관료와 황족, 군인들을 감시하면서 꼬투리만 잡히면 숙청하는 것 이었다.
3대 황제 영락제(1360~1424년)가 창설한 동창은 중국 역사에서 최고 악명을 날린 정보기관이다.
환관으로 구성되어 명나라 정치를 파국으로 이끈 동창
영락제는 1402년 명나라 2대 황제인 조카 건문제를 내쫓고 권력을 잡는다.
쿠데타로 집권한 탓에 늘 불안에 떨었던 그는 정적을 상시 감시할 필요성을 느낀다.
이렇게 해서 정보기관 동창이 1420년 탄생한다.
수집 정보는 반란 조짐이나 모함 동향에서 낙뢰 등 날씨 정보와 시장 물가까지 무제한이었다. 관료와 황족, 군인 등 주요 인물은 일거수일투족까지 감시했다. 영락제는 쿠데타 당시 충성심이 입증된 환관 세력에 동창을 맡겼다.
환관은 양날의 칼이었다. 관료 집단을 견제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하는 데 보탬이 됐지만, 폐단도 만만찮았다. 황제 비선으로 행세하며 온갖 전횡을 일삼아 국가 기강이 문란해졌다. 죄가 있든 없든 동창에 끌려가는 사람은 반신불수가 되거나 죽기도 했다.
동창 건물 옆에는 송나라 영웅 악비(1103~1142년) 사당을 세웠다.
악비는 금나라 군대와 싸워 대승을 거둔 송나라 명장이다.
동창을 국가수호 기관으로 선전하려고 악비를 활용한 듯하다.
꽃다운 이름이 후세에 길이 전해진다는 뜻으로 '백세유방'이라는 글도 내걸었다.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는 한국 안기부 부훈을 떠올린다.
동창 수장의 권력은 황제를 능가하기도 했다. 환관 위충연은 황제를 만나도 말에서 내리지 않을 정도로 안하무인이었다.
건달 출신인 위충연이 그런 인물이다. 1623년 위충연은 15대 황제 천계제(1605~1627)를 대신해 정무를 장악한다. 위충연이 무소불위 힘을 갖자 전국에서 사당이 우후죽순처럼 생겼다. 죽은 조상에게 제사 지내는 사당이 살아 있는 권력자를 기리는 용도로 세워진 것이다. 제관들은 이런 사당에서 절을 할 때 구천세를 외쳤다.
천자에게만 하는 만세에서 1천세를 낮춰 구천세로 한 것이다.
위충연이 외출할 때는 길거리 백성이 구천구백세를 연호했다고 한다.
환관이 득세한 탓에 나라가 온통 썩어들어갔다.
결국, 천계제를 이은 숭정제(1611~1644) 때 농민 반란 등으로 명나라는 멸망하고 만다.
대한제국 고종 황제도 1902년 정보기관을 운영했다고 한다.
황제 직속 제국익문사라는 조직으로 국내외 정보를 다뤘다.
한반도 침략을 노린 일본인 동태 감시가 핵심 임무였다.
다만, 수사권 없이 비밀리에 활동한 덕에 월권 논란은 없었다.